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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다산 생가를 찾아서

by 황교장 2007. 5. 6.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은 십 수 차례 답사를 했는데 정작 다산 생가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 근교라서 교통도 번잡하고 각박한 서울도심이 싫었던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숙제처럼 미루어 두었던 다산생가를

이번 답사여행의 초점으로 삼았다.

마현 고개를 넘으니 풍광 좋은 팔당호가 나타났다.

다산생가에 도착하니 다산 생가가 나를 반긴다.

 다산 생가

 

선생은 1762년 6월 6일(영조38년) 현재의 행적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 마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님이고, 모친은 해남 윤씨다.

다산의 친가는 나주 정씨로 문과 급제자가 64명이고,

9대에 걸쳐 옥당(玉堂,홍문관)이 나온 집안은 나주정씨 뿐이라고 한다.

정조대왕도 “옥당은 정가지세전물(丁家之世傳物)이로고”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외가를 보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공재 윤두서로

공재의 친손녀가 다산 선생의 생모다.

당대 최고의 두 집안의 결과물이 다산 선생이다.

형제는 남자가 5명 여자가 6명 즉 11남매 5형제다.

동복형제는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와 함께 3남 1녀다.

중요 연대별로 다산의 생애를 정리해 보면

1770년(영조 46년) 9세 생모 해남 윤씨가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76년(영조 52년) 15세 풍산 홍씨 홍화보의 딸과 결혼,

1777년(정조 1년) 16세 세계 최초로 자청(自請) 영세 교인인 이승훈을 따라 실학자 아가환을 만났고, 실학자 성호 이익의 문집을 읽으며 이익을 사숙(私淑,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 했다.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고 또한 이가환의 생질(甥姪, 누나의 아들)이다.

이익선생은 이가환의 증조부다.

1783년(정조 7년) 22세 성균관에 입학, 장남 학연이 태어남

1789년(정조 13년) 28세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회릉직장에 임명됨.

1792년(정조 16년) 31세 부친이 진주 목사로 있다가 별세.

상중에 정조의 명령으로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녹로 등을 고안해 이를 수원성 축조에 이용함

1794년(정조 18년) 33세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 홍문관 수찬 등에 차례로 제수됨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목도함

1801년(순조1년) 40세 2월 형 약종이 교회 관련 문서를 몰래 옮기려다 발각되어 동복 3형제가 체포됨

이 사건으로 정약종은 사형되고,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에,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포항시 장기면)으로 유배됨

10월에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됨

황사영은 조카사위다.

1808년(순조8년) 처사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다산초당이다.

1817(순조 17년) 56세 경세유표를 편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함

1818년(순조 18년) 57세 봄에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9월에 18년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옴

1819년(순조19년) 58세 이곳 마재에서 흠흠신서와 아언각비 완성

1822년(순조 22년) 61세 회갑을 맞아 자찬묘지명을 무덤 안에 넣을 것과 문집 안에 넣을 것 두 가지로 만듦

1836년(현종 2년) 75세의 일기로 이곳 생가에서 세상을 떠남


이상으로 다산선생의 생애 중 중요한 부분을 요약했다.

기념관에는 여유당 전서가 비치되어 있다.

여유당 전서는 다산의 거의 모든 저서를 망라하여 154권 76책(책은 낱권 자체를 말하고, 권은 책안에서 구분된 장을 말함) 으로 체재를 갖추고 있다.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도움을 준다.

자찬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육경사서(六經四書)

이지수기(以之修己)

일표이서(一表二書)

이지위천하국가(以之爲天下國家)

소이비본말야(所以備本末也)


즉 육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악기)과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로

자기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이로써 근본과 말단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는 경학(육경, 사서)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일표이서)을 말단으로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산의 대표적인 저서를 살펴보면

1, 목민심서(牧民心書)

고을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서로 지방 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것과 암행어사, 곡산부사 등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고된 삶을 목격했던 다산의 생생한 체험이 녹아들어 있다.

선생은 자찬묘지명에서 목민심서의 체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백성을 다스려 보기 위해 지은 책이다.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을 세 가지의 기(紀)로 삼았고,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을 여섯 가지의 전(典)으로 삼아 진황(賑荒)으로 끝맺었다.

각 조목마다 6조(條)로 구성하였다. 고금의 이론을 망라하고 간사하고 거짓된 상황을 드러내어 이를 목민관(牧民官)에게 줌으로써 거의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해택을 입게 했으면 한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이를 부연 설명하면

자기를 다스리기〔律己〕와 공무를 받들기〔奉公〕 백성을 사랑하기〔愛民〕를 기(紀, 밑바탕)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호, 예, 병, 형, 공을 전(典)으로 삼았다는 것은 백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목민심서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황(賑荒,어려울 때 도와주기)은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심서(心書)라는 이름은 자신이 수령이 되어 이상을 펼치고 싶으나 귀양살이 중이라서 마음으로나마 그렇게 하고 싶다 하여 심서라 이름 붙였다 한다.

목민심서는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도 책상머리에 늘 두었다고 전해진다.

 

2. 경세유표(經世遺表)

경세(經世)란 국가제도의 뼈대를 세워 운영함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는 뜻이며,

유표(遺表)는 신하가 죽으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이다.

즉 다산의 학문을 결집한 국가 개혁론이다.


3.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관의 주요업무 중 하나인 형정(刑政)을 다룬 책으로서 원래 제목은 ‘명청록’이었는데

후에 <우서>의 ‘흠재흠재’ 즉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에서 흠흠신서로 제목을 바꾸었다.


4. 논어 고금주(論語古今註)

논어만이 평생 읽을 만하다고 하여 항상 안두(案頭, 책상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 책이다.

이 책은 40권(13책)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영산대학교 김영호 교수의 논문 ‘丁茶山의 論語說’에서


“논어의 주석사상(註釋史上) 획기적이고 고금에 없는 독보적인 것이다.

주자가 인(仁)을 애지리 심지덕(愛之理 心之德)이라 하여 이학적(理學的)으로 해석하였으나, 다산은 유자왈장(有子曰章)에서 인(仁)은 일을 행하는 데서 이루어지지〔成於行事〕 결코 마음에 있는 이치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주자의 仁에 대한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조선조의 개국이념은 주자학에 있다.

조금이라도 주자의 사상적 이념에 어긋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극형을 당하는 시절에 옳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여유당이라는 호에도 불구하고 학자적인 소신을 지킨 저서이다.

이 밖에도 많은 저서들이 있지만 나의 능력과 용량을 초과하는 것들이어서 이 정도에서 마치겠다.

전시관을 나와 생가인 여유당으로 향했다.

여유당으로 당호를 지은 데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여유당 현판

“노자의 말에 여(與, 의심이 많은 동물)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유(猶, 두려움이 많은 동물) 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테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다산 산문선집/정약용 저, 박석무.정해렴 편역/현대실학사>


여유당이란 당호도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비로소 써서 붙여놓고 이름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이 보도록 했다고 한다.

여유당을 나와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묘소에서 내려다 본 다산생가

 

다산은 음택 풍수를 부정했다.

“죽은 사람의 뼈는 썩어서 아픔도 가려움도 모르고 오랜 세월 겪으면 흙이나 먼지로 변하거늘 어찌 생존한 사람과 서로 느낌을 통하여 화복을 전할 수 있겠는가?... 지사(地師 )의 아들이나 손자로서, 홍문관 교리나 평안도 관찰사가 된 사람은 몇 명이나 볼 수 있는가, 재상으로 풍수설에 빠져 부모의 무덤을 여러 번 옮긴 사람치고 자손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사서인(士庶人)으로 풍수술에 빠져 여러 번 부모의 묘를 옮긴 사람치고 괴이한 재앙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고 개탄하였고,

죽기 전 아들에게

”내가 죽으면 뒷동산에 묻고 지사 따위에게 좋은 터를 찾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이처럼 선생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선생의 묘소에서 바라본 팔당호와 주변의 정경은 절경 그 자체이다.

묘소에서 내려다보니 집터의 전체구조를 살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양택(陽宅, 집터) 풍수에서 명당의 기본 조건은 대체로 다음의 3가지다.

1, 배산임수(背山臨水): 뒤에는 산 앞에는 물이 있는 형국

2, 전저후고(前低後高) : 앞은 낮고 뒤는 높은 지형

3, 전착후관(前窄後寬) : 출입문은 좁고 뒤 뜰 안이 넉넉한 구조


다산생가는 이러한 조건에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강가 근처에 위치한 집터로서는 근본적으로 다소 낮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다가 한강이 일직선으로 뻗어 다산의 생가가 있는 곳을 긴 창으로 찌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흉한 것으로 수살(水殺)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금의 생가는 1925년 여름 홍수로 모두 무너지고 떠내려가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다산과 형제들이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통과 수난을 당한 것은 생가 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풍수가들이 있다.


선생의 묘도 주변은 낮은 지대임에도 묘지가 있는 곳은 높게 느껴지고 묘소 앞에서 생가 터를 내려다보면 만약 떨어진다면 중상 아니면 사망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급경사다.

이러한 곳을 산고곡심(山高谷深)이라고 하는데 혈의 결지가 불가능한 지형의 하나이다.

풍수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선생의 묘소는 경치는 빼어나나 뭔가 안정감이 부족하다.

 

다산묘소 앞에서 

묘소를 내려와 느티나무 그늘에 앉으니

다산과 한학선생의 생애가 뒤섞이며 떠오른다.

딸이 왕비이고, 외손자가 왕이며, 현세에서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간, 한확선생의 사주가 좋은가, 유배지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었지만 불멸의 거작을 남긴 다산선생의 사주가 더 좋은가?

모란반개형 명당으로 알려진 한확선생의 묘소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는데, 흉지로 보이는 다산선생의 묘소는 찾는 이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어느 곳이 더 명당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서거정이 동방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격찬한 수종사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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