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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서원기행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논산 돈암서원

by 황교장 2021. 6. 30.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논산 돈암서원

 

2019710일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 동안 많은 서원들을 답사했다고 생각했는데 문화유산에 등재된 9곳의 서원 중 가보지 못한 서원이 두 곳이나 있었다. 돈암서원과 무성서원이다. 어떤 서원인지 궁금하여 얼른 가보고 싶었지만 답사계획을 세우고 나면 다른 일이 생겨 미루어지다가 이제야 가게 되었다.

돈암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서원으로 인조 12(1634)에 김장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遯巖)’이라는 현판을 내려 주어 사액 서원이 되었다. 이후에 김집송준길송시열을 추가로 모셨다. 서원이 처음 세워진 숲말 산기슭에 있던 '돈암'이라는 큰 바위의 이름을 따서 사액을 받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주역의 의미와 주자의 만년에 사용하던 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은 주역 33괘로 천산돈(天山遯)이다. 상괘인 건()이 하늘이고, 하괘인 간()이 산이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에 다다를 수 없고 산이 높으면 하늘이 물러나기 때문에 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괘의 괘사는 은둔생활을 해야 형통한다. 소인은 마음을 곧게 가져야 이롭다(遯亨小利貞)’는 뜻이다. 즉 물러나야 할 때에는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서원의 이름과 김장생의 생애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서원 입구부터 아늑함을 느끼게 해 준다. 평지에다가 주변의 산들이 아주 야트막하여 평화롭다. 주차장이 잘 완비되어 있다. 한참을 걸어가야만 서원이 나온다. 지금까지 가 본 서원들과는 규모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가장 크고 넓다. 뒷산이 비산비야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아주 아늑한 곳에 서원이 있다. 숲말에 있던 것을 홍수 때 물이 차므로 고종 17(1880)에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은 서원 담장 바깥마당에 있는 산앙루(山仰樓). 산앙루는 유생들이 휴식하고 교류하는 공간이다. 병산서원 만대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번 올라가려고 하니 입구를 막아놓았다.

 

 

담장으로 둘러진 서원에 들어가려면 출입문인 입덕문을 지나야 한다. 입덕문 왼편에는 보물로 지정된 응도당이 있다. 돈암서원의 배치는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두고, 후면에 묘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식 배치이다. 전면에서부터 산앙루,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가 중심 축 선상에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좌우로 응도당, 동서재, 장판각, 경회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비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크게 묘당(廟堂), 강학(講學), 유식(遊息), 수직(守直)4개 구역으로 구분된다.

 

 

가장 중요한 묘당 구역은 제일 안쪽이자 서원 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주위 담장에는 궁궐의 담장이나 사대부의 집에서 사용하는 화강암으로 된 사괴석 담으로 둘러져있다. 이 내삼문 담장이 꽃담이다.

 

 

담장벽에는 12개의 전서체의 글이 새겨져 있다. "지부해함 [地負海涵], 박문약례 [博文約禮], 서일화풍 [瑞日和風]"이라고 한다.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해라.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처럼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하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의 뜻이라고 한다.

 

 

강학 구역에는 강당인 양성당(養性堂)과 그 앞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해 두었다. 윈래 돈암서원의 옛터에는 응도당이 강당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양성당이 먼저 강당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앙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으로 배열된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당의 서편으로는 판각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이 강학하시던 공간인 정회당(靜會堂)이 위치하고 있다.

 

 

돈암서원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품격이 있는 건물은 응도당(凝道堂)이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건물이다. 이때의 엉기다, 모으다, 집중하다의 뜻으로 해석된다. 즉 도에 집중하여 공부하는 곳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1880(고종 17)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겨서 지었다.

 

 

응도당은 정면 5, 측면 3칸의 누마루식 건물로 겹치마에 맞배지붕의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다. 박공널 밑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하고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퇴칸처럼 달았다. 응도당은 기와에 씌여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인조 1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 강당 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고대 예서(禮書)에서 말하는 경·대부·(卿大夫士)의 가옥인 하옥(廈屋)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김장생은 생전에 가례집람을 저술하면서 고대 중국의 예서에서 전하는 이상적인 전각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바 있는데 사후에 송준길, 송시열 등 그의 제자들이 응도당을 건립하면서 하옥제도에 입각한 평면과 구조를 채택하였다.

 

 

그 특징은 평면구성에서 중당과 동서상(東西廂), 중당 뒤에 실()과 좌우 방()과 동서 협실(夾室)을 두는 것이며 지붕은 맛배지붕 형태에 양 측면에 덧지붕의 일종인 ()’을 두는 것이다. 현재 응도당은 내부 바닥 일부 및 창호가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평면구성이나 영 등이 잘 남아 있다고 한다. 응도당은 비록 당초 위치에서 이전되기는 하였지만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이 이상적인 고대 예제를 따라 건물을 조성하려고 했던 노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며 현존하는 건물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잘 남아있다는 점에서 보물 지정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눈에 뛰는 것은 강당 바로 앞에 대리석으로 된 돈암서원 원정비가 서원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비석은 서원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고,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의 비석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석의 내용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현종 10(1669)에 세웠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이 비문에는 문묘배향공신 네 분이 직접 관련된 셈이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이 주인공들이다. 이 네 분이 다 문묘배향공신이다.

 

 

문묘배향공신이란 문묘(성균관)에 모셔진 공자를 모시는 유학의 공신이라는 뜻이다. 성균관의 대성전과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4성현, 10, 송조 6, 동국18현을 모셨다.

4성현은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말한다. 공문 10철은 공자의 제자들인 민손, 염경, 염옹, 재여, 단목사, 염구, 중유, 언언, 복상, 전손사의 10명을 말하고, 송조 6현은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를 말한다. 그리고 동국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말한다.

 

 

조선시대 양반관료의 최고 명예는 문묘배향공신이 되는 것이다. 문묘배향공신은 정공신이나 종묘배향공신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학자가문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국가에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그 후손들을 특채하였다. 최초로 우리나라 사람을 문묘에 배향한 것은 고려 현종 11(1021)에 최치원이다. 신라 사람이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2년 후인 현종 13(1022)에는 신라의 설총을 문묘에 배향하였다. 충숙왕 6(1319)에는 주자학을 학습하고 국학을 진흥시킨 공로로 안향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공신은 정몽주다. 정몽주는 중종 12(1517)에 배향되었다. 정몽주의 신위는 문묘에서 최치원의 신위 다음에 자리하였다. 광해군 2(1610)에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른바 동방오현이 같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임란 이후 정쟁이 격화되면서 문묘배향공신도 정쟁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서인의 연원으로 상징되는 이이와 성혼은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중앙권력을 장악한 후 문묘배향공신이 되었지만,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세력을 잃자 문묘에서 축출되었다. 이이와 성혼은 갑술환국에서 서인이 남인을 축출한 이후 다시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숙종 대 이후의 문묘배향공신은 박세채를 제외하면 모두 노론계의 인물들이다. 이는 숙종 대 이후 노론이 당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박세채의 경우는 탕평을 모색하던 숙종이 일찍이 탕평론을 주장한 박세채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한 인물들, 즉 김인후,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노론계열의 학문적, 정치적 연원을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돈암서원 원정비와 관련된 인물들은 노론의 핵심이다.

그러면 이곳에 모셔진 분들에 대해 알아보자

 

 

1. 김장생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문묘에 종사된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이다.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다.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김집은 그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아버지 김계휘의 친구가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었으므로 특별히 그들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계휘는 사암 박순, 기대승 등과도 친구로 지냈으므로 훗날 사계는 그들의 문인들과도 인맥을 형성하였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정암 조광조-휴암 백인걸-율곡 이이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예학(禮學)의 태두가 되었다.

율곡 이이는 그의 스승이자 사돈이다. 율곡의 딸이 그의 아들 김집의 처이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쓴 대제학 김만중(金萬重)은 그의 증손자이다. 송시열,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수항, 김수흥, 김익훈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또한 송시열의 후대에서도 윤증, 박세당 등의 소론계 학맥으로도 분화, 계승되었다. 이들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에 김집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보통 김집을 스승님으로, 김장생은 노스승님, 큰스승으로 불렀다.

 

 

2. 김집

김집(金集, 1574-1656)은 김장생의 아들이다. 호는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분이다.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와 윤선거, 윤문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학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공동 조상이다. 효종 초에는 안방준과,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였다.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이다. 이이·성혼·송익필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을 이어 그 학문을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문하생들 중에서 송시열을 당수로 하는 노론과 또 다른 문인 윤선거의 아들 윤증을 당수로 하는 소론이 나뉜다.

 

 

3. 송준길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유학자·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 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일찍부터 김장생과 김집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당색은 서인으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남인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었다.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의 아들이며 딸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생모이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친척이며 류성룡의 문인인 정경세의 사위이다.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송시열의 조부와 송준길의 조부는 광주 이씨 이윤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동서가 되었다. 그래서 송시열과 송준길은 가계 상 13촌이지만 진외가 쪽으로는 6촌 재종간이다. 나이 한살 위인 송준길을 송시열은 13촌 숙으로가 아니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이라 불렀다. 어머니 광산 김씨는 사계 김장생과 사촌 남매간이다. 어려서부터 이이를 사숙(私淑)하였고, 18세 때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특히 예학에 밝고 글재주가 있었으며 사람을 매혹시키는 재주 등을 두루 갖췄으므로 스승 김장생은 일찍이 그가 예학의 종장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윤선거 등을 만났으며, 남인계 선비들과도 두루 사귀어 윤휴, 윤선도 등과 만나 토론, 담론하며 교분을 쌓게 되었다.

김장생 못지않게 정경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대 명필 이시직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보다 낫다."고 경탄했다고 한다.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가르치는 사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649(인조 25) 스승 김집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과 함께 송준길도 발탁되어 부사직이 되었다. 이후 1658(효종 9)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 겸 성균관좨주를 거쳤다. 이후 그는 학문을 가르쳤고, 그의 문하에서 민유중, 황세정, 남구만 등을 배출했다. 제자 중 민유중을 눈여겨본 송준길은 그를 사위로 삼는데, 민유중에게는 그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고, 후에 이들 사이에서 인현왕후가 태어난다. 민유중의 둘째 딸이 왕비로 낙점되면서 국구가 된다. 세자시강원찬선을 겸임하여 세자인 현종의 사부로서 가르쳤다.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가 된 뒤 이조판서로 있던 송시열과 함께 조정의 공론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1659(효종 10) 병조판서로 특별 발탁되었다. 이후 지중추원사·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효종상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기년제를 주장할 때, 송시열의 설을 지지하여 남인의 윤휴·허목·윤선도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기년설을 관철시켰다.

1661(현종 2) 윤선도가 유배된 삼수는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허목 등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남인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잔인하다며 성토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예론에서 승리한 이후 서인 당내의 남인을 처형하자는 주장에 그는 반대했다. 생각이 다르면 다른 것이지 죽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송시열과 김수항을 찾아가 사형 반대의견을 개진했고, 숙종에게도 윤선도의 감형을 적극 주청하기도 했다. 그는 적극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만다.

송준길은 윤선거의 사람됨을 아깝게 여겨 그를 계속 관직에 추천했으나, 윤선거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또 윤선거와 송시열의 사이를 화해시키려 여러 번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윤선거는 죽기 직전까지도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결코 꺾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아들에게 내려진 벼슬까지 거두어줄 것을 간청했다. 1669(현종 10) 4월 윤선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고 애석해했다. 또한 송준길은 "사우(스승과 동료)간에 윤선거를 엄탄지신이 될 만하다고 했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정말 국가의 불행입니다."하고 탄식했다. 윤선거 사후 그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증되었다. 그에 대한 추증은 당시 의정부좌참찬 송준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는데, 송준길이 아뢴 바를 보면 "윤선거는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죽어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합니다. 윤선거가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에까지 한 번도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사후 명정에도 '성균 생원'이라 썼다 하니, 그 예우하는 도리로 증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했다.

1670년 세자의 관례식에 참석한 뒤 낙향하였으며, 이후 회덕 향리에 은거하다가 167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향년 66세였다. 다음 1756(영조 32) 송시열 등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4. 송시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본관은 은진이다.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분이다.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다.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었다.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정조 11)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송자는 동양 철학의 본류인 유학의 시조인 공자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주자를 계승하여 조선 유학을 집대성했음은 물론 심오한 동양 철학의 체계를 최종적으로 정립한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다. 1625(인조 3)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이때 송준길, 윤선거, 유계, 윤휴, 이유태 등을 만난다. 이때 만난 윤선거는 그의 친구였으나 병자호란을 계기로 관계가 악화된다. 윤휴는 당색을 초월한 절친한 친구였으나 이후 예송논쟁으로 정적으로 돌변한다. 그는 김장생으로부터 근사록, 심경, 가례 등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작고하자 다시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을 스승으로 받들고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전적으로 주자의 글을 읽으며 주자의 예학대로 생활하였다.

그는 성격이 직설적이고 솔직담백하였으며 꾸밈이 없었다. 또한 뒤에서 남의 흉허물을 하는 것을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고, 자신의 앞에서 타인의 흉허물을 보는 자를 질타하였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그의 성격은 정적을 많이 만들었고, 윤선거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참을 것을 권고한다. 한편 자신의 친척이자 오랜 동문인 송준길과 오랜 우의를 다져나갔다. 송시열은 송준길을, 송준길은 송시열을 서로 각별히 챙겨주었다.

윤휴는 주희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오히려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의 오류를 찾아낸 윤휴는 자기가 새로 주석하여 가르친다거나, 주희의 학설이라도 틀릴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윤휴에게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나 윤휴는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송시열은 이 문제를 두고 1653년 황산서원에서 동료 친구들을 모아서 이 문제를 토론한다. 여기에는 윤선거, 권시, 유계 등이 참여하였다. 황산서원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송시열은 이 선현들 앞에서 윤휴를 단죄하려 한 것이다. 윤선거는 윤휴를 높이 보며, 그 학문이 높고 깊다고 했다. 반면 송시열은 윤휴가 사문난적과 같다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윤선거는 "우리는 경전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물(公物; 모두가 소유하는 것)인데, 그대는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도 못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고. 주자 이후에도 경전에 대하여 조금씩 주해한 것이 많이 있지 않는가" 라며 반박하였다. 윤선거의 반박에 송시열은 '주자가 논한 바는 그 이후 지금까지 한 가지 이치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글자라도 흐린 것이 없다. 만일 여기에 의심이 있으면 주자의 글에 대하여 그 분명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 될 것이지 윤휴는 왜 마음대로 주자의 [중용] 주석의 일부를 버리고 자기주장을 대신 내세우는가?" 이에 어쩔 수 없이 윤선거는 윤휴와 결별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계속 윤휴와 교제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해서 풀기 어려운 악감정을 가졌다.

1669(현종 10) 윤선거가 사망하자 아들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찾아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적어 보냈고, 윤증은 고쳐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지간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비방하며 적대시하게 된 원인은 비단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뿐만이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되었던 남인 윤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송시열도 한때 윤휴를 높이 평가하며 칭송하였으나, 윤휴가 주자의 서()에 대해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주를 달아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술을 집필하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반면 윤선거는 윤휴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주자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사상으로 평가하고 이견이나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지 않는 대상으로 이해했던 송시열과 배치되기에 이르렀다. 윤선거는 이러한 윤휴의 학문을 두고 송시열과 논쟁을 하였다. 송시열이 격분하자 윤선거는 윤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당시 윤선거가 윤휴의 학문을 높게 평가하여 그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송시열에게 소상히 알리면서 다시 문제가 되었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으로 알았다가 사후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 윤휴를 높이 평가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묘갈명을 무성의하게 짓고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비겁하게 살아 돌아온 인물로 폄하해버리자 이에 윤증이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 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우암 송시열은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고 명재 윤증은 이산(尼山)에 살았기에 회니시비라 부른다. 회니시비는 1681(숙종 7)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비방했던 사건이다. 1680(숙종 6) 경신환국의 남인 처벌 문제와 더불어 집권세력인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사건이다. 1681년 윤증은 신유의서를 통해 송시열의 정치적 편견으로 남인들이 죽임을 당하게 하였고 또한 지나치게 독선적이며 주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로 평가하자, 사제였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정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은 급격하게 분파되기 시작했으며 송시열을 따르는 세력은 노론, 윤증을 중심으로 모인 세력은 소론으로 갈라서게 된다.

송시열은 1688년 희빈 장씨가 숙종의 아들을 낳자 16891월 이를 원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숙종의 눈 밖에 났다. 또한 희빈 장씨의 아들 왕자 균이 왕세자가 책봉되자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때 남인들은 다시 그를 죽여야 된다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또 이를 허락하였다. 제주도에서 나온 그를 광양에 이르러 수제자인 권상하 등이 영접하였다.

그가 전라남도 장성군을 지날 무렵 김수항의 아들들과 장성의 하서 김인후 후손들이 그에게 찾아왔다. 김수항의 아들과 측근에게 묘비문을 지어서 준 뒤 다시 발걸음을 계속하여 전라북도 정읍군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가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국문시켰을 때의 파장을 우려한 숙종은 그에게 사약을 내린다.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곧이어 권상하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과 의복을 그에게 유품으로 물려주었다. 그는 9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권상하는 한때 그의 수제자로 손꼽히던 명재 윤증이 그와 등을 돌린 뒤 그의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시대에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역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했다. 그것도 국문을 당하기 위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정읍에서 서둘러 사약을 마신 점이 상당히 특이한 죽음이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을 많이 가졌으나, 솔직담백하였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깍듯이 대하였고,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로 대하였다. 신분에 구애됨 없이 누구에게나 편견 없고, 사심없이 대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이나 주자, 공자와 맹자를 비판하거나 유교사상을 부정하는 자는 원수로 여기고 거침없이 공격하고 규탄하였다. 그는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이를 평생 신념으로 삼았다. 그는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배움, 교육이 중요했고, 예의와 염치,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길이 성리학에 있다고 봤다. 송시열은 이황의 서첩을 보고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하고 감탄하였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 뒤에 신원되었다. 생전의 행적에 대해서 칭송과 비방이 엇갈리지만 서인 정권 하에서 영조에 의해 문묘에 종사되고, 세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던 정조에 의해 효종의 묘정에 추향되었다. 또한 정조는 그를 공자, 맹자, 순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추대하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1756(영조 32) 왕명으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해 송준길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후일 송시열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친히 편찬한 앙현전심록에서 정조는 송시열을 마침내 주자에 비견될만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 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권상하는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며 윤증과 허목, 윤휴가 술수를 꾸며 송시열을 죽게 했다고 굳게 확신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묘비문을 쓰면서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글귀가 문제시되어 다시 노론, 소론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송시열은 윤휴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이자 친구였다. 예송 논쟁 초반까지만 해도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를 당이 다른 양반 정도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예송 논쟁이 터지면서 둘은 원수로 돌변한다.

 

 

조선 후기의 역사서, 연려실기술에는 송시열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기록이 실려 있다. 김재구의 조야회통을 보면 송시열은 오직 바를 자 한자로 후손들을 가르쳤다. 죽기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죽는 날 밤에는 규성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지붕 위에 뻗쳤다. 규성은 문운, 즉 학문을 상징하는 별이다. 그러나 나량좌의 명촌잡록을 보면 사약을 받던 날 송시열은 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을 빌어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누웠다. 종시 마시지 아니하니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죽음에 임한 그의 모습은 목숨을 구걸하는 소인배였다는 것이다.

송시열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고 하는 것은 연려실기술 자체가 사서고 연려실기술을 이긍익이라는 사람이 이 역사서를 쓰면서 자기의 주장보다는 당시 상반된 주장을 동시에 실음으로써 객관화하려는 데서 나온게 아닌가 생각든다.

 

 

송시열에 대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만동묘다. 화양동 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이며,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으로 불렸다. 그러다 효종 때 우암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은 곧바로 이 화양동에 머물며 암서재를 짓고서 제자를 가르쳤다. 송시열은 화양동 계곡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노론의 성지 가운데 성지였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서원은 1695년 숙종 21년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함께 세웠다. 나라 안 44개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서원이 된 화양동 서원은 1696년에 사액을 받았다.

화양동서원에 딸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를 내준 명나라의 의종과 신종을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나라에서는 여기에 땅과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는 만동묘를 증수했으며, 헌종 때는 관찰사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 후 유생들의 소굴이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하였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했다. 그 후 유생들이 만동묘를 재건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했으나 실패했는데,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명성황후와 외척인 여흥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잡자 1874년 고종 11년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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