프랑스혁명의 이해
2024학년도 1학기 중간과제물
교과목명 : 세계의 역사
학 과 : 국문학과
학 번 : 202410-300309
성 명 : 황대식
프랑스혁명의 이해
Ⅰ. 서론
모든 사건과 현상은 과거와 무관한 것은 없으므로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오늘날에만 국한된 것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변천 과정을 알게 되면 현재 우리 현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좀 더 나은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 중 프랑스혁명의 배경과 혁명의 발발과 전개, 혁명의 쇠퇴와 종식, 프랑스혁명의 성과를 알아보고 이들이 나의 삶과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프랑스혁명의 배경
프랑스혁명은 파산상태에 처한 루이 16세가 삼부회의를 소집하자 그동안 쌓인 구조적인 문제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1. 구체제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살펴보면 당시 프랑스 인구 2,700만 명 중에서 제1신분인 성직자집단은 약 10만 명으로 전 국토의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2신분인 귀족집단은 약 40만 명으로 전 국토의 20%를, 나머지 2,650만 명은 제3신분으로 전 국토의 70%를 소유하고 있었다. 도시의 제3신분의 대다수는 상퀼로트다. 이들은 중세 도시 장인의 후예로, 이들은 기업가에 준하는 경우부터 영세하여 몰락 위기의 경우까지 편차가 컸다. 또한 농촌의 제3신분은 농민으로 전 인구의 85%에 달하고 전국토의 3분의 1 이상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구성은 복잡하지만 봉건제에 대한 불만과 왕실과 고위성직자와 귀족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도 컸다.
2. 왕실의 재정 위기
루이 15세의 치세 때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농업과 산업이 낙후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경쟁과 대외전쟁에서도 영국에 밀렸다. 이는 재정결실로 이어졌다. 특히 루이 16세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독립전쟁에 들인 비용은 프랑스 재정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루이 16세는 특권계급에 대한 과세 및 왕실 경비의 삭감 등을 통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왕실과 고등법원의 반발로 실패했다. 이제 마지막 방법은 삼부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3. 삼부회의 소집과 결렬
삼부회의는 성직자, 귀족, 평민 출신 의원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로 1302년에 성립되어 절대 왕정의 확립에 따라 1614년에 폐쇄되었다. 왕은 국가 파산을 막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당시 삼부회 의원은 제1신분이 294명, 제2신분이 270명, 제3신분이 578명이었다. 종전의 신분별 투표 방식을 고집하는 제1, 2신분과는 달리, 평민 대표들은 모든 대표는 1표를 행사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평민 대표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관철될 가망이 없어 보이자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루이 16세가 제3신분의 회의장을 폐쇄하자, 국민의회는 테니스 코트에 모여 관철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했다. 결국 삼부회의는 결렬되고 혁명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Ⅲ. 혁명의 발발과 전개
민중의 동원
삼부회의가 결렬되자 왕은 2만 명의 외국인 용병부대를 베르사유에 주둔시켰다. 이에 파리 민중은 국민방위대를 조직했다. 자발적으로 조직된 국민방위대는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다.
2. 군주정과 공화정을 둘러싼 논쟁
국민의회 혁명지도자들에게 혁명의 성공을 위한 농민의 지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에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파리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국민의회는 교회토지를 국유화하고, 그 토지를 부르주아와 농민들에게 매각함으로써 혁명에 대한 지지를 견고히 했다. 또한 성직자민사기본법 제정과 성직자의 시민선서 요구, 내국관세와 통행세 및 고등법원 폐지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런데 국왕은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를 거부한 채 베르사유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1789년 10월 폭동이 일어났다. 10월 폭동의 주역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시장 여성들이었다. 시위대는 베르사유로 행진하여 국왕 일가를 파리로 데려왔다. 국왕은 봉건제 폐지선언과 인권선언을 재가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회는 프랑스의 헌법을 제정했다. 따라서 정치클럽들이 결성되어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자코뱅 클럽은 광범위한 대중조직이 되어갔다.
3. 공화정의 수립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려다가 발각되어 혁명에 반대하는 것을 드러냈지만 대부분의 국민의회 성원들은 공화정보다 입헌군주제를 선호했다. 그 결과 ‘91년 헌법’은 입헌군주제 성향을 드러냈다. 이어서 입법의회가 새로 소집되어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푀양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고,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는 공화정을 주장했다. 1792년 4월에는 반혁명에 대항하는 혁명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을 위해 소집된 의용군은 민중의 혁명 열기를 부추겨 입법의회를 압박하여 왕정을 정지시켰다. 상퀼로트는 감옥과 의회를 습격하여 왕정주의자와 반혁명주의자에 대한 학살을 벌였다. 한편 1792년 발미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퇴시켰다. 이에 프랑스 제1공화정이 수립되고 국민공회가 시작되었다.
4. 자코뱅 독재의 확립
폐위된 국왕에 대한 재판은 자코뱅파와 지롱드파를 분열시켰다. 중산적 부르주아지 및 소생산자층에 기반은 둔 자코뱅파는 도시 상퀼로트의 지지를 받아 상층 부르지아지에 기반을 둔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자코뱅 독재가 확립되었다. 새로 제정된 ‘93년 헌법’은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등을 규정한 민주적 헌법이었으나 평화 시까지 실시가 보류되었다. 영국군에 의한 툴롱 함락에 자극받은 민중이 국민공회를 습격한 뒤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관용파와 연합하여 과격파인 에베르파와 격앙파를 제거했다. 이는 혁명정부와 파리 민중 사이의 결속을 해쳤다. 이어 4월 초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관용파도 제거했다.
Ⅳ. 혁명의 쇠퇴와 종식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국민공회의 온건파 부르주아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될 것이 두려워,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여 다음 날 그를 처형시켰다. 이로써 공포정치가 종식되고 1795년 총재정부가 수립되었다. 총재정부는 전쟁에 따른 경제난과 좌우파의 압력으로 정치적 불안정으로 군대에 의존했다. 결국 혁명군 지휘자 나폴레옹은 1799년의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Ⅴ. 프랑스 혁명의 성과
프랑스혁명은 인간의 제반 자유와 권리를 증진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여 자본주의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신분제를 철폐하여 평등한 사회구조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자코뱅이 추구한 이상적인 국가는 독립적 소생산자의 자유롭고 평등한 덕의 공화국이었다. 혁명의 결과 이상의 실현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재산의 불가침성 개념을 확립하여 토지를 일부 재분배하고 독립적 토지 소유농의 출현을 이루었다.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지가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르주아 사회의 기반을 수립한 혁명임에는 부정할 수는 없다.
Ⅴ. 결론
1789년 7월 14일 파리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다. 시민이 단결해 지배계급에 대항해 거둔 첫 승리의 날이다. 인류 역사상 군주제에서 시민 민주주의로 가는 위대한 디딤돌을 놓은 중요한 사건으로 오늘날 프랑스의 가장 큰 국경일인 혁명 기념일이다. 프랑스혁명의 가치가 프랑스를 넘어 유럽으로, 신대륙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가치인 자유, 평등, 권리, 박애는 프랑스혁명이 얻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자유, 평등, 권리, 박애가 당연한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프랑스혁명을 공부해 보면 피의 투쟁을 겪어 얻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마냥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문명의 흥망성쇠를 알고 대처하지 못한다면 민중의 뜻과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한 프랑스 왕정처럼 몰락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신을 쇄신하여 나아가야만 어제보다 나아지고 있는 나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