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소리길과 단풍2
길상탑을 보고 나오면 해인사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이 해인사의 본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기점이다.
해인사는 일주문을 거쳐 봉황문, 해탈문으로 점층적으로 높아져가는 진입공간과 구광루를 중심으로 한 수행공간,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한 예배공간, 장경각을 중심으로 한 법보공간으로 되어 있다.
‘조선팔경’ 또는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혀온 가야산에서 가장 기가 응축된 곳에 해인사의 본절이 있다.
택리지에는 “임진왜란 때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오대산, 소백산, 가야산은 침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하였다.
삼재란 일반적으로 전쟁과, 기근, 전염병을 말한다. 가야산은 삼재가 없는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다.
백두대간이 내륙으로 뻗어 내려 덕유산에서 갈라지는데, 백두대간의 본줄기는 남쪽의 지리산으로 향하고 다른 한 줄기는 동으로 흘러 산줄기가 솟구쳐 오른 곳이 가야산이다. 해발 1,430m에 이르는 가야산은 경상도를 남북으로 가른다.
북으로는 성주와 고령, 남으로는 합천과 거창의 네 군 사이에 위치해 있다. 가야산의 동쪽에는 낙동강, 남쪽에는 황강이 흐르고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덕유산, 남쪽으로는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가야산은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여러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을 주산으로 삼아 배가 떠나가는 형국인 ‘행주행형국’의 돛대바위 밑에 불국정토를 이룬 곳이 해인사라고 볼 수 있다.
해인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다. 불교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불(佛) 법(法) 승(僧)이다. 부처인 불, 부처의 가르침인 법,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승려를 말한다.
이를 삼보라 하여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라고 부른다. 불보사찰은 양산의 통도사(通度寺)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승보사찰은 순천의 송광사(松廣寺)다. 송광사는 지눌을 포함하여 모두 열여섯 명의 국사(十六國師)를 배출한 곳이다.
법보사찰이 이곳 해인사다. 법이란 부처님의 말씀, 즉 석가여래의 지혜를 의미하는데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이 새겨진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있는 불교경전의 성지이므로 법보사찰이다.
일주문은 근대 서예가인 해강 김규진이 쓴 伽倻山海印寺(가야산해인사)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일주문과 주변의 산세와 단풍이 어울려 신성한 기운이 느껴진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문이다. 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 서 있다는 의미에서 일주문이라고 한다. 해인사 일주문은 붉은 노을이라는 뜻을 가진 홍하문(紅霞門)이라고도 한다. 일주문은 10여 개의 계단 위에 위치해 있다. 이처럼 계단을 높인 것은 일주문 본래의 의미를 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일주문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구별하는 의미가 있다. 즉 일주문 밖은 사바세계이고 일주문 안은 극락세계가 되는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우리들은 극락의 세계에 들어서는 셈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해인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의 공간이다. 아름드리 전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회화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천 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이다. 특히 1945년에 고사했다는 느티나무 그루터기는 애장왕비의 병을 고쳐준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화엄십찰 중 하나인 해인사는 애장왕 3년(802)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애장왕의 왕비가 불치의 병이 들어 백방의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이에 신하들이 순응과 이정의 두 스님의 도력을 듣고 해인사로 찾아왔다. 스님은 오색실을 내어 주면서 실의 한 끝은 왕궁 뜰의 배나무 가지에 묶고 또 한 끝은 병실의 문고리에 묶어두라는 처방을 내렸다. 신하들이 왕궁에 돌아와 이를 임금께 고하고 두 스님이 시킨 대로 하였다. 그 결과 왕궁 뜰의 배나무가 말라 죽으면서 왕후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왕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친히 해인사에 행차하여 대가람을 짓도록 후원했다고 한다. 이날이 802년 10월 16일 가야산 해인사의 개산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잠깐 신라역사를 떠올려 보면,
통일신라에서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한 왕은 35대 경덕왕이다.
경덕왕의 아들이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상대등 김양상에게 죽음을 당한다. 김양상은 내물왕 10대손으로 37대 선덕왕이다.
선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선덕왕의 족질인 김주원을 신하들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이날 폭우가 내려 알천을 건너지를 못했다. 그래서 신하들이 상대등 김경신을 추대했다. 김경신이 바로 내물왕 12대손인 38대 원성왕이다.
원성왕의 태자 혜충이 일찍 죽자 손자가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이 소성왕도 일찍 죽어 애장(哀莊)왕이 800년 6월에 13살의 나이로 신라 제40대 왕으로 즉위한다.
이 애장왕 역시 친삼촌인 41대 헌덕왕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때 배나무가 말라죽으면서 병이 완치됐던 애장왕비도 7년밖에 더 못살고 삼촌에게 죽임을 당한다.
슬플 애(哀)의 애장왕을 생각하면서 봉황문(鳳凰門)에 다다랐다.
봉황문은 ‘해인총림’이란 현판이 걸린 문으로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일반적으로 목조 사천왕상이 있지만 해인사의 천왕문은 사천왕 탱화가 그려져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봉황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해인사 터를 지켜주는 수호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를 모신 국사단(局司壇)이 있다. 정견모주는 가야국 첫 왕의 어머니라고 알려져 있다. 국사단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해탈문이 나온다. 해탈문 앞 편액에는 '해동원종대가람'이라고 되어 있고, 뒤 편액에 '해탈문'이라고 적혀있다.
제법 가파른 길과 계단을 올라왔는데도 선생님들의 표정은 밝다. 절 주변 단풍나무들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옆에 계속 말없이 따라오던 한 선생님이 해탈문과 불이문이 어떻게 다른지를 묻는다.
해탈문은 일명 불이문이라고 한다. 천왕문을 지나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不二)문이 서 있다.
불이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고 해탈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즉 불이문이 해탈문이다. 불이는 둘이 아닌 경지를 말한다. 만남과 이별, 생과 사,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나와 네가 둘이 아니요, 선과 악, 색과 공이 둘이 아닌 것을 말한다.
이 해탈문을 지나면 모든 고통을 벗어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감을 뜻한다. 해탈문을 지나면 스님들의 일상생활과 수행과 교육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구광루와 보경당, 범종각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구광루를 지나면 비로소 주불(主佛)인 비로나자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볼 수 있다. 대적광전 앞에는 탑과 석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 궁현당, 경학원 등이 있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해인사 삼층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사찰 안 넓은 마당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유래된 명칭으로 보인다.
우선 보기에는 국보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보이는데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는 상하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었으나, 1926년 중수 때 기단을 확장하고 더 높게 하여 원형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격이 떨어진 것이다.
1926년 6월의 석탑 중수 때 상층 기단의 석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수리 후 다시 석탑 안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석탑은 기단부에서 원형을 상실하였지만,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대적광전의 중심선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2.5m 벗어난 위치에 건립되어 있어, 가람배치 상 중심축에 건립되는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예를 보이고 있다.
해인사는 가야산 최고의 명당자리에 행주(行舟) 형국의 형세로 터를 잡았다. 이는 큰 바다에 배가 나가고 있는 모양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해인사의 조산인 남산제일봉은 바위산인 화산으로 대적광전과 마주보고 있어서 불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대적광전의 좌향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잡았다고 한다.
풍수에서 남향이면 도인이 많이 배출되지만 화재가 많이 발생한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지금같이 좌향을 놓으면 도인 배출은 조금 적으나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가야산 일대는 화강암, 또는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바위산이 많다. 바위산은 오행으로 분류하면 화(火)산이다. 즉 불이 많이 나는 산이다. 그래서 그런지 해인사는 1695년부터 1871년까지 일곱 번이나 불이 났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소금을 묻어주는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절 집 중에서 행주형국으로 알려진 절은 이곳 해인사와 지리산 실상사와 화순 운주사가 대표적이다. 행주형국형이란 배가 떠나가는 형국이다. 행주형국형의 땅에는 키, 돛대, 닻 등을 구비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 중 하나만 있어도 명당이라고 한다.
해인사 풍수를 보면 가야산은 선체에 해당하고 해인사는 선실, 남산의 바위는 삿대, 장경각 뒤쪽의 바위는 돛대에 해당한다. 배의 무게 중심에 해당하는 곳에 삼층석탑을 두었다.
이 중에서도 해인사 풍수에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돛대바위다. 배를 조절하는 키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제가 해인사의 정기를 무너뜨리기 위해 돛대바위를 훼손했었다.
지금은 돛대바위가 있었던 자리에 8각 9층탑인 돛대탑으로 불리는 수미정상탑을 세워 돛대바위를 대신하게 했다고 한다.
선생님 중 한분이 해인사에는 왜 대웅전이 없는지를 질문을 한다.
해인사에는 대웅전 대신에 대적광전이 있다. 대웅전(大雄殿)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 석가 부처님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은 통일신라 때 화엄사상이 융성함에 따라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상을 모신 곳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은 비로나자(Vairocana,) 즉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비로자나불의 특징은 손 모양에 있다. 왼손집게 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고 결가부좌를 한 부처님이다. 이러한 손 모양을 지권인(智拳印)이라 한다. 지권인은 일체의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비로자나불은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국보 26호),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국보 63호), 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국보 117호)이다.
절집 현판에 대적광전(大寂光殿), 대명광전(大明光殿), 대광보전(大光寶殿),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이라고 붙어 있으면 ‘아 여기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곳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설명을 듣던 한 선생님이 대적광전에 있는 부처님의 손 모양이 설명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원형과 다르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의 원칙에 철저하게 따르고 있지만 이곳 대적광전의 손 모양은 변형되어 있다.
따라서 대적광전에 있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은 일반적인 지권인과 다르고, 대비로전의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이 올바르게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대적광전 옆에는 2007년에 낙성한 대비로전(大毘盧殿)이 있다.
그동안 장경각 전각인 법보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인데, 2005년 6월에 새로 금칠을 하던 과정에서 883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올해로 꼭 1132년이나 된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이다. 이는 국내 최고의 동형 쌍불비로자나불이다. 신라 진성여왕이 대각간 위홍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법보 공간인 장경각으로 이동하였다. 장경각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이 있다. 이곳에는 나만의 추억이 있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팔만대장경이 나와 몹시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가야산 등산도 하고 팔만대장경도 볼 겸해서 왔다.
그날이 몹시 더운 날이어서 목이 많이 말랐다. 그런데 상왕봉 밑에서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어찌나 달콤하고 맛이 있든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막걸리가 문제였다. 상왕봉 정상까지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계속 내려오자 술이 점점 더 올랐다.
마침내 해인사 본절에 도착을 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팔만대장경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에 몇 번이나 왔던 곳이어서 분명히 대적광전 옆에 팔만대장경이 있었는데 옆 건물 어디에도 장경각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들이 계속 어디에 있는지를 추궁을 하는데도 끝내 팔만대장경을 찾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지금도 그날의 난감함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그런데 몇 년 후 다시 찾아가 보니 그때 못 찾을 만했다.
대적광전 옆에는 장경각이 없었고 대적광전 뒤쪽에 장경각이 있었다. 장경각으로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른 계단으로 급경사다. 조심하면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서 가라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작년에 다녀온 앙코르와트 유적도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만 신들이 노니는 공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신들을 만날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가야 하는데 술이 취해서 찾았으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맑은 정신으로 아들과 함께 이 날을 회상하면서 제대로 해인사를 답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가왔다.
가픈 호흡으로 장경각에 오르면 수다라전(修多羅殿)이 나온다.
수다라는 ‘불교경전’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의 ‘Sutra’를 음역한 말이다. 수다라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다. 예전에 왔을 때는 안에 들어가서 다 볼 수 있었다.
수다라전 뒤쪽에 있는 똑같은 크기의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다. 이 두 건물 사이사이에 동서로 동사간전, 서사간전이라고 불리는 건물이 연결이 되어 장방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수다라전과 법보전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장경각은 일반 건물과는 다른 구조이다.
바닥은 소금과 숯, 흙으로 마감하여 지면의 습기를 방지하고, 창살을 내어 환풍, 제습 및 가습이 자연스럽게 유지되도록 과학적으로 만들어 졌다.
장경각은 1481년 조선 성종 12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다. 조선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이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모습이어서 더욱더 의미가 있어 보이는 건축물이다.
수다라전과 법보전에는 대장경 경판을 소장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국보 제32호이다. 1011년에 새긴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1236년 몽골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불교적인 의미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251년에 다시 완성하였다. 이를 재조대장경이라고 한다.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하다가 1398년 5월에 이곳 해인사로 옮겨왔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1,516종 8만 1,258판인데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체제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불교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 목판 인쇄술의 발달수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택리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라 애장왕이 죽어서 염까지 마쳤다가 다시 깨어나, 명부 관원에게 발원하기로 약속했다면서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팔만대장경을 사서 배에 싣고 왔다.
이 대장경은 목판에 새겨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을 한 다음 장경각 120칸을 지어서 간수하고 있다. 그 후 천 년이 되었는데도 판이 새로 새긴 것과 같다.
날아가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날고 지붕 위에 앉지도 않으니 실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의 경전은 아무리 대궐 안에 간직해도 새가 지붕 위를 날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 불교의 경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이중환 선생이 직접 와 보지도 않고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를 기술한 것 같다.
한동안 팔만대장경 경판의 나무가 무슨 나무일까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으로 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백화목(白樺木), 즉 자작나무가 주종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과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산벚나무 62%, 돌배나무 13%, 자작나무 8%, 층층나무 6%, 단풍나무 3%, 후박나무 3%, 그밖에 버드나무, 굴거리나무도 얼마간 사용하였음이 밝혀졌다.
장경각을 둘러보고 내려오면 학사대를 만난다. 학사대에는 오래된 전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최치원 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 후에 이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나 자라 지금의 전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세히 보면 거꾸로 자란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해인사 답사연수를 마치고 내려오니 내려오는 길의 단풍나무의 운치는 올라갈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고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 떠올랐다. 똑 같은 길이라도 오고갈 때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사람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주역에서 역이란 늘 변하는 것이다. 우주 만물도 변하고, 음양도 변하고, 오행도 변하고, 십간십이지도 변한다. 이것이 명리학의 기본 이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중용과 중도를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내 명리학 공부의 핵심이며, 이러한 생각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하여 이 연수를 시작한 셈이다.
연수를 기획한 총무님 수고많으셨고, 궂은 날씨에도 참석하여 좋은 기운을 함께 나누어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