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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주실마을과 지훈문학관

by 황교장 2007. 7. 14.

 

주실마을과 지훈문학관


퇴계종택을 나와 봉화 방향으로 향하면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이 다시 나타난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산과 물과 바위와 백사장이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경치에 늘 감탄하게 된다. 청량산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직진을 하면 봉화방향이고, 아름답고 운치 있는 다리를 건너면 조지훈시인의 생가가 있는 영양으로 가는 길이다.

시골길은 대개 다 한적하지만 이 길은 갈 때마다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다. 30여분을 달리면 주실마을이 나오는데 그 동안 마주친 차는 단 1대뿐이었다. 얼마나 호젓하고 한적한 길인가. 밭에 심어놓은 작물은 거의 다 고추다. 영양은 역시 고추의 고장인가 보다.

주실마을은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 참 좋은 마을이다.’ 고 느낄 정도로 보는 사람에게 평안하고 아늑함을 준다. 양택풍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배산임수와 전저후고의 형태를 띠어 아늑함을 주는것이다. 주실의 풍수에 대한 조용헌 교수의 말을 빌려 보면


일원산에서 14km나 달려온 용맥은 주실에 와서 세 봉우리로 맺혔다. 그리고이 세 개의 봉우리에서 각각 인물이 나왔다. 주실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왼쪽에 있는 제1봉에는 노계 조후용(1833-1906) 고택과 만곡정사가 자리잡고 있다. 노계고택은 주실의 개화와 구국운동에 앞장선 두석·붕석(독립유공자 건국훈장)·용해 등이 태어났고 운해와 서울대 조동일 교수의 생가이기도 하다. ...

제2봉에는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그리고 조동걸, 조동원교수의 생가가 있으며, 제3봉에는 개화기 이후로 신교육의 전당인 월록서당이 자리잡고 있다.-조용헌의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호은종택 앞에서


주실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6-1632)으로 조광조선생과는 9촌이다. 조광조가 화를 당하자 이를 피해 이곳으로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호은종택은 조전의 아들 조정형이 1629년에 지은 집으로 조지훈 시인이 바로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솟을대문과 맞배지붕의 口자형으로 영남 북부지방 양반가의 전통적인 한옥 형태다. 건물은 정침(正寢)과 관리사(管理舍)로 나눠져 있다.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丁字)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 칸에는 조지훈시인의 태실이 있다. 한국 전쟁 때 일부가 불탔으나 1963년 원형대로 복구하였다.

이 집의 내력을 알아보자.

조지훈시인의 부친이 조헌영이고, 조헌영의 부친은 조인석이다. 조인석의 부친은 구한말 의병장 조승기다. 조승기(趙承基, 1836-1913))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대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단식으로 굶어죽었다고 한다. 건국 후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았다.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趙寅錫 1879-1950)은 6.25. 당시 인민군에 항거하다가 장렬히 자결했다.

부친인 조헌영(趙憲泳, 1899-1988)은 초대 2대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납북되어 북에서 1988년 5월에 작고했다고 한다. 한민당 정치부장을 지냈고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입안자이며 한의학 학자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이러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다.

호은종택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다. 바로 삼불차(三不借)다. 삼불차란 세 가지는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셋째는 문불차(文不借)이다.

재불차란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호은종택 앞에는 논이 만 평이 있는데 370년 동안 그대로 종손들에게 전해져 왔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불차는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집안은 대가 끊기면 양자를 데려다가 종손으로 삼는데 이 집은 16대 동안 한 번도 양자를 들인 적이 없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생명력이다. 아마 이 집의 집터와 무관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마을 앞 문필봉

 

문불차는 문장을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풍수가들이 주실마을에 오면 제일 많이 거론하는 것이 문필봉이다. 호은종택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앞에 산이 있다. 풍수에서 앞에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한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의 봉우리가 글을 쓸 때 붓끝을 닮았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 한다. 즉 정삼각형의 산이다. 삼각형의 산은 오행 중 목형의 산이다. 목은 성장 발달을 뜻하므로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문필봉이 좋은 마을에는 반드시 훌륭한 학자가 있다고 한다. 주실마을만큼 문필봉이 가지런히 여럿이 있는 마을은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내가 지금껏 보아온 문필봉 중에서는 으뜸이다.


주실마을은 우리나라 단위마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다. 약 60여 가구, 200명 내외의 마을에서 대학교수 14명, 교장이 19명에 이르고 예비박사학위자 등을 합치면 거의 한 집에 1명꼴로 박사인 셈이라고 한다.

교수도 엉터리 교수가 아닌 조지훈을 필두로 ‘한국의 인문학 3걸’로 꼽히는 조동걸(국민대, 역사), 조동원(성균관대, 금석학), 조동일(전 서을대, 국문학) 등이 모두 주실 출신이다.

또한 의학계에도 전 삼성병원장인 조운해 원장이 이곳 출신이다. 조원장은 동양인 최초로 세계의사협회 이사로 선임된 분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회장의 맏사위이기도 하다. 자녀들이 한솔그룹을 맡고 있다. 또한 한의학계에서는 조지훈시인의 부친이신 조헌영이 있다.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유학 시절 결핵에 걸린 애인을 치료하기 위해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의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가 저술한 한의학서는 한의대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제헌의원으로서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동방의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최효찬 오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참조-


 주실마을에는 우물이 하나밖에 없다. 6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 우물이 하나뿐이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이유는 풍수다. 주실마을은 배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배가 침몰되어 마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50리 떨어진 곳에서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한다.

유일한 우물이 있는 곳은 옥천종택이다. 옥천종택은 호은공의 증손자로 옥천 조덕린(1658-1737)의 집이다. 옥천공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승정원 우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이 집 담장 밖에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수도관만 있고 샘은 막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옥천 종택 우물

 

이처럼 일반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는 풍수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개화된 지성인들의 동네에서 아직도 지키고 있는 것은 조상을 기리는 정신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주실마을 출신 중에는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공무원으로 부정한 일을 하여 입에 올린 사람도 없다고 한다. 선조로부터 내려온 정신문화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월록서당 현판(채제공 글씨)

 

이 마을에서 또 하나 볼거리는 월록서당(月麓書堂)이다. 1765년에 건립되었다. 현판 글씨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썼다. 이곳이 주실마을의 인재양성소이다. 구한말 이후에는 신교육의 전당으로 변신하여 신교육을 가장 먼저 실시한 곳이라고 한다.

 

 월록서당

 

근대사로 들어와 주실마을이 가장 자랑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조지훈 시인이다.

영양군에서 지훈문학관을 2007년 5월 18일 건립하였다. 나는 몇 년 전 만 해도 우리나라는 군단위 지방자치제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초의원들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문화 사업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직까지 부정적인 면이 남아 있지만 이러한 지역문화사업이 가능한 것은 점차 기초의원들의 자질도 높아지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것 같아 한편 뿌듯한 마음도 든다.

영양군에서 지훈문학관을 건립하면서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지훈문학관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현판을 쓴 문학관을 들어서면 170여 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ㅁ'자 모양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동선을 따라 조지훈 선생의 삶과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동선을 따라가 보면 지훈의 소년시절 자료들, 광복과 청록집 관련 자료들, 격정의 현대사 속에 남긴 여운, 지훈의 가족 이야기,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작품, 지사로서의 지훈 선생의 삶, 지훈의 시와 산문, 학문 연구의 핵심 내용, 조지훈 선생의 선비로서의 삶의 모습 등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전시물 중에는 지훈 선생이 쓴 주례사와 여러 곳에서 받은 감사장, 위촉장 표창장 등의 자료를 비롯하여 평소 썼던 문갑과 서랍도 있다. 그리고 30대 중반에 썼다는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다는 부채, 그리고 세상을 뜨기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와 안경 등을 비롯하여 외출할 때 즐겨 입었던 외투와 삼베 바지 등도 전시가 되어 있다.


또, 문학관을 돌아 나오기 전 한쪽 벽면에는 그의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1백 개의 사진들이 걸려 있으며, 그 맞은편 헤드폰을 통해서는 투병 중인 그가 여동생(조동민)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를 들을 수 있다.

《청록집》《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낙화〉〈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조지훈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만큼 확고부동하다. 매천 황현과 만해 한용운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례한 것이 열일곱(1937년)이었으니 조지훈이 뜻을 확립한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지훈 문학관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유명한 시 승무를 19살 때 지었다는 사실이다. 천재는 타고 나는 것인가. 그러나 이 천재도 글이 잘 안 나와 얼마나 담배를 많이 피웠으면 폐가 나빠 49살의 한창 나이에 갔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조지훈 시인의 형인 조동진도 조지훈 시인보다도 더 천재였다고 하는데 21세 때 이를 뽑은 날 술을 먹어 요절했다고 한다.

이 천재는 19살에 대표작인 승무를 썼지만, 퇴계선생은 53살에 첫 작품을 시작하여 죽기 1년 전인 69살에 자신의 최대의 걸작인 성학십도를 저술했다. 일반적으로 천재들은 젊을 때 에너지를 한꺼번에 소진하여 자신의 저작물을 남기고, 대기만성형은 서서히 점차적, 단계적으로 에너지는 키우면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해 간다. 내가 퇴계선생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육도 천재만을 강조하지 말고 대기만성형의 인물을 믿고 기다려 주는 인내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승무를 떠올리고 지훈의 지조를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영남 최고의 정자로 평가받는 서석지로 옮겼다.


 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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