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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여행

토마스 홉스의 행복론

by 황교장 2022. 6. 23.

토마스 홉스의 행복론

 

토마스 홉스(1588-1679)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가정으로 유명하다. 홉스는 158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해에 태어났다.

당시 그의 모친은 임신 7개월 중이었는데 무적함대가 마을 근방까지 올지 모른다는 소문에 놀라 조산하여 칠삭둥이로 태어났지만 영리하였다. 부유한 삼촌의 후원으로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옥스포드 대학교 졸업식

옥스퍼드 총장의 추천으로 데번셔 백작 가문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이곳이 홉스에게는 평생직장이 되었다. 그는 장장 70여 년 동안 무려 4대가 바뀐 이 집안의 주인을 모신 충실한 비서이자 가정교사였다.

이런 비서직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주인의 일과를 하나하나 챙기고 보조해야 했으므로 결혼이 사실상 어려웠다. 홉스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백작이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찬가지로 상당한 지식인이었을 다른 귀족의 비서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사회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옥스포드대학교

1610, 홉스는 그보다 두 살 어린 백작의 아들을 데리고 스승 자격으로 5년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났다. 영국 귀족의 자녀들은 청소년기에 유럽으로 긴 여행을 하곤 했다. 외국어에 능했던 홉스도 제자들의 여행 가이드로 자주 유럽을 둘러보았다.

대여행(Grand tour)’이라 불리는 1610년의 첫 여행은 홉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유럽은 종교 전쟁 직후라 매우 혼란하고 어지러웠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오랜 다툼은 유럽 사회를 지탱하던 도덕, 특히 기독교 윤리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경건한 신앙을 강조하며 올바른 태도와 생활을 외치던 구교와 신교는, 숱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참담한 현실은 종교에서 말하는 성인군자 같은 삶이 일상생활에서는 얼마나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를 보여 주었다.

 

옥스포드 애슈몰린박물관

홉스는 국제 관계를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세계로 보았다. 이런 시각을 갖게 된 데는 여행에서 얻은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눈에 세상은 속임수와 조작이 판치는 정글과 같은 곳이었다.

도덕과 윤리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혼란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남으려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제각각 갖고 있는 살아남으려는 절실한 욕구, 자기보존의 욕구뿐이다. 개인이 모인 국가도 이 점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홉스 철학의 근원이 된다. 홉스는 또한 세계를 물체의 운동으로 보았다. 인간도 물체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법칙에 따라 인과적으로 운동한다고 생각했다. 홉스는 인간이라는 물체의 운동을 관찰한 결과 운동의 주된 동인도 역시 자기 이익, 곧 이기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자기보존의 욕구다.

 

홉스는 인간의 삶은 단지 개별 인간의 최고 이익인 자기보존에 있다는 가정하에 스스로 보호하고 살아남을 권리를 인지하고, 이로부터 타인의 생존권을 인정할 의무를 부여하여 최소한의 법칙을 도출하게 된다.

즉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서로 계약 주체가 되어 상호 동의를 통해 사회를 구성하는 데에서 찾았다. 개인들은 사회계약의 효율적 이행을 위해 군주에게 권리를 양도하고, 군주는 그들 간의 평화 상태를 유지할 의무를 진다. 만약 군주가 위반할 시 계약 파기로 간주하고, 군주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토마스 홉스

또한 홉스는 인간의 욕망이 충족되어 즐거움을 느끼면서 기분 좋은 마음이 지속된다면 이는 곧 행복한 상태라고 하였다.

홉스의 이러한 행복은 수동적인 기분에 기반을 둔 행복이다. 이는 인간의 최고 정신 능력인 이성을 최대한 발전시켜 능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최고의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고대인에게 행복은 주로 개인의 이성적, 행위적 덕 수양으로 성취하는 데 있었다면, 근대 개인의 행복은 사회계약에 대한 동의와 그 유지에 의존한다. 곧 개인은 개별존재로서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평등, 정의, 안정, 번영 등 질적 상태의 고려 없이는 행복을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홉스 행복론의 핵심이다.

 

홉스 리바이든

홉스는 70살 무렵에 이르러서야 그의 삶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령임에도 이웃집 젊은 여성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 시를 지었다. 다만 짝사랑이었다.

시에는 "나는 아직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사람도 있네, 하지만 자랑할 것도 없고 그녀의 환심을 얻을 길도 없네", "아름다운 육체에 깃들어 있는 더 아름다운 정신을 사랑한 사람을"

 

홉스는 85세의 나이로 호머의 일리어드, 167688세의 나이로 오딧세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남은 몇 년의 세월은 카벤디쉬 집안의 영지인 채트워스(Chatsworth)와 하드윅 홀(Hardwick Hall)에서 기거하며 보냈다.

이곳에서 홉스는 배뇨 곤란이란 병이 심해져 거의 거동도 할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1679124, 92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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