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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안동 선비의 기개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

by 황교장 2007. 7. 1.
 

 안동 선비의 기개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


신세동칠층석탑에서 200M 정도 골목길을 따라 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독립투사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생가인 임청각(臨淸閣)이 나온다. 석주선생은 학봉종택 김흥락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임청각은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청각 입구


우선 중앙선 철길과 안동댐 임하댐이 건설되기 전  본래의 임청각 풍수를 상상해 보자. 일반적으로 양택(陽宅, 집터) 풍수에서 명당의 기본 조건은 대체로 다음의 3가지다.

 

1,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측면에서 보면

집 뒤에 있는 영남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의 맥이 중간 기착지인 태백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이곳 임청각에 혈을 이루고 있다.

집 앞의 물은, 한 줄기는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청량산을 끼고 돌고 돌아 도산서원 앞을 지나, 임청각에 다다르게 된다. 또 다른 물줄기인 반변천은 조지훈 생가가 있는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물이, 서석지가 있는 입암과 봉감모전석탑 앞을 돌아,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한 물과, 진보면에서 만나, 의성김씨 내앞종택을 거쳐 임청각 맞은편에 있는 무산에서 만난다. 즉 두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다. 일반적으로 합수머리는 대개 다 명당이라고 한다. 이 합수 지점이 와부탄(瓦釜灘)이다. 와부탄 주변은 넓은 백사장과 백로 등 많은 새들이 무리를 지어 놀아 한 폭의 살아있는 동양화를 연출했을 것이다. 얼마나 경치가 좋았으면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임청각을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최고 명승지라고 했겠는가!


2, 전저후고(前低後高) : 앞은 낮고 뒤는 높은 양택 풍수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전형적인 지형이다. 원래는 아흔아홉 간 집으로, 남자양반들의 공간인 사랑채, 여자양반들의 공간인 안채, 여자노비들의 공간인 안행랑채, 남자노비들의 공간인 바깥 행랑채 등으로 건물을 남녀별, 계층별로 구분하고 있다.

안채와 바깥채 기단의 높이 차이가 2m나 되어 건물의 위계질서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별당 형식으로 지은 멋진 건물 군자정(君子亭)은 사랑채이면서 동시에 정자이다. 군자정을 가장 높게 지어 권위와 위엄을 나타낸다.


3, 전착후관(前窄後寬) : 출입문은 좁고 뒤뜰 안이 넉넉한 구조를 일컫는다. 지금의 법흥교 다리 밑으로 통과해 안동댐으로 약 100여m 지점에 길 가운데 아주 오래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귀신 붙는 나무라고도 알려진 이 나무가 임청각 대문 바로 입구에 서 있었던 나무라고 한다. 이로 보아 뒤뜰 안이 얼마나 넉넉했겠는지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이만하면 완벽한 풍수가 아니겠는가!

이런 풍수를 갖춘 이 집 전체를  임청각(臨淸閣)이라 부른다.

 군자정 현판

 

사랑채인 군자정 안에 있는 이 집 당호 臨淸閣 현판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올 초에 이 글씨를 볼 욕심으로 군자정에 달려 있는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 봤는데 다 잠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뒤쪽 쪽문을 당기니 이 문만 열려 있어 정자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기분 좋게 글씨들을 오래도록 감상하였다. 무딘 내 눈에도 지금까지 보았던 퇴계 선생의 글씨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글씨에 멋과 힘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군자정 안에는 농암 이현보 선생과 고경명 선생 이상룡 선생의 글씨의 현판도 함께 있어 감상할 수 있었다.


임청각에는 삼정승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정승이 태어날 방은 영실(靈室)이라 불린다. 영실 앞에는 진응수(眞應水)가 솟는 영천(靈泉)이라는 샘이 있어 우물방이라고도 한다.

우물방에서 태어난 인물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을 포함한 9명의 독립유공자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피난 간 약봉(藥峯) 서성(徐·1558~1631), 흥선대원군 때 폐정개혁을 주창한 좌의정 매산(梅山) 류후조(柳厚祚·1798~1876)이다. 서성과 류후조는 모두 임청각의 외손들이다. 이들의 어머니는 고성 이씨의 종녀로 친정인 우물방에 와서 해산했다. 우물방 영천(靈泉)의 정기를 받은 셈이다.

임청각은 2004년부터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방이 우물방이고 다음이 군자정이라고 한다. 우리 학교 직원연수 때 임청각의 우물방과 군자정 그리고 농암종택 중 한 곳에서 숙박을 하려고 했는데 이곳은 공사가 한창이라 농암종택으로 정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회양진이고왕 혹식장이운)

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며 극락왕생도 바라지 아니하네.

좋을 때 홀로 거닐다 때론 지팡이 세워두고 김도 매고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

살다 때가 되면 그 곳으로 돌아가 기꺼이 천명을 받으리라.


 臨淸流而賦詩의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라 한다.


 임청각 가계도를 보면 제일 위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癌·1297~1364)이 나온다. 우리나라 상고사의 귀중한 자료인 ‘한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저술한 학자다. 행촌의 손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1368~1429))이다. 이원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1419~1480)이 이곳 풍광에 매료되어 입향조가 되었다. 고성 이씨들이 이증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안동과 인연을 맺는다.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임청각을 건립했다.


임청각 안에는 ‘제임청각’(題臨淸閣)이라는 제목의 현판시가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고경명선생이다. 현판시를 보면 마지막에 고태헌(高苔軒)이라는 글자가 있다. 고태헌은 고경명의 별호다. 시는 당시 임청각의 낭만적이고 흥겨운 분위기를 전해준다.


훤출한 누각 초여름 더위 식혀 신선하니 조망이 새롭고(快閣凌 眺望新)

산에 머금은 축축한 이슬비는 나를 다시 머물게 하는구나(藏山小雨更留人)

회갑잔치 주야로 이어지니 즐겁기 그지없고 (華筵卜夜歡悰洽)

경사가 겹쳤으니 즐거움이 진진하도다 (勝事聯編喜氣津)

운수가 마을을 에워싸니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이요(雲水抱村開活畵)

갖은 악기 빠른 가락 손님들 흥을 돋운다 (絲簧咽座擁嘉賓)

시를 지은들 소용없고 주인 이름 다 아는데 (題詩不用知名姓)

날 천태산 신선도인 하계진임에랴 (過去天台賀季眞)

-조용헌의 자존과 풍류로 지켜온 500년 선비 가문의 기개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 중에서-


전라도 사람 고경명선생이 경상도 안동의 임청각까지 와서 남긴 시 현판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까닭은 두 사람이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같이 벼슬할 때 친교가 있었고, 그 인연으로 임청각 주인의 딸과 제봉의 큰아들이 혼인 했던 것이다. 제봉이 사돈집이었던 임청각에 들른 시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신묘년 늦은 봄이다. 59세였던 제봉이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곧바로 고향 광주로 가지 않고 서울로 가면서 중간에 들렀다.


임청각의 11대 종손인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1726~1773)은 우리 나라 최초의 낙동강 유람기인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을 남겼다. 허주에게는 5벽(癖)이 있었다고 한다. 즉 고서벽(古書癖), 탄금벽(彈琴癖), 화훼벽(花卉癖), 서화벽(書畵癖), 주유벽(舟遊癖)이다. 옛 책을 모으는 취미, 거문고를 타는 취미, 꽃을 기르고 감상하는 취미,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취미, 배타고 낙동강의 절경을 유람하는 취미이다. 평생을 해도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못하는데 허주는 이 다섯을 모두 전문가 수준에 다다랐다고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라도 양반들인 해남의 고산 윤선도 가문이나 진도의 소치 허련 가문에서는 화첩을 많이 발간되었지만 경상도 그것도 안동지방에서 화첩이 발간된 것은 아마 임청각뿐이 아닐까 생각된다.


허주의 취미생활 중에 마지막 단계가 배타고 여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배 타고 유람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쌍쌍이 벗을 삼아 푸른 이끼 밟으며 (相伴雙雙踏綠苔)

이른 아침 마을 어귀에서 배를 띄우네 (平明解纜小城常)

아쉬워라 영은 숙부 세상일에 여념 없어 (却憐嶺隱多關事)

강산은 절로 있건만 눈조차 떠지지 않네 (自在江山眼不開) …

외로운 돛단배는 물길 따라 선경을 찾아 나서니 (孤舟遂水覓仙源)

곳곳의 풍광에 묵은 번뇌가 사라지네 (到處烟光滌惱煩)

강가에 봄이 다했다 말하지 말게나 (莫道汀洲春已盡)

바위틈에 핀 꽃 지면 녹음이 가득할지니 (巖花落後綠陰繁).


또한 거문고에 서금배(書琴背)라는 금명(琴銘)을 새기고 거문고에 대해 노래했다.


일생토록 한 일이 무엇이기에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었는가 (成何事 頭已白)

네가 없었던들 나는 벌써 속물이 되었겠지 (不有爾 我幾俗)

강물 위로 비치는 달빛은 밝게 빛나고 강정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江月明 江夜深)

오직 너의 소리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누나( 惟爾音 知我心)

내 마음을 알아줄 이 네가 아니면 그 누구리 (知我心 非爾誰)

잠시도 너를 내 곁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네. (不可使爾 須臾相離)

 -김학수 역-

 

이 두 편의 시는 소동파의 적벽부를 연상하게 한다. 내가 처음 소식의 적벽부를 읽었을 때 느낀 인생무상과 허무함이 이 시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임청각 출신 중에서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한 사람은 500년 동안 이후영(병조정랑) 한 사람뿐인데도 안동에서는 가장 알아주는 명문가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임청각을 건립한 이명부터 석주까지 종손 20명 모두가 서첩을 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임청각 사람들은 벼슬하기보다는 학문하는 집안으로 명문가를 유지했다.


안동 양반문화의 특징은 벼슬보다는 학문을 높게 쳐 주고, 학문보다는 지조를 가장 높게 쳐준다. 안동에서는 안동유림의 최고 명예직인 유향좌수와 도산서원 전교에 뽑히는 것을 최고로 친다. 유향좌수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루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싱글벙글하며 선조 임금과 마주하자 이를 궁금하게 여긴 선조가 ‘왜 그리도 기분이 좋은가’ 라고 물었다.

서애 왈 ‘내가 안동 유향좌수로 천거되어 기뻐 그런다’고 대답하자,

선조 왈 ‘유향좌수가 일국의 영의정보다 더 지위가 높으냐’고 물었다.

서애가 대답하기를 ‘유향좌수는 양반들의 대표로 안동에서는 영의정보다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리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향좌수는 유향소의 수장이다. 유향소는 토착 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로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던 곳이다. 다른 군현에서는 진짜 양반은 유향좌수에 오르는 것을 기피했으나 안동의 선비들은 이를 가장 명예롭게 여겼다고 한다. 유향좌수에 오르는 데는 학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품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다, 이런 유향좌수와 도산서원의 원장격인 도산서원 전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이 바로 임청각이라고 한다. 임청각 선조들은 학행을 실천하기 위하여 250년 전에 일종의 학술모임인 문회계(文會禊)를 만들었다고 한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종택이지만 사당에는 조상들의 위패가 없다. 1911년 50여 명의 식솔들과 함께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묘가 무슨 소용이냐’하며 위폐를 전부 땅에 묻고 떠났기 때문이라 한다. 석주선생이 임청각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한편의 시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旣奪我田宅(기탈아전택) 이미 내 논밭과 집을 빼앗아가고

復謀我妻努(복모아처노) 다시 내 아내와 자식을 해치려 하네

此頭寧可斫(차두녕가작)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此膝不可奴(차슬불가노)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


이 시 한 구절에서 선생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선생은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52세의 나이에 온 가족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다.

임청각은 석주선생이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석 재산을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까지 세 번이나 판 것을 고성 이씨문중에서 매번 다시 구입했다고 한다. 일제가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 철로(1936년 착공 1942년 개통)를 놓으면서 아예 집을 없애려는 것을 지역사회에서 결사적으로 반발하여 그나마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임청각(臨淸閣)은 1990년 자신의 옛 주인을 맞아 방문객으로 분주한 적이 있었다.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유해가 중국으로부터 봉환되었던 것이다.

“슬퍼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는 고별시를 남긴 채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을 떠난 지 79년만의 조용한 귀국이요, 귀가였다.

선생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석주 이상룡선생 아우인 이상동, 이봉희 삼형제의 자녀들인 이준형,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석주의 손자 이병화 등 한 집안에서 9명이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가면 ‘석주문고’를 볼 수 있다. 여기에 있는 임청각의 서적들은 모두 395종으로 1,309권에 이른다. 1973년에 기증할 당시 고려대 김상협 총장이 4,000만원을 보상하겠다고 하자 “이범증 교장(석주 장손 이병화의 아들)은 조상의 정신적인 유산을 팔아먹을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이 교장은 사글세를 살고 있었다. -(최효찬,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중에서)-

 보수 중인 임청각 군자정 앞에서


임청각은 한참 보수 공사 중이었다. 공사표지판에는 7월 5일까지 마감으로 되어 있었다. 직원연수를 가는 날은 그 이후니까 공사가 그 이전에 다 마무리되어 제대로 된 임청각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군자정 안에 문을 활짝 열고 비록 철길로 막혀 있지만 안동댐의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안동의 문화와, 선비정신과, 시대의 희생이 된 한 가문의 종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뜻이 모여 신세동칠층전탑과 임청각이 제 본래의 풍광을 복원하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기원하고 싶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임청각의 주인들이 보여주는 정신적인 자긍심, 역사의 진실, 역사의 향기인 지조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가 먼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한 체험을 해야만 가능하지 않겠는가. 해외여행도 좋지만 우리 것부터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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