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송여중 부장워크숍1
-서출지-
3월이면 2013학년도 신학기가 시작된다. 신학기가 되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행정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새로운 행정조직의 핵심인 부장교사를 선임하여 경주로 교육계획 수립을 위한 워크숍을 위해 떠났다. 워크숍은 원래는 ‘일터’나 ‘작업장’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협의회’나 ‘공개교육’, ‘상호교육’을 뜻하는 교육용어로 사용된다. 구성원의 집단사고를 통하여 발전을 꾀하고 현안을 해결하려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정된 이론이나 방법론을 가진, 틀에 박힌 수업의 장(場)이 아니고, 참가자 전원이 새로운 이념과 기술을 함께 모색하면서 훈련을 쌓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질적인 구성원들을 능률적인 교육공동체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인간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 말로는 ‘백 번의 문자메시지보다는 한 번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는 데에는 1박을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된다. ‘1박 2일’이라는 유명한 프로그램처럼 1박을 하면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와 문화유산답사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마침 교감선생님이 경주의 호텔 할인권을 갖고 있어 더욱더 안성맞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주에 자주 가지만 대부분은 보문단지 근처에서 놀다가는 떠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경주 동남산에 자리한 서출지-보리사-부처바위-감실할매부처-경주 최부잣집-경주향교-계림-요석궁식사-숙소로 일정을 정하였다.
12시경 학교를 출발하여 철마 정원식당에서 한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 집은 학생교육원 철마분원장으로 5년간 근무하면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집이다. 내 입맛에는 딱 맞는 집이다. 학교에서 출발하여 경주로 가는 길목이라 이참에 우리 부장선생님들께도 한번 맛보게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입맛이란 다양하여 맛이 좋다는 사람과 보통이라는 사람과 나누어졌다.
철마를 나와 언양휴게소에서 커피를 한 잔을 하고는 서출지로 향하였다. 서출지는 보통 불국사 쪽으로 가다가 통일전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면 운치가 없다. 경주IC를 나와 첫 좌회전을 하여 오릉 앞을 지나 다시 좌회전을 하면 남천이 나온다. 남천을 따라 박물관 쪽으로 가는 길은 남천과 주변 기와집이 잘 어울려 운치를 더해 준다. 새로 복원하고 있는 월정교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반월성 앞에서 남천을 따라 사잇길을 가다보면 서출지가 나온다. 이 길은 평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주다운 길이다.
남천을 따라 통일전 앞에 도착을 했다. 서출지는 통일전 왼편에 있다. 겨울이라 서출지다운 맛이 조금은 부족하다. 서출지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고, 둑에는 수백 년 된 배롱나무들과 소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등이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 일행은 서출지를 한 바퀴 여유롭게 걸었다. 날씨가 춥지 않아 산책하기에 적당하다. 시원한 바람 속에 봄의 향기를 느껴졌다.
서출지에 들어서면 이요당(二樂堂)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1664년 임적(任勣)이 서출지 연못가에 석축을 쌓고 이요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요당은 ‘이락당’이나 ‘이악당’으로 읽지 않고 ‘즐길 요’로 읽어야 한다. 서출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요당이 없다며 서출지의 멋이 덜해질 것이다.
서출지는 한여름이 가장 아름답다. 한여름이면 연못에는 홍련이 절정을 이루고 연못가에는 배롱나무 꽃이 만발할 때가 서출지의 아름다움이 최고조에 달한다. 이요당을 지나면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라고 쓰여진 현판이 나온다. 우리 선생님들에게 이 글자를 번역해보게 했다. 그러자 너무 쉽다고 하면서 ‘열어서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명이 죽는다’라고 직역을 한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소지왕 10년(488)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할 때였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찿아가시오”라고 말했다. 왕은 신하에게 까마귀의 뒤를 쫓게 하였는데 신하는 남쪽 못가에 이르러 돼지 싸움을 구경하느라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신하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서 신하에게 편지를 한 통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편지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신하는 기이하게 여기며 이를 왕에게 알렸다. 편지를 받아든 왕에게 한 신하가 “두 사람은 백성이고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왕은 이를 옳다고 여기고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에는 “거문고 갑을 쏘라(射琴匣)”는 말만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러자 그곳에서 내전의 불공을 맡고 있는 중이 궁주와 몰래 흉계를 꾸미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때부터 못에서 글이 나와 간계를 막았다는 뜻에서 못의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고 하였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 즉 까마귀를 기억하는 날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상이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내용이 다르게 전개되어 있다. 중은 묘심이고 궁녀는 소지왕의 왕비인 선혜부인이라고 한다.
여기서 소지왕과 지증왕 그리고 법흥왕의 관계를 한번 집고 넘어가자.
소지왕은 지증왕의 6촌형이다. 지증왕은 법흥왕의 아버지이다. 법흥왕은 소지왕의 마복자(摩復子)이다. 마복자란 글자 그대로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다. 마복자 제도는 세계 역사상 신라에서만 있는 풍습으로, 임신한 부하의 아내를 자기 처소로 불러 들여 살게 하면서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하여 태어날 아이와 끈끈한 인연을 맺는 제도이다. 특히 법흥왕과 화랑도의 초대 풍월주인 김위화랑이 소지왕의 마복자(摩復子)라고 알려져 있다.
신라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왕이 지증왕이라고 할 수 있다. 천마총으로 알려진 무덤이 지증왕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도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증왕(437- 514)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지증왕은 몸이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전왕이 후사가 없이 죽어 왕이 되었는데 나이가 64세였다고 한다. 502년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하던 것을 금지했다. 또 각주의 군주에게 명해 농사를 장려하고 처음으로 우경법(牛耕法)을 이용하게 하는 등 농업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했다. 503년 개국 이래 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던 국호를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며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網羅四方)'는 뜻의 '신라(新羅)'로 확정했다. 또한 방언인 '마립간'의 칭호를 중국식 '왕'으로 고치는 등 국가의 체제를 일신했다. 512년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이 신라에 귀속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왕이 죽은 후 시호를 '지증'이라고 했는데, 신라의 시호제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 했다. 시호는 지증이라 했는데, 시호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이라 부른 것도 이 왕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 2년 경진에 즉위했다. 왕의 음경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알맞은 짝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삼도에 보내 구했다.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 아래 이르렀을 때 개 두 마리가 북만큼 커다란 똥덩어리 하나를 놓고서 양쪽 끝을 다투어 물어뜯고 있었다. 동네 사람에게 물었더니 한 소녀가 알려 주었다. “이것은 우리 모량부 상공의 딸이 여기서 빨래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누고 간 것입니다.” 그의 집을 찾아서 살펴보았더니 키가 일곱 자 다섯 치나 되었다. 이런 사실을 자세히 아뢰었더니 왕이 수레를 보내 맞이했다. 궁중으로 들게 하고 책봉하여 황후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지증왕의 성기의 크기다. 삼국유사에는 성기의 크기를 나타낸 두 분의 왕이 있다. 지증왕과 경덕왕이다. 지증왕은 한 자 다섯 치이고 경덕왕은 여덟 치이다. 여기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시대에 따라 도량형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증왕 시대는 한나라에서 사용하는 한척이 기준이 되지만 경덕왕 시대는 당나라에서 사용하는 당대척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척은 1척이 23cm, 당대척은 29.7cm, 구한말 일제의 곡척은 30.303cm이다. 많은 책에서는 일제의 곡척을 사용하여 지증왕의 음경의 길이를 약 45cm로 나타낸 곳이 많다. 어느 척을 사용하든지 음경의 크기가 정상이 아닌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음경의 크기에 대한 뉴욕주립대학교의 고든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DNA를 퍼뜨리는 원초적 본능이 있다고 한다. 특히 남성의 성기가 버섯처럼 생긴 이유는 다른 남성이 사정한 정자를 긁어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따라서 굵은 성기일수록 그 효과가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궁합 이론에서는 자기한테 가장 적합한 궁합이 있는 것이 정답일 게다.
여기서 법흥왕에 대하여 알아보자. 법흥왕은 지증왕(남근이 1자 5치)과 연제부인(키가 7척 5치)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런데 연제부인이 법흥왕을 임신한 후에는 법흥왕이 태어날 때까지 지증왕의 6촌 형님인 소지왕과 살을 맞대고 정을 통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소지왕의 왕비인 선혜왕비는 딸을 둘 낳았는데 첫째는 보도이고, 둘째는 오도이다. 보도는 소지왕 사이에서 난 딸이며, 오도는 소지왕 몰래 중 묘심과의 사이에 사통하여 낳은 딸이다.
또한 소지왕의 또 다른 왕비인 벽화부인은 위화랑의 누나이자 신라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이 났다. 소지왕이 죽자 지증왕의 태자인 원종(법흥왕)을 섬겼다. 당시 원종에게는 태자비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소지왕과 선혜부인 사이에 난 보도이다. 그런데 원종은 보도에게 관심이 없었다. 원종이 좋아하던 여자는 보도의 씨 다른 동생인 오도였다. 오도는 중 묘심과 선혜왕비 사이에 난 사생아이다. 그러나 오도는 벽화부인의 남동생인 위화랑을 좋아하여 서로 사통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법흥왕은 화가 나서 오도를 아시공에게 줘 버렸다. 그런데 벽화부인 또한 법흥왕 외에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법흥왕이 총애하는 비량이다. 비량과 벽화부인은 너무 사랑하여 비량이 궁궐에 오기만 하면 늘 벽화부인의 뒷간으로 가서 정사를 나누곤 했다. 법흥왕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비랑을 너무 아낀 나머지 벽화더러 비량에게 시집가도록 했다. 따라서 벽화는 처음에 소지왕의 후비가 되었다가, 다시 법흥왕의 후궁으로, 다시 비랑의 부인이 되었다. 비랑과 벽화 사이에 난 아들이 구리지다. 구리지의 아들이 화랑의 제5세 풍월주인 사다함이다. 오도는 화랑의 시조가 되는 위화랑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 법흥왕의 애첩인 옥진궁주이다. 옥진궁주와 법흥왕 사이에 난 아들이 왕자인 비대이다. 이 비대가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신라 왕실은 큰 논란을 벌이게 된다. 또한 법흥왕과 벽화부인사이에 낳은 딸이 삼엽궁주다. 이 삼엽궁주가 바로 미실의 어머니다. 따라서 미실은 법흥왕의 외손녀다.
이처럼 신라 왕실의 남녀 관계는 정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다. 이는 순수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신라 왕실의 여인들은 여러 남자를 거치며 결혼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신라사회에선 여자가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버지가 정확하게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신라 사회에서는 모계를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 현대사회도 미래 사회학자들 중 일부는 모계사회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다음여정인 보리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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