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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모두가 함께 한 문화체험연수 1

by 황교장 2007. 7. 22.

 

모두가 함께 한 문화체험연수 1


7월 16일 방학식을 마치고 드디어 대망의 직원연수가 시작되었다.

10시 50분에 학교에서 출발을 했다. 가능한 많은 것을 보여 줄 욕심으로 서두른다고 서두른 것이 이 시간이다. 점심은 김밥으로 미리 준비하여 차 안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만큼 시간을 절약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식사 후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에 이어 예·체부장의 사회로 버스 안에서의 연수가 진행되었다. 제법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중에 대구를 지나면 첫 휴게소인 동명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재송중학교 팀을 만났다.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강원도까지 간다고 한다. 방학하는 날 직원연수를 떠나면 휴게소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주로 많이 만나는 곳이 남해안고속도로의 휴게소인데, 내륙지방으로 가는 연수팀은 많지가 않는데 반가웠다.


그들과 헤어져 우리는 서안동 IC로 빠져 나왔다. 봉정사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학봉종택이 나온다. 며칠 전에 미리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땅- 검제 학봉 종택”을 복사하여 우편으로 종택에 보냈었다. 종택에 도착하니 이 집의 관리인 김용수님과 91세의 연세에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종손님이 내 글을 읽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글의 위력이 실감났다.

 학봉종택 마당에서

 

학봉종택 종손 김시인옹 


종택의 유물전시관인 운장각은 비가 오는 날에는 습기 때문에 문을 열지 않는데 특별히 우리 일행들을 위해서 보여 준다고 한다.

김용수님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면서 운장각의 유물을 관람했다. 그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학봉선생이 쓴 안경, 퇴계선생으로부터 받은 병명 등 많은 유물을 보았다.

운장각 안에서

 

학봉선생의 안경과 유물들

 

퇴계선생으로부터 받은 병명

 

이 중 가장 가슴에 남는 글은 학봉선생이 전쟁 중에 부인에게 쓴 한글 편지였다.  김용수님이 풀이를 하는데 그 내용이  눈물겨웠다. 설날을 맞이하여 보내는 내용이었다. “감사(監司)라 하여도 음식을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하오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계시오.” 라면서 제사에 쓰라고 보내는 물목이 석이버섯 2근, 석류 20알, 조기 2마리가 전부다. 이 글을 보내고 나서 4개월 후에 학봉선생은 진중에서 병사했다. 이 편지가 생전의 마지막 편지이자 글인 것이다.

 

광풍재월(미수 허목의 전서)

 

운장각을 나와 종택을 두루두루 구경하였다. 다들 ‘이런 집에 한번 살아보았으면’ 하는 표정들이다. 정원에는 잔디와 정원수가 아주 잘 가꾸어져 있었다. 종택 안집에 걸려 있는 미수 허목선생의 전서체 ‘광풍재월(光風齋月)’ 현판글씨가 돋보인다. 김용수님이 내 글에서 사실과 다른 점은 학봉선생의 부인은 안동 김씨가 아니고 안동 권씨고, 의성 김씨 내앞 문중에서 독립유공자는 총 32명이며 학봉직계는 15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종택 정원에 핀 능소화

 

잘 꾸며진 종택 정원

 

돌확에 핀 수련

 

학봉종택을 나와 10여 분 가면 천등산 봉정사가 나온다. 봉정사 입구에 있는 청암정사와 명옥대를 감상하고 올라가니 문화유산 해설사가 친절하게 해설을 해 주었다. 내가 궁금했던 고금당과 우화루의 현판글씨가 누구 글씨인지를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선생님들의 밝은 표정과 알려고 하는 진지한 자세가 느껴졌다.

 

봉정사 일주문

 

봉정사 대웅전 툇마루(국내 유일)

 

봉정사 영산전 우화루

우화루 현판 

 

 봉정사를 나와 다시 안동 방향으로 가면 제비원석불을 만난다. 제비원 석불은 주차장 가에 주차하여 보는 것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시간 관계 상 차에서 내리지 않고 석불을 감상했다.

 

제비원 석불

 

안동 시내에 진입해 안동댐 입구 길 가운데에 있는 회화나무가 임청각 대문 바로 옆에 있던 나무라고 설명을 했다.

 

임청각 앞 회화나무

 

신세동칠층전탑을 보고는 모두들 탑의 규모에 놀란다. 미리 사전답사기를 읽은 관계로 설명하기가 편하다. 임청각은 아직도 한창 수리 중이었다. 7월 5일 완공이라고표지판에 적혀 있는데, 7월 16일인데도 언제 공사가 끝이 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관급공사는 제 시간 안에 끝이 나는 게 거의 없다.

 

석주 이상룡선생 친필 현판(거국음)

 

고경명 선생 친필(제임청각)

 

퇴계선생 친필 임청각 현판

 

군자정은 다행히도 문이 열려 있어 퇴계선생의 친필인 임청각과 고경명선생과 이상룡선생의 친필 현판을 볼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 우물방은 공사 중이라도 우물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임청각 영천

 

김모 선생님이 우물의 영기(靈氣)를 받아 정승 같은 아들을 놓으려고 우물에 손을 담근다. 그 장면을 본 다른 선생님들은 소원이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임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그러나 거의 퇴락해 가고 있다. 이상룡 선생이 만주로 떠나면서 위패를 땅에다 묻었기에 찾지 못하고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사당에서 보면 앞에 있는 낙동강과 중앙선 철길이 모두 뚜렷이 보인다. 일제가 얼마나 잔인하게 철길을 놓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우리 모두 비분을 느끼면서 임청각을 나왔다. 신세동칠층전탑의 갑갑하고 갈라진 틈을 보면서 한 번 더 비분을 느낀다. 이 느낌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신세동칠층전탑 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갈라진 틈


임청각을 나오니 4시 40분이다. 농암종택까지는 약 50여 분이 소요되기에 다른 목적지에는 시간 상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할 때 무리를 해서 강행군하면 탈이 난다는 게 지금까지 나의 경험이다. 숙소에 해가 지기 최소한 2시간 전에 도착해야만 여행의 맛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사회를 보았던 예·체부장에게 50분이나 남아 사회를 부탁했지만, 임창각과 신세동칠층전탑의 기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여흥을 돋울 수가 없었다. 모두들 침묵으로 농암종택을 향했다. 농암종택 가는 길은 대형차가 들어가기에는 좁다. 일류 기사가 아니면 힘이 드는 난코스다. 우리 기사는 관광버스만 30년 이상 운전한 베테랑 기사라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km 남짓한 길인데도 힘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가는 우리들에게 경치는 황홀했다. 모두들 넋을 빼고 감탄했다.

농암종택에 도착하니 임청각에서의 기분은 싹 가셨다. 그저 얼굴에 방실방실 미소가 번졌다. 모두들 종택을 보고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하는 표정이다.

 

 

 

농암종택 긍구당

 

숙소는 분강서원이다. 서원을 통째 빌렸다. 단체여행의 경우 다른 팀이 같은 숙소에 있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는 것을 지난 겨울방학 때 경험했다. 고요한 산사 체험을 시켜 줄 욕심으로 해남 대흥사 입구에 있는 서편제의 촬영장소인 유선장 여관에서 숙박을 했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했더니 주인에게 너무 소란을 핀다고 항의를 받아 혼이 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서원을 통째로 빌린 것이다. 분강서원의 깨끗한 방과 이부자리를 보고 모두들 흡족해 했다.

 

분강서원(가운데 설명하시는 이가 종손 이성원님)

 

농암선생의 18대 종손이신 이성원님의 설명을 들은 후 곧장 저녁 식사를 하였다. 저녁식사는 한식 뷔페였다. 간이 대체로 짰다. 안동은 내륙지방이라 기본적으로 음식이 짜다. 만약에 다른 곳에서 이렇게 짠 음식이 나왔으면 많은 욕을 먹었을 것인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짠 것이 안동의 양반 음식 체험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역시 그 지역의 문화나 풍토를 이해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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