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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를 찾아서

by 황교장 2007. 5. 10.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를 찾아서

 

수종사에서 내려와 양수리를 지나면 양평으로 이어진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길 또한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양평읍에 도달하면 은행나무로 유명한 용문사로 가는 방향과 여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주 방향으로 10여 분 달려 고달사지 표지판이 나오면 좌회전하여 골프장을 지나 고개 하나를 넘으면 고달사지 주차장에 다다른다.

 

고달사지는 10여 년전 신륵사에서 고달사지를 거쳐 용문사로 갈 작정이었는데 이정표를  놓쳐 가 보지 못한 곳이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는데 창건자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달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달이라는 석공과 관련이 있다. 고달이 조각을 다 완성하고 보니 가족들이 다 굶어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후 불교에 귀의하여 도통한 큰 스님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달사지는 혜목산(慧目山)으로 둘려 쌓인 넓은 평지에 위치하여 여느 시골 농촌 모습처럼 아늑하다.

 

발굴 작업이 한창인 고달사지에는 우선 멀리서 보아도 심상치 않는 느낌의 석물 두 점이 떡 버티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그중 하나는 고달사지 석불좌(高達寺址 石佛座, 보물 8호)였다.

지금껏 이렇게 규모가 큰 석불좌는 보지 못했다. 아쉽게도 좌대 위에 석불은 남아 있지 않다. 석굴암 좌대보다도 더 크다는 느낌이다. 석굴암의 본존불을 모셔도 왜소해 보일 것 같다.

 

석불좌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완벽하게 남아 있다. 여기에 앉아 있었던 부처를 상상해보자. 그 위용이 어떠했겠는가? 아마 보는 이를 완전히 압도했을 것이다.

 

 

고달사지 석불좌대

 

  

그 옆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元宗大師 慧進塔碑 龜趺 및 ?首, 보물 6호)가 한 번 더 나를 압도한다.

 

내가 보기에 경주에 있는 태종 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국보 25호)보다 더 크고 장엄하다. 섬세하고 세련된 면은 조금 부족한 듯하나 귀부(龜趺,거북형상을 한 조각돌을 비의 받침으로 삼음)와 이수(?首,이무기 형상을 한 조각돌을 비의 머리로 삼음)가 갖고 있는 상징성(거북은 지상과 하늘을 잇는 매개 역할과 장수를 상징하고, 이무기는 하늘을 나는 변화무쌍한 용을 상징함)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이런 투박함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고려 광종이 원종대사(869-958)를 국사로 봉하고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고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칭했다. 이 비는 975년인 광종 26년에 세워졌다.

광종이 누구인가! 고려 태조 왕건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노비안검법과 후주인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여 고려의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한 카리스마 하는 왕이다.

이 두 점의 보물만 보아도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힘보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초기의 국력이 오히려 더 강해 보이지  않는가!

 

지금까지는 고려시대의 작품은 화려한 통일신라의 작품에 비해서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고달사지의 유물들을 보니 결코 그렇지 않다고 느껴진다.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

 

발걸음을 원종대사의 부도인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進塔)으로 향한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조형물이고, 부도는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조형물이다. 따라서 탑은 주로 대웅전 앞에 있지만 부도는 절 뒤 한적한 곳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탑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지만 탑의 형식을 취한 부도일 뿐이다.

산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 탑 또한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지금껏 내가 본 부도 중에서 규모면으로는 최고다.

네 조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의 몸돌이 거대하다, 중대석에 있는 문양은 살아 있는 듯하다. 상대석도 단정하고 격조가 있어 보인다.

몸돌은 팔각으로 다듬어져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형식인 팔각원당이다.

지붕돌 역시 하나의 돌로 팔각으로 조각되어 내가 볼 때는 결점이 없다.

보륜과 보주도 손상 없이 잘 보존된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한 부도가 국보가 아니고 왜 보물인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아는 부도 중에서 국보 53호인 연곡사의 동부도와 국보 57호인 쌍봉사의 철감선사탑 보다는 정교함에서는 조금 떨어지지만 규모면에서는 월등하고, 균형미와 보존 상태에서는 밀리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국보 54호인 연곡사 북부도보다는 밀리는 게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 부도는 보물이다

 원종대사 혜진탑 

 

고달사에 있는 보물들은 모두 국보로 승격시켜 더욱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오늘의 주인공인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로 향한다.

원종대사 혜진탑에서 계단으로 50m쯤 올라서니 고달사지 부도가 보인다.

규모와 균형미에서 완벽하다.

풍수 상 이곳은 명당자리다. 사신사(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다 갖추어져 있다. 특히 부도가 있는 자리는 혈처다.

고려조의 건국 이념이 불교와 풍수를 같이 받아들였다는 것이 느껴진다

 

 고달사지 부도  부도를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탑돌이를 몇 차례 하고 있으니 고요하던 이곳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약 20여 명 답사객들이 밀어 닥쳤다.

그 중에 전문 가이드가 있어 설명을 한다.

그 요지를 옮겨 보면

 

전체 구조는 팔각 원당형이고, 원종대사혜진탑과 비슷하나, 지대석에서 완연한 차이가 있다. 원종대사부도는 4개의 돌로 정교하게 짜 맞춘데 비하여 고달사지부도는 팔각의 지대석을 놓고 기단부, 탑신, 지붕돌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원당으로 신라양식을 정직하게 이어받아 고려 초기의 빼어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옥개석 아래 부분에는 아름다운 비천상이 새겨져 있어 이 부분을 제일 많이 탁본과 사진을 찍어 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비천상

 

 역시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면 견문을 넓혀서 좋다.

다시 이들은 원종대사혜진탑으로 내려가기에 나도 따라가 보았다. 기단과 전체적인 균형미와 정교함에서 처음 볼 때는 그렇게도 완벽하게 보이던 것이 국보 4호 고달사지 부도를 보고 나니 뭔지 모를 2%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연곡사 북부도는 동부도에 비하면 3% 부족한데도 국보이다.

2% 부족한 원종대사혜진탑도 국보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한 2년 전쯤인가 국보 1호를 숭례문이 아닌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다음날 국보의 호수는 지정 당시에 국보의 가치에 따라 번호를 매긴 게 아니고 서울에서 시작해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1, 2, 3 이라는 숫자가 가치의 경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여행기 제목에 국보 4호를 강조한 것은 나도 모르는 무의식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서열화에 모든 가치를 둔 것이다,

이러한 서열화를 비판하고 반성하면서도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아직 답사하지 못한 강원도 영월에 있는 법흥사를 향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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