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12-톨레도와 엘 그레코
포르투갈 파티마를 나와 이젠 스페인의 옛 수도인 톨레도로 향했다. 톨레도는 스페인에서 알함브라 궁전 다음으로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톨레도의 풍수와 엘 그레코의 작품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떤 명당이기에 스페인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도의 역할을 했는지 알고 싶었고, 엘 그레코가 남긴 명화를 직접 보고 싶었다.
포르투갈에서 다시 스페인으로 넘어 올 때도 국경을 지나는 줄도 몰랐다. 톨레도로 가는 길은 넓은 평야와 낮은 야산으로 된 구릉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중간에 휴게소를 한번 들르고는 곧장 톨레도 근처까지 왔다.
멀리서 톨레도를 보는 순간 천하의 요새라고 느꼈다. 앞서 다녀온 알함브라 궁전과 론다와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듯 다르다. 외적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풍수라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알함브라 궁전과 론다는 은밀하게 숨어 있는 지형인데 반해 톨레도는 개방되어 있다. 또한 론다와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안달루시아 지역은 이베리아반도의 남쪽에 치우쳐져 있지만 톨레도는 반도의 중앙인 카스티야라만차 평원의 언덕에 있다. 무엇보다도 타구스강의 본류가 톨레도를 감싸고 흐르면서 톨레도를 보호해주는 해자 역할을 하여 천혜의 명당수를 이루고 있다.
타구스강은 리스본에서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바로 그 강의 중상류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긴 강으로, 길이는 1,038km나 된다.
타구스강 유역
한강(494km)의 2배가 넘는 길이다.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큰 강을 끼고 있듯이 이곳 톨레도 역시 타구스강을 끼고 있다.
예천 회룡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사는 조건에는 물이 풍부해야만 한다. 그래서 風水(풍수)는 藏風得水(장풍득수)의 준말이다.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풍수이다.
안동 하회마을
이곳의 명당수는 우리나라 안동 하회마을과 예천 회룡포처럼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인 연화부수형 형국의 물이다. 물길이 명당을 감싸고 휘돌아 명당의 기운이 그대로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명당의 명당수인 셈이다.
비사그라 문
버스는 비사그라 문을 스쳐 지나간다. 비사그라 문은 톨레도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이 문의 기념비석에는 카를로스 1세 때인 1550년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펠리페 2세 때인 1575년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구시가지에 올라갔다.
골목길을 들어가는 순간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의 골목길과 모로코 패스의 골목길이 떠올랐다. 외적 방어를 위한 무어인들 특유의 건축 양식인 복잡한 골목길이다. 골목길의 골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한여름의 더위를 잠깐이나마 식혀주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도시 곳곳에는 다양한 각 시대의 유산과 문화양식이 섞여 있다. 고딕 양식의 첨탑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통치하에 유행한 이슬람양식의 무데하르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와 유대교회인 시나고그가 공존하고 있다. 그야말로 다문화 그 자체이다. 골목을 다 내려오자 톨레도 대성당이 나왔다. 톨레도의 좁은 미로는 모두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골목에서나 성당의 첨탑을 볼 수 있다.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은 톨레도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이다. 이 성당은 이슬람 왕국 시절에는 이슬람 사원이었다. 1086년 알폰스 6세에 의해 톨레도가 수복된 후에 이슬람 사원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하기 시작하여 1493년에 완공했다.
대성당에 들어서니 내부의 둥근 천정이 인상적이다. 톨레도 대성당만의 특징으로 5개의 신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정 신랑
신랑이란 성당 건물 내부에 있는 아치 기둥들 사이에 형성되는 공간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신랑은 사다리꼴인데 이곳은 삼각과 사각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톨레도 대성당은 나르시스 토메의 ‘엘 트란스파렌테(El Transparente)’와 엘 그레코의 걸작 ‘엘 엑스폴리오(El Expolio)’ 덕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엘 트란스파렌테/는 1732년에 완성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제단과 천정의 채광창 ‘트란스파렌테’라는 이름의 작품이다. 대제단의 성체현시대 뒤쪽에는 성배 등을 보관하고 있던 작은 예배실이 있었다. 이곳을 좀더 넓혀 조명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 트란스파렌테이다.
트란스파렌테
가운데를 오목하게 한 제단 모양으로 역동성을 강조했다. 중심부는 빛이 들어올 수 있게 설계하여 금색으로 장식된 섬광 조각물과 네 명의 대천사인 라파엘, 가브리엘, 미카엘, 우리엘 천사가 조각되어 있다. 트란스파렌테의 진면목은 맞은편 돔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질 때 나타난다.
트란스파렌테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리석 기둥의 조각들이 빛을 받으면 마치 살아서 움직이듯 다가온다. 천재 작가 나르시소 또매의 작품이다.
엘 엑스폴리오
엘 그레코의 ‘엘 엑스폴리오’는 성구 보관실 정면에 보이는 그림이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긴다’는 뜻의 이 성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 로마 병사가 예수의 옷을 벗기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색채 대비를 뚜렷하게 그리는 것이 특징인 엘 그레코는 그리스도의 옷을 붉은색으로 표현하여 주변 인물들과 뚜렷하게 대비시킨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온화한 표정과 예수의 옷을 벗기려는 군중들의 격분한 표정들을 비교하면서 보는 것이 포인트다. 또한 붉은 성의 위의 손은 엘 그레코 특유의 섬세함으로 그려진 것이다.
원래 이 작품은 사제의 미사복을 갈아입는 방에 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예수 뒤로 군중의 얼굴들이 더 높게 그려졌고, 왼쪽 밑에는 성서에도 없는 3명의 마리아가 등장하고, 로마 군사는 예수 시대가 아닌 중세 시대의 갑옷을 입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성당에서는 그림값을 원래의 4분의 1만 지급해 엘 그레코와 성당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베드로의 눈물
‘엘 엑스폴리오’ 옆에는 2개의 열쇠를 들고 참회하는 모습의 ‘베드로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걸려 있다. 엘 그레코는 자신의 공방 운영을 위해 대중성 있는 그림들은 복제하여 판매했다. 그중에 ‘성의의 박탈’은 16점을, ‘베드로의 눈물’은 20여 점 이상 다양하게 그렸다고 한다.
유다의 입맞춤
이곳에서 ‘유다의 입맞춤’이라는 고야의 그림도 볼 수 있다. 종교를 주제로 한, 고야의 몇 안 되는 그림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나폴리 출신 화가 ‘루카 조르다노’의 천정 프레스코화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천정 프레스코화
천정 프레스코화의 내용은 일데폰소 성인에게 제의를 내리는 모습을 주제로 삼고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상, 수많은 천사들과 인물들이 넓은 천장 공간을 채우고 있다.
성체현시대
무엇보다 톨레도 대성당의 가장 귀한 보물 중 하나는 ‘성체현시대’이다. 예수의 성체를 넣어 헌시하는 용기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18kg의 금과 183kg의 은으로 만들었다. 3m의 높이에 5,000개가 넘는 조각품으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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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성모상
또한 14세기 프랑스에서 기증했다는 ‘백색의 성모상(Virgen blanca)’은 ‘에스파냐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은 갖고 있다. 성모마리아는 주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만 백색의 성모상은 미소를 띤 채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처럼 톨레도 대성당에는 진귀하면서도 귀중한 보물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산토 토메 성당
아쉬움을 뒤로하고 톨레도 대성당을 나와 산토 토메 성당으로 갔다. 이곳은 세계 3대 성화로 평가받는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작품이 있는 곳이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1541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이다. 본명 대신 엘 그레코라 불린 이유는 본명은 발음하고 기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 인’이라는 뜻인 엘 그레코로 불렸다. 엘 그레코는 156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유학와 당대의 거장 티치아노의 제자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를 배우게 된다.
29세 때 로마에서 후원자 클로비오의 도움을 받아 추기경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미켈란젤로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심판’보다 더 좋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교황에게 제안했다가 로마 화가들로부터 비난받아 더는 로마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펠리페 2세는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수도원과 성당 그리고 묘지 등이 있는 거대한 에스코리알 궁전을 짓고 있었다. 복합건물인 에스코리알 궁전 내부에는 40여 개의 제단화가 설치될 예정이었기에 수많은 화가가 필요했다. 엘 그레코도 1577년에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화가들과 함께 마드리드로 왔다.
엘 그레코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엘 그레코 작품의 특징은 어두운 단색으로 배경을 표현하여 인물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인물들을 10등신에 가깝게 길게 그려서 눈에 띄도록 한 독특하고 파격적인 화풍이었다. 이러한 화풍은 16세기 말에 매너리즘이라는 사조로 발전한다. 후일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초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매너리즘이라는 사조가 시대가 흘러 객관성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미술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너리즘의 특징은 형태와 비율의 왜곡과 과장, 몽상적인 분위기 등으로 르네상스의 정확한 비율과 사실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려고 한 엘 그레코의 화풍은 펠리페 2세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펠리페 2세는 회화가 순교자나 성인들을 실재 그대로 올바르고 정확하게 그릴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성 마리우스의 순교’는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의 눈 밖에 난 결정적인 그림이었다.
성 마리우스의 순교
이 그림은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의 주문을 받아 그린 그림이다. 완성된 그림을 본 펠리페 2세가 “그림값을 주되 제단에 걸지 말고 창고에 두라.”고 명령하면서 엘 에스코리알 창고에 보관되었다. 종교적 전통주의를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인들은 교인들이 기도하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트렌트 공의회의 원칙과는 달리, 엘 그레코는 성인들의 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교의 순간을 그림의 중앙이 아닌 배경으로 그렸기 때문이었다.
엘 그레코는 더 이상 에스코리알 궁전 벽화 작업에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엘 그레코는 1576년 스페인의 옛 수도인 톨레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 그레코는 죽기 전까지 40여 년 동안 톨레도에서 머물며 주옥 같은 그림을 그렸다.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현재 톨레도의 엘 그레코 미술관에 그가 그린 ‘12사도의 초상화’를 비롯해 1610년대에 그린 ‘톨레도의 전경과 그림’이라는 진품 등이 전시돼 있고 톨레도 대성당에서 ‘성의의 박탈’과 ‘베드로의 눈물’을 볼 수 있다. 산토 토메로 성당에는 엘 그레코의 예술혼을 집약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 등과 함께 세계 3대 성화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그림만을 보기 위해 톨레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엘 그레코의 대표작인 셈이다.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에는 1614년 4월 7일 73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엘 그레코의 무덤과 ‘삼위일체’ ‘성모승천’ ‘세례자 성 요한’ ‘복음사가 성 요한’ ‘성 베로니카의 손수건’ 등의 제단화가 있지만 모조품이고 진품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은 성당 내부 지하에 있는데, 바닥 유리를 통해 몇 평 안 되는 작고 초라한 곳에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산토 토메 성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무덤 바로 위에 걸려 있는 그림이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그림의 공간과 현실 공간이 직접 연결되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이 그림은 1312년 오르가스 백작이 죽은 후 그의 선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산토 토메 성당의 후원자였던 돈 곤살로 루이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서 백작을 매장할 때 스테파노, 아우구스티노 두 성인이 나타나 백작의 시신을 입관하면서 두 성인이 백작의 영혼을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가 있는 천상으로 안내하고 있는 기적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살아서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덕을 쌓으면 하늘에 자리가 보장된다는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4.8mX3.6m 크기의 이 그림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아래는 현실 세계, 위는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하늘나라다. 시신의 등을 받치고 있는 어거스틴 성인의 모습에서 노년의 완숙미를 느낄 수 있으며, 부드럽게 손으로 다리를 감싸고 있는 스테반 성인의 얼굴을 통해 젊은이의 다정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스테파노, 아우구스티노
금빛 두루마기 제의에 그려진 화려한 수와 옷 주름의 표현은 미술적 기교의 절정을 보여주고 엷은 흰옷을 통해 배어 나오는 검은색은 작가의 노련미와 완숙미가 빚어낸 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혼
장례식장의 사람들 머리 위로는 영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구름 사이로 금발의 천사가 죽은 이의 영혼을 팔로 감싸면서 위로 올려주는 모습이 보인다. 엘 그레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그리면서 갓 태어난 아이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죽은 이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삼각구도
또한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의 성모마리아와 오른쪽의 세례 요한으로 이어지는 선이 푸른색이 감도는 흰색 잔영과 함께 완벽한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엘 그레코
엘 그레코 아들
이 그림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수많은 인물 중 두 사람만 감상자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인물은 엘 그레코 본인과 그의 여덟 살 아들이다. 아들의 옷 주머니에 꽂혀 있는 손수건에 아들의 출생 연도인 1578이라는 숫자를 써넣었다. 왼쪽의 횃불을 들고 있는 미소년이 엘 그레코의 아들로 검지 손가락으로 백작의 매장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스테반 성인의 머리에서 정확히 수직 선상에 있는 얼굴이 엘그레코 자신의 얼굴이다. 그 시선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엘 그레코가 이 그림을 완성하자, 화가와 성당 측은 그림의 가격에 대해 서로 다르게 주장하게 된다. 결국 그림의 가치는 1200 두까도(옛 스페인의 금화 단위)로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당측이 가격을 낮추기 위해 두 명의 그림 감정사에게 다시 그림 가격을 산정해 줄 것을 의뢰했다. 하지만 성당의 의도와는 다르게 감정사는 그림의 가치를 이전보다 400 두까도가 더 높은 1,600 두까도로 산정했다. 당시에도 그림 감정사는 상당한 안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산토 토메 성당 입구
지금은 오로지 이 그림만을 보기 위해 3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있으니 산토 토메 성당으로서는 계산 불가의 입장료 수익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세례
엘 그레코의 진가는 오랫동안 묻혀져 있다가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산토 토메 성당에서 엘 그레코의 그림을 감상하고 나오자 한여름 더위가 극성을 부린다.
이 더위를 식혀주는 것이 있다. 시원한 맥주다. 그동안 그라나다와 세비아에서 씬알콜 맥주 맛을 보아 저절로 생각이 났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씬알콜 맥주를 마셨다. 맥주의 시원한 맛은 순간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 맛은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행복은 계속 이어지기보다는 순간순간 찾아온다. 앞으로 남은 생이 순간의 작은 행복으로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일행은 관광객을 위한 꼬마열차를 타고 톨레도 구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길을 나섰다. 톨레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서 꼬마열차가 멈추었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지는 톨레도는 1597년에 엘 그레코가 그린 ‘톨레도의 풍경’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21세기에도 고풍스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엘 그레코 톨레도 풍경
엘 그레코 톨레도 전경지도
이슬람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혼재된 톨레도의 모습은, 엘 그레코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가이드가 옆으로 다가와 가장 높은 곳에 4개의 탑이 있는 큰 건물이 바로 알카사르라고 알려준다.
‘알카사르(Alcazar)’는 스페인어로 ‘성’이라는 뜻으로 도시에서 가장 높은 해발 548m 지대에 세워졌다. 로마시대에는 성 수비대까지 거느리고 있었던 관청이었다. 알카사르는 로마인들의 성벽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 건물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때는 이슬람양식으로 개축되었다. 11세기에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수복한 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탄생하게 되는데, 유명한 엘시드 장군이 이 요새의 첫 주인이라고 한다. 이후 알카사르는 왕들의 거처인 왕성이 되었다.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수도가 옮겨간 뒤에는 왕이 살지 않은 궁으로 남아 있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프랑코파의 주둔지로 인민전선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공공도서관과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꼬마열차는 다시 출발하여 타구스강에 놓인 다리 중 가장 오래된 ‘알칸타라 다리’ 앞에 섰다. ‘알칸타라’의 어원은 아랍어로 ‘교량’이란 뜻이어서 이슬람 정복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까지 그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로마시대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알칸타라 다리
기원전 193년에 로마가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톨레도를 로마 식민도시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톨레툼(Toletum)이라고 불렸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고트족이 451년 피레네산맥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이동하여 457년경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507년 서고트 왕국은 남프랑스의 아키텐을 상실한 후 톨레도를 수도로 삼았다.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711년 서고트 왕국을 공격해 712년에 톨레도를 점령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를 통치하는 아랍 세력의 중심지는 세비야와 코르도바였다. 톨레도는 코르도바의 통치를 받았다. 1035년 후마이야 왕조가 멸망하자, 베르베르계가 톨레도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국인 톨레도 타이파를 세워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1085년에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점령했다. 이후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무라비트 왕조가 이베리아 남부를 재통일 하지만 톨레도는 이슬람에 점령되지 않았다.
이곳에 거주한 유대인들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공동체를 이루어 금융, 공업, 상권을 소유하여 경제적인 부를 차지하여 그들의 문화를 꽃피웠다. 예루살렘 멸망 후 유랑하던 유대인들은 톨레도에 유대교회당(Sinagoga)을 세워 ‘서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를 정도로 번성했다. 알폰소 10세는 이 시기에 세 문화 즉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를 융합하여 독창적인 스페인 문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1492년에 레콩키스타가 완결되자 유대인들은 추방되었다.
톨레도는 1561년에 펠리프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의 유산이 공존하는 역사 도시로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특히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발달한 무데하르 양식은 톨레도를 독특한 도시로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건축물이나 고딕 건축물들에 이슬람풍의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말굽 모양 아치, 평면에 붙이는 타일 장식 등 스페인 고유의 무데하르 양식을 만들어냈다.
톨레도 성벽
톨레도의 자랑거리 중 또 하나는 톨레도의 성벽이다. 큼지막한 벽돌로 조성된 맨 아랫부분의 성벽은 로마 시대 구조물이다. 그 위 작고 촘촘한 벽돌로 이루어진 것은, 이슬람 시대 구조물이다. 더 위에 있는 성벽은 재정복 후 카스티야 왕국 시절에 지은 것이다. 이러한 성벽들로 “톨레도는 스페인 역사의 나이테”로 불린다.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는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감상하기 가장 좋은 여행지다. 톨레도를 보고 나서야 스페인의 진면목을 본 것 같았다. 바로셀로나의 가우디 작품들과 그라나다의 아람브라궁전과 세비아의 대성당보다 이곳 톨레도에 받은 울림이 더 크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면 이곳 톨레도에서 한달살이를 꼭 한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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