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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스페인 여행 13-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역사 4-1

by 황교장 2023. 3. 10.

스페인 여행 13-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역사 4-1

톨레도를 뒤로 하고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로 향했다. 톨레도에서 마드리드까지는 하루 생활권에 속한다. 마드리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와 프라도 미술관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프로 축구 클럽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라리가, FIFA 클럽 월드컵, 3개 리그 최다 우승을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명문 클럽이다. 

레알 마드리드 구장

리오넬 메시와 함께 15년간 세계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퉜던 호날두가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다.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등에서 우승하면 시벨레스 궁전 앞 분수대에 뛰어드는 전통이 인상적이다.

시벨레스 궁

프라도 미술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이다. 스페인 정부와 국왕이 주재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스페인의 최대도시로 2021년 기준으로 광역 인구는 6,661,949명이고 도시 인구는 3,256,000명이다. GDP 규모가 유럽연합에서 세 번째로 큰 남유럽의 경제 중심지이기도 하다.

마드리드는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인 해발 635m의 메세타(Meseta) 고원지대에 있다. 이베리아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동서남북으로 스페인의 주요 도시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린비아 거리

마드리드는 기원전 2세기경 로마제국이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형성된 마을을 ‘마트리체(Matrice)’라고 부르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다가 711년 이슬람인 무어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에 수백 년 동안 마드리드는 시골의 조그만 성채에 불과했다.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은 1516년 에스파냐왕국을 통일하여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70㎞ 떨어진 톨레도를 수도로 삼았다.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 떨어진 바야돌리드에 머무르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귀족들이 지배했던 두 도시를 떠나 1561년 왕궁을 마드리드로 옮겨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알무데나 대성당과 왕궁

지형적으로 방어도시인 톨레도는 외적 팽창이 어려워 대제국의 수도로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귀족들의 텃세가 심한 톨레도에서 벗어나 마드리드에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당시 마드리드는 톨레도와 바야돌리드, 카스티야 왕국의 중심지였던 부르고스의 중앙에 위치해 중앙집권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마드리드는 1561년 수도가 되면서 발전한 도시이기 때문에 중세유적은 거의 없지만 수도로 정해진 이후 많은 건축 유산들이 있다. 마드리드 관광의 중심은 ‘태양의 문’이라 불리는 ‘푸에르타 델 솔’이다. ‘0㎞’ 기점 표식을 중심으로 10개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푸에르타 델 솔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약속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어 항상 사람들이 많다. 푸에르타 델 솔의 서쪽에는 마드리드 왕궁이 있고, 동쪽에는 프라도 국립미술관이 도보로 가능한 거리 내에 있다. 광장에서는 매년 스페인의 새해 행사가 열리는데, 12월 31일 밤 12시 광장에 있는 왕립우체국과 정부 청사에 부속된 종탑에서 종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스페인 사람들은 청포도를 한 알씩 먹으면서 행운과 건강을 기원한다고 한다. 19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스페인의 대표적인 새해맞이 행사로 자리 잡았다.

마요르 광장

또 다른 유명한 광장은 마요르 광장이다. 중세 시대에는 마드리드 외곽 지역에서 온 상인들이 장사하는 장소였다. 필리페 2세는 1580년 광장을 정비하기 시작해 1619년에 완공되었다. 왕의 취임식이나 교수형, 투우경기 등의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광장은 120m×94m의 직사각형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광장 주변은 ㅁ자 형태의 237개의 발코니를 가진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놓여있고 광장 둘레의 건물 1층에는 식당,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자리하고 있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왕궁

마드리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 중 하나는 마드리드 왕궁이다. 동쪽에 있어 ‘오리엔테 궁전’으로도 불린다. 에스파냐 왕의 공식 거처지만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로는 왕가가 거주하지 않는다. 왕실은 마드리드 교외 ‘팔라시오 데 라 사르수엘라’에 거주하고 있다. 공식 행사가 없는 날에는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왕궁

이곳은 원래 이슬람의 성채가 있던 곳으로, 1561년 펠리페 2세가 왕궁을 이곳으로 옮겼다. 1734년 이 건물이 화재를 입어 펠리페 5세는 루브르 궁전을 모델로 삼아 화강암으로 재건축하여 1755년 26년만에 완성하였다. ‘ㅂ’형 건물로 길이가 131m이다. 총 2,800여 개의 방 중 50여 개를 개방하고 있다.

왕궁

이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왕관의 방’으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모방한 곳으로 내부가 아주 화려하다. 로코코 양식의 ‘도자기 방’과 ‘가스파리니의 방’도 유명하다. 벨라스케스를 비롯해 티에폴로, 고야 등 최고의 화가들이 궁전의 보수 작업에 참여했다. 스페인 왕가가 수집해온 역사적인 작품들이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왕궁의 북쪽에는 스페인 광장이 나온다.

스페인 광장

스페인 광장은 마드리드를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누는 경계다. 세르반테스가 사망한 지 300년 되던 1916년에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로시난테를 조각상으로 구현해 놓았다.

마드리드에서 꼭 가보아야 하는 공원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 맞은편에 있는 레티로 공원(Parque del Retiro)이다. 레티로 공원은 펠리페 4세(1605~1665)의 부엔 로티로 궁의 정원이었다. 그 이전에는 펠리페 2세(1527~1598)의 두 번째 부인인 영국의 튜더 메리여왕을 위해 지은 궁이 있었다고 한다. 레티로 공원에는 약 1만 5천여 그루의 나무가 있어 ‘마드리드의 허파’라고도 불린다. 400년 동안 꾸준히 가꾸어 온 이 녹색지대는 여의도의 4배가 넘는다고 한다. 대도시에서 보기 드문 거대 녹지로, 도심 속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인 셈이다

레티로 공원

마드리드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것은 프라도미술관과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를 가진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1000여 점의 작품을 보유한 티센 보르세미사 미술관,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 내부 입구

 

스페인의 역사 4-1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는 사망하기 한 달 전인 10월 11일, 펠리페를 후계자로 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과 영국, 네덜란드 등은 1701년에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도 1세의 차남인 카를로스 대공을 스페인 왕으로 추대했다. 프랑스의 독주를 막고 유럽 각국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동맹국들이 1702년에 프랑스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도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에 반대하는 동맹에 참여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부르봉 왕가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하여, 아라곤 연합 왕국이 분리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아라곤 연합 왕국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대공을 지지했다. 이 두 진영 사이에 1702년부터 1715년까지 13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펠리페 5세가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포기하는 대신 정식으로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영국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섬을 차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많은 항구와 헬데를란트를 합병했다. 시칠리아와 밀라노 일부를 사보이아가 차지했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스페인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지만, 반면에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각국이 철저한 세력 균형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펠리페 5세

2. 펠리페 5세(1683~1746, 재위 1700~1724, 1724~1746).

펠리페 5세는 1683년 프랑스의 베르사유에서 루이 14세의 왕태자이던 루이 드 프랑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며 조모는 스페인 카를로스 2세의 누이 마리아 테레사이다. 따라서 혈통적으로는 스페인 펠리페 4세의 증손자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펠리페 5세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신해 부르봉 왕가가 왕위를 잇는 첫 번째 왕이다.

펠리페 5세가 처음 에스파냐의 왕으로 즉위할 때는 연합왕국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각 왕국의 특권과 법률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점차 각 왕국이 지니고 있던 특권을 빼앗아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그런데 펠리페 5세는 1724년 1월 아들인 루이스 1세에게 에스파냐의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루이스 1세가 몇 달 뒤에 죽자 그해 9월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펠리페 5세 가족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펠리페 5세는 첫 번째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와의 사이에 아들 루이스와 페르난도를 낳았다. 그런데 왕비가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 후 펠리페 5세는 점점 이상행동을 하여 1724년 큰아들 루이스에게 양위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7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펠리페 5세와 이사벨 파르네제

왕위 계승자는 루이스의 동생인 페르난도였지만 새엄마인 이사벨 파르네제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남편이 다시 왕이 되도록 조종해 펠리페 5세가 다시 왕이 되었지만, 정신병 증세가 심하여 실제로는 왕비 이사벨 파르네제가 권력을 휘둘렀다. 이사벨 파르네제는 왕세자와 세자비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것조차 금지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펠리페 5세는 1746년 7월 9일, 62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에서 사망한다.

페르난도 6세

3. 페르난도 6세(1713~1759, 재위 1746~1759)

페르난도 6세는 1713년 9월 23일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5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사보이의 마리아 루이사 가브리엘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1714년 모친의 이른 사망으로 그는 궁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의 형 루이스와 함께 어린 시절을 쓸쓸히 보냈다. 더욱이 형 루이스마저 1724년 왕으로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페르난도는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당시 그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새어머니 이사벨 파르네제(1692~1766)의 술수로 국가평의회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궁에서 고립되어 있어, 차기 후계자로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페르난도 6세 왕비

한편 페르난도는 포르투갈의 주앙 5세의 딸 바르바라와 결혼하기 위해 공주의 초상화를 보내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다. 포르투갈은 계속 미루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곰보 자국이 있고 뚱뚱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6개 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똑똑하고 따뜻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새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자란 페르난도는 진심으로 왕비를 사랑하게 되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정신병자인 왕을 내세워 실권을 장악한 새어머니는 왕세자 부부가 아버지인 펠리페 5세를 마음대로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심지어 신하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5세가 죽자 페르난도 6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는 왕이 되자 새어머니 파르네제를 추방하고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권력에 아부하던 부패한 신하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페르난도 6세

왕세자 시절 국정에 관련된 충분한 지식과 경험도 없이 왕이 되지만 왕으로서 명민함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선대에서 비롯된 전쟁의 제 요소들을 일소하고 왕국의 개혁에 노력했다. 궁정 내 새어머니 파를 견제하고, 새어머니를 궁에서 추방하였다. 주변국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는 대외적으로 평화정책을 추구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농업, 산업, 무역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산 페르난도 왕립 예술학술원

1752년 산 페르난도 왕립 예술학술원을 비롯하여 이후 식물원과 천문관측소와 같은 학문의 기반 시설이 건립되었다. 비록 페르난도 6세가 다스린 기간은 짧았지만 18세기 중반 스페인 부흥에 기초를 놓는 시기였다.

1758년 왕비 바르바라 데 브라간사의 죽음은 페르난도 6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왕비를 너무 사랑하여 극도의 우울증과 정신이상 증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다음 해인 175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후손이 없이 사망하여 왕위는 그를 괴롭혔던 이사벨 파르네제의 장남이자 그의 이복동생인 나폴리의 왕 카를로스가 계승하였다.

카를로스 3세

4. 카를로스 3세(1716~1788, 재위 1759~1788)

카를로스 3세는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이사벨 파르네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인 이사벨 파르네제는 이탈리아 북부의 파르마 지방을 다스리던 명문가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직계 후손이자 파르마 공국의 상속녀였다. 그녀는 1724년 비인조약을 성사시켜 아들 카를로스가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 되게 했다.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이미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이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통치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이탈리아 통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1759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면서 계몽전제군주로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귀족층보다 중산층과 계몽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서는 행정 개편과 세 번째 부왕령의 설치하여 효율적인 통치와 외부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강화했다. 그는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토지귀족 세력을 약화시켰다. 사법 개혁을 실시하고, 국내 상업의 활성화와 수출을 육성하였다. 폼페이의 로마 촌락 발굴과 같은 문화 프로젝트도 후원하였다. 프라도 미술관의 설립을 비롯하여 마드리드의 외관을 정비하는 작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상업과 운송에 필요한 길과 도로를 놓고, 전국에 22개의 다리들을 건설하였다. 이외에도 육군, 기병대, 포병대와 같은 군사학교들을 설립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함대를 구축하였다.

카를로스 3세는 대외적으로는 선왕 페르난도 6세 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7년 전쟁에 뛰어들어 대서양과 유럽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프랑스와 영국에 대해 스페인의 국익을 챙기고자 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진정한 계몽전제군주로서 동시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와도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카를로스 3세 대학교

현재 스페인 유수의 명문대학인 카를로스 3세 대학은 교육에 힘썼던 18세기 계몽군주 카를로스 3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 대학은 경제학 분야에서 뚜렷한 명성을 지니고 있어 늘 세계 최우수 50개 대학 안에 든다. 이처럼 카를로스 3세는 근대 이전 스페인 역사상 마지막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 대혁명 바로 전해인 1788년 12월 14일 마드리드에서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

5. 카를로스 4세(1748~1819, 재위 1788~1808)

카를로스 4세는 부왕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이었을 때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인 페르난도 6세가 자식 없이 승하하면서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차기 계승권자로 지명되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는 동생 페르난도가 양위받았다.

그는 레슬링을 좋아하고 좋은 체격과 체력을 지녔다. 지적인 면은 둔하지만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왕은 늘 ‘카를로스, 넌 바보다.’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1788년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4세는 아버지와 달리 국정에는 관심이 없고 사냥을 좋아하여 사냥에 열중하였다.

고도이

왕비는 자신에게 무신경한 남편 대신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남편인 카를로스 4세를 장악했다. 시아버지인 카를로스 3세가 죽기 전에 이미 근위대 출신의 고도이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카를로스 3세가 이를 알고 며느리의 스캔들을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카를로스 3세 사후에 마누엘 고도이(1767~1851)는 왕비의 근위병에서 25세에 총리대신으로 승진했다. 마누엘 고도이와 왕비가 사실상 실권자였다.

고도이에 대한 대신들과 백성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당시 스페인의 천재적인 화가인 고야(1746-1829)가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보면 왕은 중심부에서 물러나 있고 왕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왕비가 최고 권력자임을 나타낸 것이다. 왕비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천박하게, 왕은 무기력하고 어리석게 그려져 있다. 1808년 스페인 국민들은 총리인 마누엘 고도이와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무능한 왕의 전횡을 더는 참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켜 왕을 내쫓고 왕세자 페르난도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옹립했다.

나폴레옹

당시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유럽 대륙을 장악한 나폴레옹이 영국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스페인-프랑스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1805년 10월 21일 영국함대와 벌인 트라팔가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참패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사할 계획으로 대륙을 봉쇄한다. 즉 유럽 대륙의 어떤 나라도 영국과 어떤 물건도 사지도 팔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고통을 받은 나라는 해외 식민지에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영국이 아니라 영국에 주로 수출하던 포르투갈과 러시아 등이었다.

나폴레옹

대륙 봉쇄령을 어기고 포르투갈이 영국과 교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원정을 계획하고 스페인에 길을 내라고 요구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1807년 퐁텐블로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주된 내용은 포르투갈을 공격한다는 핑계로 프랑스 군대가 제약 없이 스페인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지배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고도이

나폴레옹 군대가 포르투갈을 치러 내려오자 포르투갈 왕실은 그들의 식민지인 브라질로 망명했다. 고도이는 포르투갈처럼 멕시코로 도피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자고 국왕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철수에 유리한 안달루시아로 이동할 것을 종용했다. 이를 알고 격분한 백성들은 나폴레옹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6년에 걸친 스페인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이 고도이란 간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국민들의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 총리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의 중심에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페르난도 왕세자가 있었다. 반란으로 고도이 총리가 투옥되자 카를로스 4세는 퇴위를 결정하였다. 왕세자가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으나 카를로스 4세가 며칠 뒤 퇴위를 번복하며 나폴레옹에게 지지를 요청했다. 이는 기회를 엿보던 나폴레옹에게 스페인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재를 빌미로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모두 프랑스 바욘으로 오도록 유도하였다. 바욘에 양측이 도착하자 이들을 감금한 후 퇴위를 강요했다. 왕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카를로스 4세는 파리교외 퐁텐블로로 이송되었고 왕세자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 중부 앵드르 강가의 발렌시아 성에 유폐되었다.

왕이 유폐되어 있는 동안 나폴레옹은 스페인이 영국과 양모 밀무역을 했다고 주장했다. 밀무역으로 대륙봉쇄령을 어겼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스페인을 정복하였다. 이후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1768~1844)를 스페인 왕 호세 1세(1808~1813)로 세웠다.

이는 스페인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대를 내몰기 위해 스페인 독립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프랑스군은 잔혹하게 민중의 봉기를 누르려 했지만 그들의 저항정신은 더욱 격렬해졌다. 민중봉기가 일어난 1808년 5월 2일에 이은 ‘180853일 마드리드’를 고야는 그림으로 남겼다.

고야, 180853일 마드리드

이 그림에는 잔혹한 프랑스군에 처형되는 스페인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스페인 독립전쟁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습하거나 치고 빠지는 ‘작은 전쟁’이 주로 벌어져 프랑스군을 괴롭혔는데 이 작은 전쟁이 스페인 말로 ‘게릴라전’이다, 이때를 시작으로 그 이후의 전쟁에서 게릴라전이 많이 활용 되었다.

1808년, 스페인이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전쟁을 벌이자 영국도 포르투갈과 동맹해서 1809년부터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맹군 총지휘자는 아서 웰즐리 장군으로 뒷날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웰링턴 공작이었다.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을 계속 점령하고 있었다. 다만 안달루시아 지방의 군항이 있는 카디스 지역은 프랑스 군대가 점령에 실패했다. 도망쳐온 스페인의 주요 인사들이 카디스에 모여 임시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카디스 의회’이다.

1812년 카디스 헌법

1812년 3월 19일 카디스 의회는 스페인 역사상 첫 헌법을 제정하여 반포했다. 스페인이 입헌군주국임을 규정한 헌법이다. 왕의 통치를 인정하되 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이 헌법은 지금까지도 스페인 헌법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카디스 헌법은 페르난도 7세의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독립전쟁의 양상은 1812년부터 크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분수령인 러시아 원정(1812.6.22.~12.14)이 스페인 독립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대륙 봉쇄령을 계속 어기는 러시아를 징벌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동원했다. 스페인을 정복한 군대의 상당수를 러시아 전선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프랑스 점령군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동맹군은 프랑스를 총공격하여 1813년에 프랑스군을 스페인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1814년 4월에 엘바섬에 유폐됨으로써 6년에 걸친 이 전쟁은 스페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814년 5월에는 유폐되었던 페르난도 7세가 풀려나 스페인으로 되돌아 와 스페인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국왕에 즉위하였다.

1814 페르난도 7세 귀환 환영인파

그러나 카를로스 4세는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콩피에뉴, 마르세유 등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1819년에 결국 나폴리에서 고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페르난도 7세는 부왕 카를로스 4세의 사후에도 고도이의 귀국을 금지했다. 연금도 받지 못하도록 했으나 1821년 고도이의 딸 카를로타가 로마의 왕족과 결혼하는 것은 허락했다. 고도이는 카를로스 4세의 애첩이자 자신의 애인이었던 페피타와 결혼했다. 1832년 파리로 건너가 여생을 보냈다. 1836년에는 비망록을 출판했다. 1847년에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몰수된 재산 일부를 돌려받았다. 고도이는 1851년 10월 7일 85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카를로스 4세는 1765년에 그의 사촌인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의 사이에서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성인으로 생존한 사람은 6명뿐이었다. 하지만 이중 고도이의 자식들이 몇 명인지 알 수가 없다.

호세 1세

6. 호세 1세(1768~1844, 재위 1808~1813)

지중해 코르시카섬에서 출생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1821)의 형이다. 피사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당시에는 프랑스령 코르시카섬 아작시오지방의 판사로 있었다. 나폴레옹이 군인으로서 공적을 세우기 시작할 때부터 나폴레옹을 따라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했다. 그가 스페인 왕이 되면서 프랑스에 대한 스페인 민중들의 적개심이 폭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비록 동생 덕분에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나름 개혁정치를 펼쳤다. 구시대의 산물인 이단 심판을 폐지하였으며 봉건제도를 폐지하려고 하는 등 그들의 전임자였던 카를로스 4세나 페르난도 7세에 비하면 이는 상당한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성직자 등 보수세력들에게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페인의 게릴라들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펼치려고 했지만 동생 나폴레옹은 강경하게 게릴라를 토벌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탄압하게 되면서 자연히 민중들의 지지까지 잃게 되었다. 파리의 사령부에서 이베리아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낙관하여 그는 필요한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오히려 러시아 원정에 병력을 차출당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반도전쟁(스페인 독립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결국 1813년 그는 폐위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는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1817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15년을 살았다. 1820년에는 허수아비 멕시코 황제로 그를 추대하려는 미국 정치계의 유혹을 받았으나 “난 허수아비 왕 생활을 해봐서 그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안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조용히 살다가 1844년 77세로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다.

페르난도 7세

7. 페르난도 7세(1784~1833, 재위 1808/1813~1833)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스페인으로 되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카디스 헌법이었다. 카디스 헌법은 페르난도 7세가 보기엔 불법이었다.

전제군주제에서 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쥐고 있었다.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면 전제군주제의 왕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아니면 혁명으로 왕을 몰아내야 한다. 그런데 카디스 헌법은 왕이 없는 틈에 자기네들끼리 왕의 이름으로 법을 만든 것이다.

페르난도 7세는 카디스 헌법을 무효화 하고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나 탄압에 대한 반발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1820년에 남아메리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라파엘 데 리아고(1784-1823)장군의 반란으로 페르난도 7세는 카디스 헌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신성동맹을 이용해 적이었던 프랑스를 끌어들여 1823년에 자유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형당하거나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리아고 장군도 사형당했는데 그를 모욕하기 위해 평민들에게 집행하는 교수형에 처하였다.

스페인이 혼란스러웠던 이때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독립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의 지배에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은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페닌술라레스, 크리오요, 메스티소, 물라토, 삼보 등이다. 메스티소는 백인과 원주민 인디오와의 혼혈인이고, 물라토는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인, 삼보는 원주민과 흑인 사이의 혼혈인이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본토인은 반도인이란 의미의 페닌술라레스로 불렸다. 이들은 모든 특권과 혜택을 누리던 최고위층이었다. 이들이 총독이나 대주교 등 고위직을 독점했다.

반면에 스페인인이지만 식민지에서 태어난 이들을 크리오요라 불렀다.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스페인 본토 출신에게 차별을 받았다. 남아메리카 식민지의 대지주, 큰 상인 등 사실상 주도적 세력임에도 소수의 페닌술라레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크리오요의 불만은 날로 쌓여 결국 이들이 남아메리카 독립의 지도 세력이 되었다. 불만이 쌓여가던 크리오요에게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은 스페인 제국의 허약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이용하여 남아메리카에서 독립운동이 한꺼번에 터져 식민지 대부분이 1810년부터 1825년 사이에 독립했다. 독립운동을 이끄는 무수한 영웅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북부지방(콜롬비아)에서 활약한 시몬 볼리바르(1783-1830)와 아르헨티나, 페루, 칠례 등을 해방한 호세 데 산마르틴(1778-1850) 장군이다.

시몬 볼리바르

호세 데 산마르틴

남아메리카의 어디를 가든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마르틴의 기념물을 만날 수 있다. 이로써 스페인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모두 잃었다.

당시 페르난도 7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다. 그는 4번째 결혼에서 드디어 자식을 갖게 되었다. 스페인은 살리카법을 따르고 있었다. 살리카법은 6세기 클로비스 1세 때부터 내려온 왕위 계승원칙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는 상속권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남자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딸이 태어나면 차기 국왕은 동생 카를로스 대공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싶었던 그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딸일 것을 대비해 살리카법을 폐지했다.

이사벨 2세

페르난도 7세의 장녀 이사벨 공주가 태어난 뒤 카를로스 대공은 포르투갈 왕국으로 추방되었다. 왕은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봉건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포섭해 이사벨 공주의 지지세력으로 만든 후 1833년 9월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페르난도 7세가 죽자 포르투갈에서 돌아온 카를로스 대공(1788~1855)은 이사벨의 후계자 권리를 인정치 않고 스스로를 카를로스 5세라 칭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이사벨 공주를 이사벨 2세로 옹립하였다.

결국 제1차 카를로스파(카를리스타) 전쟁이 벌어졌다. 카를로스파 전쟁은 1차 부터 3차까지는 19세기에 벌어졌으나 20세기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도 제4차 카를로스파 전쟁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내전이 일어난 원인을 제공한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역사상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