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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팔당댐과 모란반개형 한확선생 묘소

by 황교장 2007. 5. 1.
 팔당댐과 모란반개형 한확선생 묘소/2007.4.28.


아침 5시  알람이 울린다.

원래 계획은 이천도자기 마라톤의 워밍업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남한강변을 달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어제 밤 달빛에 취한 마음이

주(酒)님을 너무 열심히 모신 관계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뜨니 7시 서둘러 출발할 시간이다.

여주에서 국도를 타고 이천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부발읍에 있는 여주종합운동장이 행사장이다.

 

준비운동을 하는 동안 영 몸이 찌뿌등하다.

‘내 몸이 시키는 대로 달린다’가 나의 일관된 마라톤 철학이다.

 

하프마라톤을 신청했는데 10km만 하기로 결심하고 처음부터  10km대열에 줄을 섰다.

 

마라톤은 집단무의식이 작용한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달려 점점 기분이 고조되어 갔다.

  땀을 흘리고 나니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되돌아왔다.

 

기분 좋게 10km를 완주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서울 방향으로 국도를 타고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경안IC로 나와 팔당댐으로 진입했다.

 

팔당댐은 처음 가는 곳이라 무척 기대를 했는데 역시 경치가 일품이다.

댐 주변에는 아름다운 별장들이 많다.

우리나라 경제의 대부분이 수도권에 있으니 남쪽하고는 차이가 있다.

팔당댐을 건너 환상의 드라이브 길을 10여 분 달리니

 

한확(韓確,1403-1456)선생의 묘소가 나왔다.

 

                        한확선생 묘소

 

선생은 성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인수대비(소혜왕후)의 아버지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측에 가담한 공으로 좌의정에 오르고

 정난공신1등, 서성부원군에 봉해진 분이다.


1456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 찬탈이 정당한 절차를 밟은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는데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병을 얻어 53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일설에 의하면 현재의 묘역은 원래 왕릉 자리로 잡아놓았던 것인데 

 그의 묘 자리로 주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 일대의 지명이 능내리가 되었다.

 

이곳은 풍수 상 모란반개형의 전형이다.

 

즉 모란꽃이 반쯤 핀 듯한 형국으로

혈 주변에는 꽃봉오리처럼 생긴 작은 산이 여러 개 둘러싸여 있으며,

혈은 꽃의 중심에 있고 안산은 꽃잎에 해당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반쯤 벌어진 모란의 꽃잎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모란의 별명은 꽃의 여왕인 화왕(花王)이다.

모란은 풍성한 꽃잎과 화려한 빛깔로 인해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모란형 명당은 만개보다 반개를 한 수 위로 친다.

 

만개는 절정을 뜻해 점차 시들어 가지만

 반개는 절정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경주의 반월성이 반달형으로 축성한 의미도

반달이 점점 커져 보름달로 향하는 것은 나라의 국력이 계속 커 나가라는 염원에서이다.

 

청주 한씨가 조선조에서 정승 13명, 왕비 6명, 부마 4명, 공신 24명을 위시해 수많은 고관대작을 배출한 데는 일반적으로 이곳 풍수가 한몫했다고들 한다.

 

 한확선생 신도비: 명나라황제가 코끼리 등에 실어보낸 돌로 만들었다고 함

 

이와 관련하여 월간조선 2007년 5월호에 게재된 김용삼 기자의 조선왕조실록 탐험기 중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 여인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이 시절 중국으로 끌려간 여인들은 운이 좋게도 출세하여 중국 상류사회로 진출한 사례도 더러 있었다. 태종 17년 5월 9일 “중국에 보낼 처녀 두 명을 뽑았는데, 황씨와 한씨를 상등으로 삼았다” ....한씨는 한영정의 딸로서 품위 있고 아름다운 용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명나라로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여비(麗妃)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세종 6년 10월 17일에는 한씨가 대행황제(大行皇帝: 명나라 태종)가 죽었을 때 순장(旬葬)을 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황제가 죽자 궁인으로 순장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됐다.

한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낭아 나는 간다” 했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어 죽었다.


여러 궁인들이 마루에 올라갈 때 인종(仁宗)이 친히 들어와 고별하자 한씨가 울면서 인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어미가 노령이니 조선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했다>


한 여인의 드라마틱한 죽음에 이어 세종 9년 5월 1일 실록을 보니 한영정의 막내딸이 또다시 중국으로 끌려가는 사연이 등장했다. 한영정은 두 딸을 중국으로 떠나보낸 비운의 아버지였던 셈이다.


<처녀 한씨는 한영정의 막내딸이다. 맏딸은 명나라 태종황제의 궁에 뽑혀 들어갔다가 황제가 죽을 때 따라 죽었다. 이때 막내딸 얼굴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중국에서) 뽑아가게 되었다.


한씨가 병이 나서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자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극진한데 무엇을 위해 약을 쓰려고 하오” 하고 칼로 침구를 찢고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주었다. 침구는 시집갈 때를 위해 준비했던 것이다>


바로 이 막내딸이 중국으로 끌려가 또다시 중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으니 그 정황은 성종 10년 7월 4일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확(韓確)의 누이가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선종황제(宣帝: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고 성황황제(成帝:명나라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환관 정동(鄭同)과 결탁하여 자주 정동을 본국(조선)에 파견하여 옷과 노리개, 음식 등을 바치게 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혹독하게 거둬들여 큰 병폐가 됐다.

또 칙령으로 한씨의 일가친척을 해마다 성절사(중국 황제 생일에 파견하는 사신)로 입조하게 하므로 한치례와 한치인, 한치의(이들은 모두 한확의 아들임), 사촌인 한치형, 한충인, 조카인 한한, 한찬, 한건이 번갈아 중국 조정에 드나들었다. 한씨 일족은 앉아서 부귀를 얻고 해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묘소 앞 장명등: 장명등은 정1품 이상의 묘소에만 설치

 

과연 명당이란 무엇인가?

모란반개형 명당이 일족과 국가라는 의미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흘러간 세월 속에

한번 간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묘소앞 흰제비꽃은

 인생무상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팔당호를 따라서 다산생가로 향하였다.

 

 한확선생 묘소에 핀 흰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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