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1
청량산을 나와 퇴계선생의 태실이 있는 온혜온천을 향했다. 수 년 전 온천에서 숙박할 예정으로 와서 보니 숙박할 만한 곳은 하나도 없고, 30년 전 시골 온천같은 간이 건물만 있었다. 온혜온천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인데 정작 온천물에 몸을 담그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겉보기와 달리 안은 제법 공간이 넓고 수질도 부드러워 아주 느낌이 좋았다. 다른 온천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점은 50대의 아들이 7, 80대의 아버지와 같이 목욕을 와 씻겨도 주고 공손하면서도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데 아주 정감이 있는 모습이었다. 목욕탕 안에 몇 명 되지 않은 사람들 속에 이런 부자지간을 셋이나 보았다. 아마 평소에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공휴일이라 아버지를 모시고 목욕하러 온 모양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들어갈 때는 예사롭게 봤는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들이 반수 이상이 머리에 비녀로 쪽진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옛 전통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퇴계 태실 노송정 종택
온천 맞은 편 동네가 퇴계선생의 태실이 있는 온혜마을이다. 퇴계태실은 일명 노송정 종택이라고 한다. 퇴계선생 할아버지가 지은 집이다. 퇴계선생의 할아버지가 이 집을 지을 때의 일화가 있다.
굶주림으로 길에서 쓰러져 있는 스님을 구해 주었는데, 그 스님이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하게 된다.”고 하면서 집터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퇴계태실은 몸체가 ㅁ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퇴계태실만이 돌출되어 있어 다른 종택의 태실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다. 금슬(琴瑟)이 좋은 부부는 부끄러울 수 있는 구조다. 안방은 숨어 있어야 되는데 ㅁ자형의 정중앙에 있다.
퇴계선생은 이 방에서 태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퇴계의 할아버지가 이 방을 만들어 자식부부를 합방시켰으며, 퇴계가 태어난 뒤에도 이 온돌방에서 몸조리를 하게 하였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이 방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셈이다.
퇴계선생 태실
퇴계선생의 생애를 간략히 알아보면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이 돌아가심
6살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처음 배움
12살 때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들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를 함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들과 함께 봉정사에서 학문을 닦음(봉정사 입구에 명옥대와 창량정사가 있음, 봉정사편 참조)
퇴계는 확실한 스승 없이 대부분 독학을 함
20세 때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周易)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병에 시달리게 됨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허씨 부인이 무남독녀라 1700석 정도의 재산을 받음. 이재산이 학문하는 데 밑거름이 됨)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에 입격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냄
45세 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한 때 파직 후 곧 복직됨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지음
풍기군수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최초의 사액(賜額)을 받게 함
선생의 사생활에서는 27세에 허씨 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 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48세에는 둘째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퇴계 선생의 둘째 며느리에 대해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은 늘 혼자 된 며느리가 안쓰러워 밤마다 후원의 며느리에게 가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 방에서 낮은 이야기 소리가 소근 소근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 찌개 좀 드셔 보셔요. 간이 짜지 않게 잘 되었는지요? 햇감자가 나오면 햇감자로도 요리해 드릴게요. 시장하시더라도 천천히 많이 드세요 서방님....."
혼자 된 며느리가 저녁상을 차려놓고 살아있는 남편을 마주하듯 함께 저녁을 들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선생은 며느리를 아무도 모르게 멀리 떠나가게 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결혼해 살라고....
몇 년 뒤 선생이 유람 삼아 정처 없이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산골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그 집 저녁 찬이 선생의 입맛에 꼭 맞는 것이다.
다음 날 그 집을 떠나는데 주인 남자가 헐레벌떡 따라오며 집사람이 전하랬다고 버선을 주었다. 순간 선생은 자기가 떠나보낸 며느리라 생각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사립문 뒤에 서서 눈물을 훔치며 선생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로가 멀리서 보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둘째 며느리다. 며느리는 시아버지 발 치수에 꼭 맞는 버선을 밤새워 짓고 시아버지 식성에 간을 하여 밥상을 차렸기에...
슬프고도 아름다운 인간적인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진실을 따지기 이전에 선생의 인간애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수리 중인 노송정
50세 때에는 넷째 형을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성리학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한다.
12월 4일 조카에게 유서를 쓰게 한다.
유서의 내용은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 비석은 세우지 말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길 것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함
마지막 유언으로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삶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순간도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도산서원 매화원의 매화나무( 이 나무에 물을 주라고 했을 것이다)
선생이 태어난 태실을 나와 안동 방향으로 십여 리쯤 가면 왼쪽 편에 도산서원 안내판이 나온다.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강을 따라 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산길을 내었다. 경치가 일품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의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사람이 살기 위한 터전을 잡을 때 가장 중요한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가 지리(地理) : 땅, 산, 강, 바다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치
둘째가 생리(生利) : 그 땅에서 생산되는 이익
셋째가 인심(人心) : 그곳에 사는 사람의 마음
넷째가 산수(山水) : 아름다운 산과 물
조선 팔도에서 이 네 가지가 가장 완벽한 곳으로 도산과 하회를 들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도산인 것이다.
택리지에서는 도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도산은 양쪽의 산이 합쳐져서 긴 골짜기가 되었는데 산이 별로 높지 않다. 황지물이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 어구에 이르러 큰 시냇물이 되었다. 양쪽 산발치는 모두 석벽이며 물가에 위치하여 경치가 훌륭하다. 물은 거룻배를 이용하기에 족하고 골 복판에는 고목이 매우 많아 조용하고 시원하다. 산 뒤와 시내 남쪽은 모두 좋은 밭과 평평한 밭골이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巖棲軒) 두 칸이 아직도 있고, 그 안에는 퇴계가 쓰던 벼룻집과 지팡이, 신과 함께 종이로 만든 선기옥형(璇璣玉衡, 천체를 관측하는 기계, 혼천의)을 간직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가 1750년에 완성되었으므로 퇴계 선생 사후 180년 후의 도산서원의 풍광을 짐작할 수 있다.
도산서원 가는 길(강이 끝나는 지점이 분강촌이 아닐까...)
서원 중에서 입장료를 받는 서원은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두 곳이다. 그러나 나는 입장료를 받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도산서원을 견학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입장료를 내고 매표소를 지나 도산서원까지 가는 경치 또한 일품이다. 경치 좋은 곳에서 잠시 멈추고 농암종택이 있었던 분강촌이 어디쯤일까 추측을 해 본다. 저 산 저 너머일까 70만 평의 너른 땅이 나오려면 저 산 저 모퉁이쯤이 아닐까 하고...
도산서원 앞 강 한가운데에 시사단(試士壇)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수몰되기 전에 10m의 석축을 쌓아서 그 위에 시사단을 이건했다. 정조대왕이 선생을 존경하고 추모하는 뜻에서 친히 제문을 지어 사당에 제사(祭祀)를 올리고 영남 일대의 선비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 시험을 보인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 단을 모아 시사단이라 하고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시사단
풍수 보기를 즐기는 내 눈에는 도산서원의 안산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시사단이 안산 역할을 하는 것 같이 보인다.
도산서원 앞 강쪽에는 오래된 왕버들이 있다. 수몰되기 전에는 시사단 일대가 송림이었다고 한다. 냇가의 하얀 백사장에 학들이 놀고 있는 광경을 보며 왕버들 숲길을 따라 서원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환상적인 풍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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