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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우리나라 最古의 목조건물이 있는 절 천등산 봉정사

by 황교장 2007. 6. 20.
 

우리나라 절집을 많이 다녀 봤지만 봉정사만큼 기품 있고 절집다운 절은 없었다. 그동안 봉정사는 절집다운 절로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수 년 전 근처를 지나다가 봉정사에 들렸더니 관광버스 두 대에서 시끄러운 유행가 뽕짝 공해를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전에 없던 매표소까지 등장하여 입장료를 받고 있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999년 4월 21일 73세의 생일을 맞이하여 한국을 방문하면서 안동 하회마을에서 생일상을 받고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보면서 흥겨워 발로 박자까지 맞추고 간 곳이 봉정사다. 이때부터 유명세를 타 입장료도 받고 관광객 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봉정사 가는 길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대사가 창건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등장한다.

천등산은 원래 이름이 대망산이었다.

하루는 능인대사가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는데 아리따운 한 여인이 앞에 나타나

“여보세요 낭군님” 하고 옥을 굴리는 듯 상냥한 목소리로 능인을 불렀다.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예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능인의 손을 살며시 잡지 않는가!

능인이 눈을 들어 보니 과연 아름다운 여인이다. 곱고 흰 살결에 반듯한 이마,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거기에다 지혜와 열정이 숨어 있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소녀는 낭군님의 지고하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낭군님을 모시게 하여 주옵소서”

여인의 음성은 너무 애절하여 가슴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능인은 십 년을 쌓아온 수련을 허물 수가 없었다.

능인은 “나는 안일을 원하지 아니하며 오직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공력을 사모할 뿐 세속의 어떤 기쁨도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가거라!”(에고 바보 능인 같으니라구...) 라고 호통을 쳤다.

여인이 계속 온갖 유혹을 했지만 능인은 말려들지 않았다.

이 여인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능인을 시험하러 온 천상의 선녀였다.

이에 감복한 옥황상제는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훤하게 밝혀 주었다고 해서 이름을 천등산(天燈山)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이다.

또한 봉정사는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도력으로 종이 봉황(鳳凰)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하여 이에 봉황새 봉(鳳)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鳳停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봉정사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아점으로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천천히 여유자적하게 올랐다.

길가에 피어난 유월의 야생화가 반갑게 맞아준다.

꿀풀, 애기똥풀, 개망초, 칼퀴, 지칭개, 기린초...

미나리아재비와 개구리자리는 사진만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운데 나란히 함께 자라고 있어 비교하기가 쉬웠다.

조금 오르면 왼편 계곡 건너에 제법 멋진 정자가  나타난다. 이곳은 퇴계선생이 젊을 때 학문을 하던 장소이자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인 창암정사(蒼巖精舍)다. 전에 왔을 때는 비가 많이 와서 폭포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수량이 많이 줄어서 정취가 그 때만 못하였다.

 

 창암정사

 

정자 앞에 기이한 바위가 있는데 퇴계선생이 명옥대(鳴玉臺)라 이름 지었다. 

정자의 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臺舊名洛水今取陸士衡時飛泉漱鳴玉之語改之(대구명낙수금위육사형시비천수명옥지어개지)

대의 옛 이름은 ‘낙수’인데 지금 육사형의 ‘비천수명옥’의 시구를 취하여 고치다.(육사형은 중국 서진의 문인)

포가 있는 바위가 낙수대였으나 퇴계선생이 육사형의 시에서 이름을 따와 명옥대로 고쳤다.

 

 명옥대

 

현판의 내용을 보면

‘병자(1515, 15세)년 봄에 이곳에서 여러 친구들과 놀다가 66세 때 다시 와서 보니  같이 놀았던 친구들은 다 저 세상으로 가고 홀로 와서 옛 일 추억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이에 시를 지어 말한다.’ 라고 적혀 있다. 이 글과 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공기가 깨끗해서인지 정자의 계자난간 아래에 핀 개망초조차 그 자태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개망초

 

봉정사를 오르는 길은 운치 있고 호젓한 길이다. 아름드리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가 숲 향기를 뿜어낸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봉정사가 옛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봉정사는 우리나라의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국보 15호)과 대웅전(보물 55호), 화엄강당(보물 448호), 고금당(보물 449호), 만세루, 영화 촬영장소로 많이 알려진 영산암 등이 있어 우리나라 목조 건물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곳이다.

봉정사의 가람 배치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두 개의 독립된 영역이다. 이는 불국사의 가람 배치와도 비슷하다.

만세루 아래 문을 통해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멋진 대웅전이 맞이한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대웅전 건물의 특이한 점은 전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대웅전에 이러한 툇마루를 본 적이 없다.

 

 봉정사 대웅전

 

대웅전 안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단과 벽화가 압도한다.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다.

석가모니불 뒤에 걸린 후불탱화는 1713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에는 宣德十年乙卯八月初一日書(1435년 세종 17년) 新羅代五百之余年至乙卯年分法堂重倉(신라 때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한다.)라고 쓰여 있다. 

따라서 대웅전을 처음 창건한 연대는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 년이 앞선 935년에 창건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극락전보다도 더 오래된 건물이다.

또한 대웅전 내 불단바닥 우측에는 辛丑支正二十一年鳳亭寺啄子造成上壇有覺?化主戒珠朴宰巨(지정 21년<1361, 공민왕 10년>에 탁자를 제작 시주하다. 시주자 박재거)라고 적힌 묵서명이 발견되어 대웅전 불단은 731년이나 된 현존 최고의 목조 불단임이 판명되었다는 봉정사 측의 설명이다.


대웅전을 나와 공식적인 현존 最古의 목조건물인 극락전으로 향했다.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크기가 다른 자연초석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고, 극락전은 1363년에 중수했으니 봉정사 극락전이 13년 먼저 중수했다는 의미다. 이것으로 최고의 목조 건물이며 건축의 형태 모양 등을 봐도 극락전이 더 오래된 양식이라고 한다.

 

 봉정사 극락전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곳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아무 의미도 모르는 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외우던 부처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극락은 고뇌하는 중생들의 영원한 피안이다. 그곳에는 빛이 있고, 생명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해탈이 있다. 아미타불은 무량한 빛 그 자체이며, 무량한 수명이다. 불교도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말함이다. 

극락전은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극락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 부여 무량사의 극락전, 강진 무위사의 극락전, 봉정사의 극락전이다.

극락전 내부에 들어서니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불상 위에 있는 닫집(법당의 불상 위에 설치되어 있는 매우 정교한 집 안에 있는 집)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구조물이었다. 또 하나 극락전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문이었다. 사진을 보면, 문이 대웅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탑의 감실 같은 느낌의 문이 아주 간결하다. 정면에서 보면 가운데에만 문을 내고 양쪽에는 통풍과 채광이 되는 살창을 단 것은  최근에 복원하면서 조선시대 때 모습이 변형된 것을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라 한다.

 

 극락전 불상 위  닫집


 극락전을 나오면 오른편 건물이 古金堂이다. 고금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맞배지붕 건물이다. 고금당의 현판글씨가 재미있게 쓰여 있다. 금당은 원래 불상을 모시는 집을 의미하는데 지금은 요사체로 쓰이고 있다.

고금당을 보고 다시 화엄강당의 구조를 살필 수 있다. 화엄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 주심포(기둥 상부에만 공포가 있는 구조)계 맞배지붕이다. 화엄강당은 막 출가한 스님들이 교육을 받는 장소다. 특이하게도 온돌방 구조이다. 

 

 고금당과 삼층석탑

 

이쯤 되면 봉정사에 있는 큼직한 문화재는 감상을 다 한 셈이다. 바쁘게 구경한 관계로 이제는 느긋하게 만세루 누각에 앉아서 절 전체를 조망하면서 쉬어야 한다. 만세루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무딘 내 글로서 표현하는 건 한계다. 직접 체험하고 느껴야만 알 수 있다. 일천한 내 풍수 실력으로 봉정사의 풍수를 이야기한다는 게 주제 넘는다. 봉정사는 아담하고, 아늑하고, 고요하고, 볼거리 많고, 기품 있는 절이다. 

이곳의 풍광이 어디서 많이 보았다고 느껴졌는데 비교적 최근에 끝난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가 서화담과 담론을 나누는 장면의 배경이라고 한다.

 

 만세루 마루


봉정사에 와서 안 보고 가면 서운한 곳이 한 곳 더 있다. 영산암이다. 요사체인 무량해회(無量海會)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등의 촬영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영산암은 우화루(雨花樓)라는 누각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 우화루는 본래 극락전 앞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우화루라는 이름은 석가가 영취산에서 득도한 후 법화경을 처음 설법을 할 때 하늘에서 꽃 비가 내렸다고 한 데에서 따왔다고 한다.

우화루의 글씨가 인상적이다, 해남의 윤선도 생가에 있는 녹우당 현판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녹우당 글씨는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옥동 이서가 쓴 글씨인데, 이 글씨는 누가 쓴 글인지 자료를 찾아 봐도 없다. 누구 아시는 분은 한 수 가르쳐 주길 바란다.

 

우화루

 

우화루로 들어갈 때는 머리를 조심조심해야 한다. 문이 아주 낮다. 영산암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다. 만세루를 통과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영산암에 들어서면 잘 꾸며진 사대부집 정원에 온 것처럼 느껴진다. 주지실인 송암당과 관심당, 우화루의 누마루로 연결되어 전체 건물이 하나의 동선(動線)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발을 신지 않더라도 건너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러 영화에서 보아서 그런지 정겹고 익숙한 풍경이다.

 

 영산암

 

이젠 봉정사에서는 볼 것은 다 본 셈이다. 봉정사를 뒤에 두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큰 참나무 사이에 약간 달리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참나무들과 섞여 있어 멀리서 보고 참나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감나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키가 큰 감나무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최고(最高)가 아닐까 생각된다.

 

 봉정사 감나무


영국여왕이 다녀간 지도 어언 8년, 봉정사가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 또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절과는 달리 번잡하게 새로운 불사를 하지 않고 간결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봉정사의 주지스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세속적으로 변해가는 다른 절과는 달리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 채 영원히 남아 있기를 염원하면서 제비원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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