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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안동의 뿌리 삼태사묘

by 황교장 2007. 6. 25.
 

안동의 뿌리 삼태사묘


제비원을 나와 안동 시내에 들어오면 구시가지의 중심에 안동태사묘(安東太師廟)가 있다.

안동태사묘는 안동 김(金)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 권(權)씨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 장(張)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을 모신 사당이다.

 삼태사묘 숭보당

 

안동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고창군으로 불렸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이유인즉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고창 땅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 패권(覇權)을 벌였는데 삼태사(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이 병산대첩(甁山大捷)으로 견훤은 병사 팔천 명을 잃고 패주하여 936년 고려에게 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한 원인이 된 전투다.

고려태조 왕건은 삼공신에게 병산대첩의 공으로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직위를 주어 태사(太師)에 오르게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세 가지 성(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을 하사하였다.

또한 동쪽을 안전하게 했다는 뜻인 안동(安東)이라는 고을 이름도 함께 주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태사묘 입구에는 경모루(敬慕樓)라는 2층 누각이 있다. 보물각에는 삼태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이 유물은 보물 제451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잠겨 있어 보지는 못하였다.

이곳에는 삼태사의 위패만 있고, 묘는 좀 떨어진 서후면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경모루


태사묘 안에 가니 세 성의 화수회 사무실이 있었다. 마침 모인 사람들끼리 수박을 먹고 있었다. 태사묘에 오기 전에 우연히 들른 곳에서 재사는 보았지만 무덤은 찾을 수 없었던지라

“ 무덤은 어디에 있습니까? ” 하고 물어 보았다

답변은 하지 않고 성씨가 무엇인지만 물었다.

“저는 황가라서 관계가 없지만 풍수에 관심이 있어 음택풍수를 한번 보고 싶어서 여쭈어 봅니다.” 라고 했더니

“무덤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라고 답했다.

“그 정도 예의는 있습니다. ”

재사가 있는 곳 가까이에 무덤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자료만 얻고 태사묘를 나왔다.


학봉종택을 나와 봉정사 가는 길에 권태사묘소의 표지판이 있었다.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찾아가 보았다. 묘소는 찾지 못하고 오래된 건물이 있어 가 보았더니 안동권씨능동재사였다. 재사(齋舍)란 묘소 근처에서 이들 씨족들이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에게 제사도 지내고 문중회의도 하고, 멀리서 오는 후손들에게 잠자리도 제공하는 곳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재사의 규모에 나는 완전 압도를 당했다. 중요민속자료 제 183호로 지정된 안동권씨능동재사(安東權氏陵洞齋舍)는 지금은 일부 불타 없어졌지만 한때는 총 70여 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안동권씨 능동재사

 

안동권씨능동재사에서 약 300m쯤 위 야산 중턱에 엄청난 건물이 또 있다. 이 건물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46호로 지정된 안동숭실재(安東崇室齋)로 이 건물 또한 재사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은 풍산부원군 류중영의 묘제를 위해 지어졌다. 류중영은 서애 류성룡의 부친이며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경연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중략.... 봉정사의 건물들과 그 분위기가 비슷하며 정면 6칸 중 4칸은 원래의 구조이고 왼쪽의 2칸은 나중에 달아낸 것이다.

숭실제는 원래 능효사의 한 전각이었는데, 풍산 류씨가 재사로 인수하여 1558년에 중수하고, 1622년 보수하였다.”

퇴계선생의 수제자 중 한 분으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선생 부친의 재사이니 규모가 크다는 것은 짐작이 될 것이다.

 안동 숭실재


두 재사의 규모를 보고

안동 권씨와 풍산 류씨의 자존심 대결이자 세력 대결로까지 느껴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의 비약일까?

 

여기에 질세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인 안동 김씨 태장재사가 봉정사 입구에서 조금만  왼쪽으로 가면 나오는데 안내판에는

“이 건물은 안동김씨 시조인 태사 김선평의 묘단을 지키고 제사를 받들기 위한 곳으로 중략... 제사에 쓰이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 외지에서 오는 후손들이 참석하는 여러 개의 방, 묘제 후에 음복과 문중회의를 여는 이상루(履霜樓)가 있다. 이상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이다.” 라고 되어 있다.

 안동김씨 태장재사

 

 태장재사 앞 연못에 핀 수련


참으로 대단한 위세다. 일반적으로 문중 재실의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2칸 기와집만 되어도 제법 알아주는 문중인데 이 세 곳의 재사는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불허다. 천 년 이상 이어온 양반은 그저 양반이 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이 재사들이 문화재로 등록은 다 되어 있었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대부분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이제는 한 가문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지원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봉종택의 김흥락 선생의 제자인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임청각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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