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정읍 무성서원
무성서원은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에 있다. 가 보면 마을 한가운데에 서원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서원은 처음 본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한적한 곳에 있는데 무성서원은 무성마을의 중심에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 때는 태산고을이었다. 고운 최치원선생이 통일신라말인 886년(헌강왕11)에 태산현 태수로 부임하여 8년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그후 고려시대 지방 유림들은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생사당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다.
1483년(성종14)에 퇴락한 태산사를 ‘상춘곡’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정극인 선생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리고 1544년(중종39) 태인 현감으로 부임한 신잠선생이 6년간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역시 생사당을 세워 배향했다. 신잠은 세조 때 공신인 신숙주의 증손자이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처음에는 태산군수를 지낸 최치원과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을 배향했다. 그 후 정극인 등 5명이 추가 배향되었다.
이른 시간이라 우리가 첫 방문자다.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오른쪽에 고직사가 있고, 왼쪽 앞으로 무성서원의 정문 겸 유생들이 휴식하고 교류공간인 현가루(絃歌樓)가 서 있다. 돈암서원의 산앙루와 병산서원의 만대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현가루 좌우에는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대부분 공적비들이다. 내용을 들어다보니 목민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보수 유지한 것을 굳이 공적비로 남겨야 하는지 아침부터 씁쓰레한 기분이 든다.
현가루를 지나면 외삼문이 나와야 되지만 이곳은 현가루가 외삼문 역할을 한다. 그만큼 소박한 서원이다. 현가루를 들어서자 바로 강당인 명륜당이 나오는데 현판의 이름이 바로 ‘무성서원’으로 되어 있다.
서원 강당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이곳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강당마루에 걸레질을 하고 있다. 이곳이 다른 서원들보다 깨끗한 편이라고 말하니 기뻐하신다.
조금 더 있으니 초등학생들이 몰려왔다. 문화유산 해설사분이 열심히 해설을 한다. 그 내용들이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도 어린 학생들이 경청을 잘하고 있다. 학생들이 강당 위로 올라오기에 자리를 비켜주고는 서원에서 가장 중시하는 묘당인 태산사로 갔다. 문이 닫혀 있다.
사당 안에는 모두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가운데 주향으로 문창후 최치원 선생을 모셨다. 위패 뒤 벽에는 최치원 선생 영정도 모셨다. 최치원 선생의 영정은 1784년 지리산 쌍계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태산사 건물은 성종 15년(1484)에 세워져 헌종 10년(1844)에 중수했다. 그러나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타 없어져 순조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현가루는 1891년에 지어졌다. 1997년에는 서원의 모든 건물에 대한 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무성서원의 핵심적인 명칭은 무성서원의 ‘무성(武城)’과 현가루의 ‘현가(絃歌)’다. 무성이라는 말은 논어에 두 번이나 나온다. 옹야편과 양화편이다. 무성이란 춘추시대 노나라 변방의 고을 지명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무성이라는 고을의 읍제로 있을 때 공자는 자유에게 ‘무성에서 좋은 인재를 얻은는가?’ 물어보자 자유는 ‘담대멸명이라는 자를 얻었다고 대답을 한다(子游爲武城宰子曰女得人焉爾乎曰 有澹臺滅明者).’ 그리고 양화편에서는 ‘공자가 무성에 갔을 때 현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子之武城 聞弦歌之聲).’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현은 활시위 ‘弦’이나 악기 줄 ‘絃’으로 해석한다. 즉 현가란 현악기에 맞추어 하는 노래다. 여기서는 예악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서원 건물들의 이름은 논어에서 많이 따와서 짓는다.
논어 양화편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제자인 자유가 다스리는 무성에 갔더니 집집마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유는 이른바 예악으로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농을 던졌다.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인 예악으로 어찌 무성 같은 작은 고을을 다스리냐는 농담이지만, 실은 자유는 그릇이 크기 때문에 무성같이 작은 고을을 다스리기엔 아깝다는 마음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유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반문을 한다. “일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아, 자유의 말이 맞다. 내가 앞서 한 말은 농이었을 뿐이다.”
이 구절은 논어에서 처음으로 공자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제자들에게 농담을 한 것이라고 변명한 대목이다.
따라서 ‘무성’이라는 곳은 자유가 정치를 잘한 작은 고을을 상징하고, 현가루의 ‘현가’는 자유가 무성에서 예악을 실천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공자의 훌륭한 제자 열 명 가운데 문학에 뛰어난 사람은 자유와 자하라고 했다.
현가루는 외삼문의 역할을 한다. 현가루를 통해 들어가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온다. 그 안에는 무성서원의 중심역할을 하는 사당인 태산사가 있다. 이처럼 현가루와 강당과 사당이 일직선상에 있다. 그리고 다른 서원에 있는 동재와 서재, 장서각 또는 장판각 등이 없다. 동서제가 있을 장소에 담이 쳐져 있는 특이한 형태다. 서원영역 밖 명륜당 동쪽에 있는 강수재(講修齋)가 동재로 보인다.
서재가 있을 장소에는 비석들만 있다. 비석이 너무 커서 전체적인 서원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병오창의기적비’가 강수재 앞에 서 있다. 이 비석은 1906년 즉 丙午년에 면암 최익현선생이 이곳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병오의병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데 분개해서 일어난 의병이다.
여기서 최치원 선생과 신잠선생에 대해 알아보자
1. 최치원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났지만 돌아가신 해는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의 태두로 인증받은 셈이다. 유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우고, 백제는 근초고왕 29년(374)에 고흥을 박사로 삼았다. 신라에서는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당태종 이세민과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신라와 당나라는 군사연합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 때 김춘추의 셋째아들 문왕을 대동했는데, 아들을 숙위로 남겨 두겠다고 요청했고 당 태종은 이를 수락했다.
본래 숙위는 궁중에서 황제를 경호하는 근위병이었다. 당나라는 외국의 왕실 자제들을 숙위라는 명목으로 수도 장안에 불러들였다. 명목은 숙위지만 사실상 인질이었다. 숙위는 자발적으로 갈뿐더러 자유도 보장된 존재라는 점에서 달랐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16차례 숙위가 파견되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파견되는 숙위는 기본적으로 인질로서 왕족이 담당했다. 김춘추의 셋째 아들인 문왕이 제1호 숙위였으며, 둘째 아들 김인문이 제2호 숙위였다. 전임 숙위는 후임 숙위가 오면 귀국할 수 있었다. 숙위는 형식상 인질이었지만, 실제는 당나라 수도에서 선진문물을 몸소 체험하는 연수생이기도 했다. 숙위학생은 국학에서 10년을 기한으로 공부했다. 유학 비용은 신라와 당나라에서 부담하였다. 일종의 국비유학생인 셈이다. 이러한 숙위학생은 신라하대에 접어들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숙위학생과 유학승의 신분이 진골에서 6두품으로 내려갔다. 진골들은 신라 내에서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느라 굳이 당나라로 가려하지 않았다. 그 자리를 6두품들이 대신 채웠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 재능을 다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토황소격문’은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이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 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 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정한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 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태산군 태수가 되었을 때 고을을 잘 다스려 지금의 무성서원이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이후 최치원이 은둔을 결심하고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의 빙산),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지금의 창원 마산)의 별서 등이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동래의 해운대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저술로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산비문』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원문(願文)·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한다.
사산비문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葆光塔碑)’를 말한다. ‘사산비문(四山碑文)’ 가운데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오늘날까지 그의 필적을 전해준다. 이 탑비(塔碑)는 대한민국 국보 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최치원이 해서체(楷書體)로 쓴 비문은 모두 38행 2,414자로 되어 있다.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1021년(현종 12) 현종에 의해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등에 제향되었다. 태인의 무성서원이 지금의 정읍 무성서원으로 공식명칭을 부여받았다.
최치원은 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고유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나아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난랑비서’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삼국사기의 ‘진흥왕 조’에 인용되어 전해지는 이 글에서 최치원이 말하는 풍류도는 신라의 화랑도를 가리킨다. 달리 풍월도라고도 하는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에 비로소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그 기원은 고대의 전통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에 대해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락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겼는데 멀어서 못간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구려에도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는 관직과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전통은 꼭 신라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최치원은 이처럼 고유 신앙과 사상에 바탕을 두면서 유교·불교·도교 등 외래 사상의 가르침을 융합하고 있는 풍류도를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칭하며, 포용과 조화의 특성을 지닌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최치원은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지극한 도에서는 하나로 통하므로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진감선사 비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진감선사탑비 이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석가와 공자의 가르침이 흐름이 갈리고 체제가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고 한다. 하지만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이 문(文)으로 사(辭)를 해치지 않고, 사(辭)로 뜻(志)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예기에 이르기를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서 ‘여래(如來)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며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겸하지 못하는 자는 물이 겸하기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도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큰 뜻을 아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더불어 지극한 도를 말할 수 있다 하겠다.”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유(儒)·불(佛)·선(仙)의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유·불·선의 3교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은 달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유·불·선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교 정치이념을 강조한 최승로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려 시대에는 유교·불교·도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민간 신앙과 풍습에서는 그것들이 서로 긴밀히 융합하는 모습을 띠었다. 그리고 고려 말기의 선승인 진각국사혜심은 “이름을 들어보면 유교와 불교가 서로 멀어 다른 것 같지만 그 실상을 알면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며 ‘유불일치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민족의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의 사상을 융합하여 형성된 동학에서도 최치원 사상과의 연관성이 나타난다.
2. 신잠(申潛,1491 - 1554)
안동의 농암종택에 있는 긍구당의 당호를 전서체로 적은 글씨를 보고 신잠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았다. 농암종택의 종손이 이 글씨는 신잠이라는 분이 쓴 글씨라면서 자랑을 했다. 그리고 무성서원에서 이분을 만난 것이다.
신잠은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신숙주의 증손자이고, 부친은 예조참판 신종호, 모친은 세종대왕의 11째 아들 의창군 이공의 딸이다. 7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성종의 부마로 문아(文雅)가 높았던 맏형 신항에게 배웠다.
1513년 23세에 진사가 되고 1519년 현량과에 합격,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521년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흥에 유배, 17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곳에서 묵죽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1537년에 양주로 옮겨졌으며, 1538년에 거주의 편의가 허락되어 아차산 아래에 살면서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으면서 소일하였다. 1543년에 다시 등용되어 호남지방의 태인 현감을 지냈는데 큰 흉년을 맞았을 때 백성을 잘 구활(救活)하여 백성들이 생사단을 설치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지금의 무성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이어 간성군수를 거쳐 상주 목사를 지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상주 목사를 지내면서 외임관리 가운데 청렴하고 근신하는 관리로 뽑혔다. 상주의 백성들은 그를 추모하여 덕성비를 세웠다. 1668년에 장흥 예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시 · 서 · 화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김인후(金麟厚) · 이황(李滉) 등 여러 문사들이 신잠의 묵죽도에 관해 제시(題詩)를 남기고 있어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황은 신잠과 신잠의 묵죽화를 일심동체의 경지로 올려 보았다고 한다.
무성서원을 다녀와 다시 무성서원을 공부하고 이 글을 쓰면서 무성서원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행은 여행지에서뿐 아니라 여행을 다녀온 뒤 여행기를 쓰면서 그 여행의 의미가 다시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게을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이 글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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