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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소리길과 단풍1

by 황교장 2015. 11. 22.

해인사 소리길과 단풍1

 

2015학년도 2학기 부산광역시 교육연수원 지정 특수분야 연수인 명리학으로 열어가는 생활지도연수생들과 함께 합천 해인사 답사를 다녀왔다.

답사순서는 소리길-점심식사-성철스님 부도-묘길상탑-해인사이다.

2015117() 오전 730분에 출발하였다. 전날 일기예보에 비가 많이 온다하여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다행히 약간의 가랑비 수준이다. 차는 막힘없이 계획대로 잘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88올림픽고속도로에 접속을 하자 차가 밀리기 시작한다.

이 도로는 지금 한참 확장공사 중이다. 차는 가다가 서기를 반복을 하다 해인사 IC 근처에서부터 속도가 조금 나기 시작을 했다. 그런데 기사분이 그만 해인사IC를 놓쳤다. 이젠 어쩔 수 없이 가조IC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잔뜩 났다. 예정된 시간보다 무려 50분이나 늦어지기 때문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들에게 사실대로 상황을 이야기를 하였다. 명리학에서 신살 중에 공망살 설명을 하여 이 위기상황을 극복하였다. 할 수 없이 일정을 새롭게 조정했다. 매표소에서 내려 해인사 소리길을 먼저 걷기로 했다. 비가 살짝 내리고 있어 우산을 쓰고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고 오히려 운치 있는 날씨로 바뀌었다. 의외로 이런 날씨를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소리蘇利이라는 이름은 2011923일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개막과 함께 탄생했다. 소리란 우주 만물이 소통하고 자연이 교감하는 생명의 소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완성된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는 깨달음의 길이며,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세월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하여 '소리길'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소리길은 해인사 국립공원입구에서 해인사 절까지 이르는 계곡이다. 이 계곡의 이름은 원래 홍류동 계곡이다.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물이 붉게 보인다고 홍류동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소리길은 홍류동계곡을 따라 새롭게 산책로를 내어 붙여진 이름이다.

 

 

해인사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차에서 내려서 소리길을 걷기로 했다. 처음 계획은 점심을 먹고 내려오면서 길상암까지만 걷기로 했는데 홍류동계곡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뀐 것이다. 소리길을 따라 걷자 농산정이 나타났다. 이 농산정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최고운이 여기에 신을 벗어 놓고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하는 곳에 최치원선생의 후손들이 정자를 세워 놓았다.

 

 

 택리지에는

경상도는 석화성(石火星)이 없고 오직 합천 가야산만은 뽀쪽한 돌이 이어져 있어서 마치 불꽃과 같다. 홀로 공중에 우뚝 솟아 몹시 높고 수려하다. 골짜기 입구에는 홍류동과 무릉교가 있는데 폭포와 반석이 수십 리에 뻗쳐 있다. 세상이 전하기를 최고운이 여기에 신을 벗어놓고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한다. 돌 위에 고운이 쓴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지금도 갓 써 놓은 것 같다. 고운의 시에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물이)돌 위를 달리면서 봉우리에 외쳐되니

사람의 말이 곁에서도 안 들리네

인간들의 시비가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덮어 버렸네

 

 

농산정 밑 계곡에는 각종의 이름과 시를 새겨놓은 큰 바위들이 다양한 형태로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 중에 고운이 지었다는 시가 있는 바위를 내 눈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호젓하게 와서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겠다.

 

 

소리길은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잘 닦여져 있다.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절정인 단풍을 감상을 하고 걸었다. 잠시나마 무념무상으로 걸을 수 있었다. 이곳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밝게 보인다.

 

 

한 시간 조금 넘게 걷고는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고바우식당이다. 내가 먹어본 우리나라 절집 밑의 식당 중에서 가장 내 입맛에 맞는 식당이라고 소개를 했다. 특히 자연산 송이버섯을 듬뿍 넣고 끓인 송이국과 표고버섯 조림의 맛은 일품이다. 선생님들이 모든 반찬들이 너무 맛이 있다고 하신다.

 

 

식사를 하고는 해인사 절로 향했다. 해인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단풍이 절정이다. 보슬비와 함께 붉고 노란 단풍잎들이 길가에 흩날리고 있다. 저절로 윤도현의 가을우체국 앞에서라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게 된다. 선생님들의 표정도 가을의 정취를 듬뿍 느끼는 듯 보였다.

 

 

 

 

먼저 들린 곳이 성철스님 부도탑이다.

 

 

성철(性徹,1912-1993)스님은 경남 산청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東山)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스님은 앉아서 잠을 자며 수행한다는 장좌불와(長坐不臥)10년 간 했으며,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3천 배를 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한 분이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종정에 취임할 때 법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큰 깨달음은 널리 비치니

고요함과 없어짐이 둘 아니로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오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로다

보고 듣는 것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사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스님은 돌아가실 때 열반송은 다음과 같다.

 

生平欺誑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 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스님은 우리나라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 돈오돈수라는 말은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단박에 깨쳐서 구경각(究竟覺, 궁극적이고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에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돈오(頓悟)를 위해서는 그 전에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그리고 돈오하고 난 뒤에도 돈오를 지키기 위하여 점수(漸修)를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불교는 선종과 교종의 논쟁을 지눌에 의해 통합이 된다. 지눌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을 전한 것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에 따른 것이므로 둘은 하나라고 하였다.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체계인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선의 입장에서 선과 교의 대립을 해소하고 깨달음과 닦음을 하나로 보는 지눌의 사상에 이르러 한국 선 사상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전통은 돈오점수인데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한 것이다.

 

성철스님의 사리와 금강경을 함께 넣었다는 스님의 부도는 특이하다. 아마 이러한 모양은 우리나라 부도 중 최초의 시도인 것 같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원형참배대는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는데 이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과 수행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위의 반구는 활짝 핀 연꽃 즉 앙련을 상징하고, 마지막 제일 위에 있는 원형의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철스님의 부도는 방형은 땅을, 원형은 우주를 상징하는 독특한 부도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태풍이 휘몰아치면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성철스님 부도를 보고 나오는 길 옆에는 오래된 부도밭이 있다. 그 중에 보물 제1242호로 지정된 아담한 길상탑이 있다. 정식 명칭은 합천 해인사 길상탑(陜川 海印寺 吉祥塔)이다. 탑은 일반적으로 법당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데 길상탑은 길가에 있는 부도들과 함께 있다.

 

 

길상탑은 신라 진성여왕 8(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과 일반인 56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탑이다. 일종의 전몰장병 위령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일반적으로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의 수로 통일신라 탑인지 고려시대 탑인지를 구분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즉 받침수가 5단이면 통일신라, 4단이면 고려시대로 구분한다. 꼭대기의 상륜부는 노반 즉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노반 윗면에 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위에 새롭게 만들어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1966년 탑 안에 안치했던 지석(誌石) 4매와 157개의 흙으로 빚어 구운 작은 탑 등을 도굴꾼들로부터 회수했다. 소탑은 원래 99,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길상탑 설명을 하고 나오는데 지나가는 관람객이 나를 문화유산 해설사로 오인을 하고는 해인사의 해인(海印)의 뜻을 묻는다. 마침 선생님들에게도 설명을 하지 않은 부분이라서 불감청고소원의 심정으로 설명을 했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부처의 지혜로 우주의 모든 만물을 깨닫고 통달하는 것을 뜻한다. 부처님의 말씀, 즉 법을 관조(觀照)한다는 것은 바다가 만상(萬象)을 비추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온 세상이 진리의 물결로 가득한 곳, 부처의 가르침, 곧 석가여래의 말씀으로 넘쳐나는 바다,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할 때에 들었던 삼매(三昧)로 일체의 것이 마음속에 나타남을 나타낸다.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바닷물에 비치는 것 같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정심(定心) 가운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이 명랑하게 나타나므로 해인정(海印定)이라 한다.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로 요약된다. 온갖 물듦이 깨끗이 사라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다. 마치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져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듯이, 이러한 경지가 곧 해인삼매(海印三昧)이다.

 

 

번뇌의 물결이 쉬면 참 지혜의 바다()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 무량한 시간, 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해인삼매이자 부처가 이룬 깨달음의 내용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참된 근원이요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해인의 세계가 펼쳐진 곳이 명산인 가야산에서도 중심처인 해인사인 셈이다.

우리들은 해인사 본절을 보기 위해 일주문으로 향했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 선종의 유래를 살펴보자.

 

선종에서 선은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마하가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이다. 그래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선의 시작으로 본다. 스승인 석가모니와 제자인 가섭 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전한 것이 선이다.

인도의 스물여덟 번째 존자인 보리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는 중국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달마에서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계승된다. 이를 일러 ‘33 조사라 한다.

6조 혜능부터 본격적인 중국선종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한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주장한다.

육조 혜능(638-713)은 선종의 법통을 단순히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선종의 진정한 창립자로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서야 중국불교는 인도적인 것에서 벗어나 중국의 성격에 맞게 독자적인 영역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7조가 회양(懷讓, 677-744), 8조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사가 서당 지장(西堂 智藏)이다. 이 지장의 제자가 통일신라에서는 도의선사-홍척국사-적인선사이다.

이중 가장 먼저 서당지장의 제자가 된 이는 도의(道儀)선사다. 도의선사는 784(선덕왕 5)에 당나라에 유학해 지장에게 깨침을 받은 승려로 821년에 귀국해 선종을 전파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승려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왕권 불교의 질서에서 그의 교리는 대접받지 못했다. 선종의 특성인 개인주의적이고 개혁적 성향을 지녀 반체제적, 반권위적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도의선사는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함을 깨닫고 서라벌을 떠나 설악산 기슭에 진전사를 짓고 40년 동안 선정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다 열반했다. 그의 의발을 전수 받은 염거화상 역시 설악산 억성사에서 주석하며 선지를 폈으나 선문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후 도의의 사상은 염거(廉居)를 거쳐 염거의 제자인 체징으로 전해지면서 체징이 가지산파를 형성하여 구산선문의 제일 윗자리에 두게 되었다.

 

이처럼 구산산문은 9개의 선종 사원이다. 이는 당나라 유학파 승려들이 들여온 선종이 호족세력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두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9개의 선종사원이 구산산문 또는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최초의 본산은 도의가 개창한 가지산문이고 마지막 본산은 왕건의 스승인 이엄의 수미산문이다. 선종의 개조자들은 대개 지방호족이나 6두품 출신이다. 특히 범일, 무염의 경우는 진골출신이었으나 6두품으로 강등된 경우이다. 구산산문은 다음과 같다.

1. 가지산문: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가 가지산에 머물러 보림사를 개창하면서 도의의 사상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되어 가지산문을 이루었다.

2. 실상산문: 홍척스님이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여 실상산문을 형성했다.

3. 동리산문: 839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혜철 스님이 곡성 태안사를 중심으로 동리산문을 이루었다.

4. 사굴산문: 범일스님이 강릉 굴산사에서 사굴산문을 이루었다. 사굴산문은 강릉의 지방호족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5. 봉림산문: 당나라에서 귀국한 현욱 스님으로부터 선풍을 이어받은 심희 스님은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봉림산문을 이루었다.

6. 사자산문: 중국 보원 스님의 선풍을 이어받고 귀국한 도윤의 제자 절중 스님이 스승을 계승하여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고 사자산문을 이루었다.

7. 희양산문: 830년에 귀국한 혜소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 스님이 문경에 봉암사를 창건하고 희양산문을 개창했다.

8. 성주산문: 호서지방에서는 보철 스님의 선을 이어받은 무염 스님이 보령의 성주산문을 열었다. 성주산문은 보령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 개창되었다.

9. 수미산문: 911(효공왕15)에 중국에서 귀국한 이엄스님은 해주의 수미산에서 광조사를 지어 수미산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