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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포르투갈 여행2-리스본과 지도자들의 리더십

by 황교장 2023. 2. 24.

포르투갈 여행2-리스본과 지도자들의 리더십

툭툭이는 리스본 시내가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에서 다시 내려왔다. 먼저 간 곳은 벨렘탑이다. ‘물 위에 앉은 나비’, ‘타구스강의 귀부인’으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벨렘탑

7년간의 공사 끝에 1521년에 완성된 마누엘 양식의 3층 탑이다. 아름다운 3층 테라스는 옛날 왕족의 거실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상’이 서 있다.

벨렘탑은 여러 가지 역할을 했다. 선박 출입을 감시하는 요새로, 탐험대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바다를 향하는 탐험가들이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건물이자, 돌아와 처음으로 보는 건물이기도 했다. 바다를 오고 가는 이에게 벨렘탑은 리스본의 얼굴이었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19세기 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했던 1층은 조수간만의 차이로 차올랐다 빠지는 물로 죄인들을 자연 고문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렘탑을 보고는 맞은 편에 있는 리스본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갔다. 1502년 마누엘 1세에 의해 지어진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포르투갈 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이곳은 원래 해양왕 엔리케가 세운 산타 마리아 예배당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도 역사적인 출정 전야에 이곳을 찾아 기도했다고 한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원정에 성공하자 마누엘 1세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수도원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100년 가까이 증축을 거듭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길이가 약 300m에 이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을 갖고 있다. 2층으로 설계되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건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마누엘 양식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세계에서 마누엘 양식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마누엘 양식(Manuel Style)은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재위 1495~1521) 통치기의 건축양식으로 포르투갈의 전성기인 1490년부터 1540년까지 약 50년 동안 포르투갈에서 유행하였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마누엘 양식

비틀림 기둥이나 팔각기둥, 바다를 나타내는 밧줄, 파도, 부표, 물고기, 조개 문양 장식 등이 특징이다. 고딕 건축에 바탕을 두고 이슬람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벨렝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리스본 대지진에도 살아남아 1983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둘이 리스본의 중요한 유적지이다.

포르투갈의 역사에 있어서 리스본은 가장 중심에 놓여 있다. 리스본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이 지역에 페니키아인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유물로서 확인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 중에서 아테네 다음으로 오래된 도시인 셈이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대에 로마인들은 이곳 리스본에 극장, 사원, 성곽 등의 건물들을 지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는 아리안족 일파인 사르마트족과 알란족이 잠시 지배하다가 게르만 민족인 반달족과 수에비인들이 점령하였다. 585년에 톨레도 지방의 서고트족이 지배하는 서고트 왕국에 흡수되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리스본은 711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슬람인들은 이곳에 많은 모스크와 집과 도시 성벽을 지었다. 리스본이 다시 기독교 국가의 세력에 들어온 것은 이슬람 왕국이 몇 개의 작은 왕국, 즉 타이파로 쪼개져 힘이 약해졌을 때이다.

더운 곳에 살던 아랍인들은 산악지대인 서늘한 도우로강 이북은 쓸모없는 땅이라 여겨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교도들은 도우로강을 경계로 아랍인 정복자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대서양과 도우로강이 만나는 어귀에 포르투스칼레란 마을이 있었다. 칼레는 ‘따뜻하다’는 의미다. 항구란 뜻인 ‘포르투스’와 합치면 따뜻한 항구란 의미의 포르투스칼레는 포르투갈의 기원이 되었다.

발견의 탑

9세기에 북부 갈리시아 지방의 장수 비마라 페레스(820~873)가 아랍인과 용맹하게 싸워 칼레 마을을 중심으로 독립된 공국을 세웠다. 그 뒤 11세기 들어 레콩키스타 전쟁의 선봉은 카스티아 왕국이었다. 당시 카스티아 왕 알폰스 4세의 사위인 부르고뉴 가문의 기사 엔히크 데 보르고냐(1066~1112)가 용감히 싸워 이슬람 군대를 크게 무찔러 공을 세우자 알폰스 4세는 엔히크를 사위로 삼아 1093년에 두오로 강가에서 포르투칼레 공국이 탄생하였다.

그의 아들 아폰수 1세 때인 1143년에 포르투갈은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여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1143년은 포르투갈이 독립 국가로 처음 시작된 해이다.

포르투갈은 1249년에 최남단인 알가르베 지역을 정복하고 국토회복운동이 완료되었다. 1255년에는 수도를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전하여 지금까지 수도로 이어오고 있다.

16세기는 리스본의 황금 시대였다. 유럽의 명실상부한 상업 중심지였으며, 향신료, 설탕, 직물 등 다양한 상품의 거래로 큰 부를 누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벨렝 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 등도 이 시기에 건축된 유적들이다.

리스본 대지진

18세기까지 리스본은 몇 차례의 지진을 겪었는데, 특히 1755년의 대형 지진은 수만 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도시 건물의 85%가 파괴되는 재해를 불러왔다. 이는 당시 유럽 전체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폐허가 된 리스본은 품발 후작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이를 통해 현대적인 사각형 구획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리스본은 중립을 지켜 개방된 극소수의 유럽 항구들 중 하나였다. 리스본은 미국으로 가는 난민들을 위한 주요 관문이자 안식처로 기능했다. 10만 명 이상의 난민들이 리스본을 통해 나치 치하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릭스 카페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가려던 유럽인들이 카사블랑카로 몰려온 것도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이곳 리스본으로 오기 위해서다. 영화의 주 무대인 릭스 카페는 출국비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술과 음악과 도박을 즐기며 전쟁의 아픔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휴식 장소였다.

리스본은 20세기 포르투갈 3대 혁명의 현장이기도 했다. 먼저,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포르투갈 왕정은 종식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부패한 제1공화국은 1926년 6월 6일 혁명을 통해 무너진 후에 에스타도 노보가 집권하게 된다.

세 번째 혁명은 1974년에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이다. 카네이션 혁명은 1974년 4월 25일에 발생한 포르투갈의 무혈 쿠데타이다. 4월 25일 혁명이란 이름으로 자주 불린다. 40년 이상 계속된 살라자르 독재정권과 계속되는 식민지와의 전쟁에 대한 반발감으로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혁명이다. 살라자르는 1968년에 실각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카에타누도 근본적으로 살라자르의 정책을 계승하였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은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지지 의사를 표시한 데서 비롯한다. 이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일괄 포기하였다. 군부의 과도 정부를 거쳐 투표에 의한 민간 정부로 이양된 제3공화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엔리케 왕자

포르투갈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진 역사적 인물은 항해왕 엔리케 왕자 (1394~1460)와 리스본 대지진을 슬기롭게 극복한 품발 후작(1699~1782), 카네이션 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살라자르 (1889~1970) 총리라고 생각된다. 이들의 삶과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엔리케 왕자(1394~1460)

엔리케 왕자는 동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프리카 서해안과 대서양의 섬들을 체계적으로 탐사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영토 개척과 해상교역의 기틀을 닦았다. 엔리케 왕자는 세네갈, 카보베르데,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진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아조레스 군도와 카보베르데는 후일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세우타 전투

포르투갈의 세우타 정복(1415)은 주앙 1세가 직접 장남 두아르테 왕자, 차남 페트루 왕자, 그리고 셋째 엔리케 왕자를 거느리고, 45,000여 명의 대군을 200여 대의 배로 출전했다. 포르투갈의 공격이 워낙 예상 밖이었고, 기습적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항구도시는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젊은 엔리케 왕자는 눈에 띄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엔리케 왕자의 능력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엔리케는 세우타의 아랍 상인으로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며 대서양의 남쪽으로 더 내려갈 야망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엔리케 왕자에게는 뼈아픈 실패가 있었다. 1437년 아프리카 탕헤르 원정의 실패이다. 포르투갈이 1415년 세우타를 점령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서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카라반은 세우타가 아닌 탕헤르로 향했다. 엔리케 왕자와 동생인 페르난도는 1437년 탕헤르 원정에 나섰다. 엔리케 왕자는 원래 계획보다는 훨씬 적은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세우타에서 너무 쉽게 승리하여 적을 얕보았던 것이다.

엔리케는 전쟁에서 져 이슬람 국가인 마리니드에게 항복했다. 항복 조건으로 세우타를 이슬람 국가에 넘기기로 하고, 그 이행의 보증으로 엔리케 왕자의 동생인 페르난도 왕자를 이슬람군에 넘겨주었다. 남은 부대를 이끌고 세우타로 철수한 후, 포르투갈로 돌아온 엔리케 왕자는 항복 조건이었던 세우타를 마리니드 왕국에 넘기지 못했다. 세우타 총독과 포르투갈 의회인 코르테스에서 세우타를 넘기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세우타 대신 보석금을 내고 페르난도 왕자를 구하려는 왕과 엔리케 왕자의 노력도 실패했다. 인질로 있던 페르난도 왕자는 결국 1443년 모로코 페스의 감옥에서 죽었다. 이 원정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지휘했던 엔리케 왕자는 전쟁에 지고, 적과의 조약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까지 비참하게 죽게 함으로써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결국 그를 사그레스로 낙향하여 해양 탐험에만 몰두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그레스

사그레스는 유럽 남서쪽의 끝에 있다. 이곳은 대서양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엔리케 왕자는 이곳에 성을 세워 당시 세계 각지에서 우수한 조선기사, 항해기술자, 세공업자, 탐험가, 지리학자, 천문학자들을 모아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항해와 지리적 지식을 서로 교환하고 연구했다. 사그레스 성에는 각종 기행문과 각국의 지도와 항해 관련 서적이 모두 수집되었다.

사그레스성

자료가 축적되어감에 따라 자료를 보려는 전문가들이 세계 도처에서 모여들었다. 전문가들은 세계지도를 제작하고, 항해술을 발명하고, 강력한 대양용 선박을 건조했다. 이들이 만든 지도와 배가 없었다면,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쿠 다가마도, 대서양항로를 연 콜럼버스도,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도 존재할 수 없었다. 거친 바다를 무사히 항해할 수 있는 모든 체계를 이곳에서 연구 개발을 주도한 엔리케 왕자의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리더십 덕분이었다.

항해왕 엔리케 왕자는 1460년 사그레스에서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엔리케 왕자의 석관

품발 후작

2. 품발 후작(1699~1782)

리스본은 1755년 11월 1일 진도 9의 대지진과 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화재와 해일로, 도시의 85% 이상이 파괴되고, 인구의 약 15%인 약 4만 명이 사망했다. 최근 일어난 튀르키예 지진이 진도 7,8로 지금까지 4만8천 명 이상 사망했다. 진도 9는 역대 지구상에 기록된 가장 강한 지진이다.

당시 재상이었던 품발 후작은 이를 슬기롭게 잘 극복하여 리스본을 근대적 도시로 변모시켜 오늘날에도 당시에 재건한 그 모습으로 남아있다.

품발 후작 동상

품발 후작은 왕실 귀족인 기병대장의 아들로 태어나 코임브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738년 영국주재 포르투갈 대사를 잘 수행하여 정치적 영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런던에 머물렀던 7년 동안 영국의 정치·경제·사회 현상을 면밀하게 공부했다. 1745년 리스본으로 돌아와 곧바로 빈 주재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로마 교황청 간의 분쟁 해결을 위한 중재자의 역할도 했다.

1750년 주앙 5세가 사망한 후 품발 후작은 총리가 되었다. 품발 후작은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정치를 장악했다. 주제 1세 (1714 ~1777)는 그에게 무한한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는 국내 산업을 발전시켜 활발한 대외무역과 각종 개혁정책으로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1755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만성절’ 아침,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3분여의 진동에 땅이 깊이 갈라지고 대성당이 무너졌다. 마침 꽃과 촛불, 인파로 가득 찼던 교회들이 일제히 화염에 휩싸였고, 그 불은 닷새 동안 타올랐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공포에 질려 넓은 부두로 몰려들었지만, 40분 뒤 바다가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높이 15m 해일이 순식간에 도심까지 덮쳐 그나마 남았던 모든 걸 휩쓸어버렸다.

지진으로 리베이라 궁전이 무너지면서 티치아노, 루벤스, 코레지오 같은 거장들의 미술품 수백 점과 7만 권의 장서가 소실되었으며, 바스코 다 가마를 비롯한 대항해 시대 탐험가들의 항해 기록 등 귀중한 자료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지역은 알파마였다. 바로 집창촌이다.

알파마지구

성스러운 도시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죄악으로 가득 찬 지역만이 화를 면한 셈이다. 일반 시민과 성직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다. 고도가 높았기에 지진의 충격파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쓰나미를 피하기에도 좋았다.

대지진은 물리적, 경제적 충격과 함께 유럽 사회에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유럽 전체의 종교사와 철학사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 괴테는 “그 어떤 악령도 이만큼 신속하고 강력하게 세상을 공포에 빠뜨리진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신에 대한 회의에 빠져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엄마 품에 안긴 채 짓눌려 피 흘리는 아이들은 무슨 죄악을, 무슨 과오를 범했단 말인가? 그토록 신앙심이 두텁다는 리스본이 환락 속에 잠겨 있는 파리나 런던보다 악행이 더 심했단 말인가?”

“모든 게 신이 만든 최선이라 외쳤던 철학자여, 와서 이 폐허를 보라! 신이 벌을 내렸다고 말하는 자여, 어미의 가슴에 안겨 피 흘리고 있는 저 어린것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말해보라!”

볼테르

근대 계몽주의는 이렇게 태어났다. 신의 은총만 바라는 신앙이 아니라 경험과 진리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계몽주의가 칸트 등이 계몽에 동참하면서 유럽 전역에 들불처럼 번져나간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지진이라는 비극이었다.

지진으로 왕궁마저 폐허로 변했다. 국왕 조제 1세는 마침 도시 외곽에 있던 덕에 살아남았다. 그의 최대 업적은 품발 후작을 재상으로 기용하여 전권을 다 준 것이다. 품발 후작은 지진 직후 “죽은 자는 묻고, 산 자는 잘 보살피라!”고 명했다. 그는 장례 절차를 따지는 성직자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넘쳐나는 시신을 한꺼번에 화장해 전염병을 막고, 아비규환 속에서 더욱 날뛰는 범죄자들은 모조리 공개 처형했다.

국왕은 이미 건물의 85%가 사라진 리스본을 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품발 후작은 한 달 만에 대지진에 대한 자료 수집을 완료했다. 전국의 모든 교구에 지진과 그 결과에 관한 질문서를 배부하여 돌아온 답변들은 오늘날에도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자료들로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리스본 대지진을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재분석할 수 있었다.

답변서를 토대로 재건 계획을 수립, 5년만에 도시를 새로 지었다. 건축가 에우게니오 도스 산투스의 설계에 따라 넓은 광장을 남북에 두고 바둑판 같은 도로망을 깔았다. 내진 공법을 개발하여 모든 건물에 적용하고 높이 또한 5층으로 제한했다. 흔들리되 무너지지는 않도록 설계한 건물의 모델을 세워 군대를 동원해 진동을 일으키며 실험을 거듭했다.

카르모 수도원

그러면서도 뼈대만 남은 카르모 수도원은 훗날이라도 그날의 참사를 잊지 않도록 그대로 남겼다. 대재앙 이후 다시 태어난 리스본은 후에 파리, 런던 등 여러 나라의 도시계획과 근대국가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품발 후작의 훌륭한 리더십의 결과이다.

 

살라자르

3. 살라자르 (1889~1970)

1910년에 왕정을 종식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는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에 1926년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스트 군부 정권에서 살라자르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살라자르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대학에서 성직자 교육을 받고,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 후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2주 만에 스스로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에게 맡겨진 재무장관의 권한이 너무 작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2년 뒤 오스카 카르모나 장군이 정권을 잡고는 재차 그에게 재무장관을 역임해달라고 요청했다. 살라자르는 정부 부처의 예산집행과 지출을 담당할 권한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결국 받아들여졌는데, 이것이 신의 한 수였다. 살라자르는 재무장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세금 수입을 늘리고 정부 지출을 줄이는 동시에 임금을 동결시켜 국가 재정을 짧은 시간 안에 건실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이듬해인 1929년 경제 대공황 사태 때에도 포르투갈은 경제가 급성장했다.

살라자르

 

그의 초기 경제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그의 위세와 인기는 기존 군사정권의 실세들마저 압도해버릴 정도였다. 마침내 1932년에 마흔세 살의 나이로 살라자르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의 총리가 되어 국가 최고 권력자에 올랐다. 1933년에는 ‘이스타두 노부(새로운 체제)’라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 독재 체제가 시작되었다. 독재는 1974년에 무혈 쿠데타인 카네이션 혁명으로 살라자르 정부가 붕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가 총리직에 올랐던 1930년대는 전 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모든 나라들이 공업화에 집중하여 각종 공산품들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살라자르는 다른 나라에서 산업화 직후에 발생되는 각종 사회 문제들, 즉 사회계급의 양극화, 지역 격차, 실업률 상승, 노사갈등, 파업과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 등을 경제학자의 시각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결론을 내렸다. 포르투갈은 산업화에서 탈피하여 농업국가로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대를 역행하는 너무나 황당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살라자르의 목표는 장기 집권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36년 동안 장기 집권을 달성하였다.

살라자르

살라자르가 추진한 우민화 정책은 3F로 요약된다. Futebol(축구), Fado(파두), Fátima(파티마)로 대표되는 스포츠, 대중가요, 신비주의 종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살라자르 자신이 대학교수 출신이었음에도 고등학교와 대학교 등의 고등교육기관에 공적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초등교육만은 전 국민이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의 문맹률은 3% 이하지만 기초과학과 첨단기술의 발전은 현저하게 뒤처졌다.

살라자르는 2차 세계대전 동안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취하면서 연합국 측에 지원하는 실리적인 외교를 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양측에 전쟁물자를 수출하여 얻은 막대한 수익금과 종전 이후 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으로 받은 경제지원금도 있었다. 또한 앙골라와 모잠비크 등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착취한 돈으로 본국의 경제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살라자르의 종말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 함께 시작되었다. 1968년 8월 3일,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던 살라자르는 의자에서 넘어져 땅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가 병상에 누워 있는 사이에 대통령 아메리쿠 토마스를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은 비밀리에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살라자르가 더 이상 직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살라자르를 총리직에서 제명하는 안건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켜버렸다. 일종의 의회 무혈 쿠데타였다. 그렇게 살라자르는 홀로 병실에 입원한 채로, 36년 동안 쥐고 있던 권력을 한순간에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1968년 9월 27일, 국민투표 절차 없이 아메리쿠 토마스 대통령의 지명으로 마르셀루 까에따누가 포르투갈의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 까에따누가 총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살라자르가 알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십여 년 동안 살라자르 치하에 있던 관료들은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완벽한 대비책을 완성해놓고 있었다. 신임 총리 까에따누 휘하의 관료들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을 세웠다. 살라자르 본인은 죽을 때까지 계속 자기가 총리라고 믿게 만든다는 황당한 작전이었다.

우선 정부 각료들은 살라자르가 더 이상 총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살라자르에게 배달되는 신문은 살라자르 1명만을 위해 가공된 특제 신문이었다. 살라자르가 의식을 회복한 뒤로는 측근들이 국내 지역 방문 등 총리로서의 대외활동을 빙자한 ‘연극’도 해주었다.

살라자르가 조금만 노력했다면 진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인데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간 이유는 그가 사저에만 틀어박힌 채 기자회견도 안 하고 해외순방도 안 하는 등의 폐쇄적인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가족도 없어 진실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정보를 조금만 통제해도 진실을 알기 어려웠다.

그렇게 가짜 총리직을 수행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던 1970년 7월 27일, 마침내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세상을 떠났다. 그와 평생을 함께한 가정부 마리아 여사를 비롯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눈물을 흘리며 살라자르의 장례 행렬을 따랐다. 그는 고향에 자랑스럽게 안장되었다.

살라자르가 진심으로 포르투갈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 헌신했다고 생각하는 포르투갈 국민들은 놀라우리만큼 많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살라자르가 결혼도 마다할 정도로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가톨릭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다고도 평가한다. 하지만 언론이 철저히 통제된 사회에서 자유와 민주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살라자르의 존재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살라자르는 그의 사후 37년이 지난 2007년에 포르투갈 국영방송사 RTP가 시행한 위대한 포르투갈인 설문조사에서 엔히크, 바스쿠 다 가마 등 대항해 시대를 연 세계사적 위인들이 포함된 20명의 최종 후보들 중 4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2등을 한 인물은 살라자르 정권기 반정부 인사 중 최대 거물이었던 포르투갈 공산당 당수 알바루 쿠냘이었다. 반면 라이벌 민간 방송사 SIC에서 설문 조사한 최악의 포르투갈인에서도 나란히 1위 살라자르, 2위 쿠냘이 차지했다.

살라자르는 위대한 포르투갈인과 최악의 포르투갈인 모두 1등을 차지한 셈이다. 그런데 한 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했던 살라자르가 추구했던 농업국가의 꿈은 오늘날 포르투갈이 서유럽 최저 수준의 저임금, 저물가, 저성장, 저출산, 높은 실업률, 빈약한 인프라, 서유럽 최빈국이라는 타이틀이다.

 

4. 리더십 비교

포르투갈이 가장 자랑하는 지도자로는 엔리케 왕자와 품발 후작이다. 그러나 살라자르 총리는 호불호가 나뉜다.

엔리케 왕자는 각계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연구소를 세웠다. 연구소에는 세계지도를 제작하고, 항해술을 발명하고, 강력한 대양용 선박을 건조했다. 그 결과 500년간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아 지금도 포르투갈의 모든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품발 후작은 인류역사상 최악인 진도 9의 지진을 당하고도 강력한 추진력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에 의한 의사결정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품발 후작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돋보이는 리더이다.

살라자르 총리는 대공황과 이차세계대전은 잘 극복했지만, 중농주의 정책과 우민정책으로 결국은 나라를 망치게 했다. 이는 독재정권의 전형으로 한 개인의 잘못된 의사결정 때문이다. 살라자르가 죽기 직전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옆에서 보다 못한 가정부 마리아 여사가 그에게 ‘이제 총리직을 내려놓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살라자르는 “포르투갈 국민 중 그 누구도 자기만큼 완벽하게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마리아 여사의 동정 어린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살라자르는 아직도 일부 국민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일반적인 평가는 독재자로 포르투갈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5. 리더십과 헤드십

조직을 움직이는 데는 일반적으로 리더십(Leadship)과 헤드십(Headship)으로 구분된다.

리더십의 “조직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조직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창의적인 기술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리더십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상급 관리자가 조직 내의 사람들을 강제로 움직이게 하는 헤드십과는 구분된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리더십’과 ‘헤드십’을 혼동한 채 잘못된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다. 리더십과 헤드십 모두 권위를 근거로 한다는 점은 같지만 아주 상반된 개념이다.

첫째, 권위의 근거가 다르다. 헤드십은 권위의 근거를 대통령, 장관, 국장, 회장, 사장, 상무 등 직위와 권한에 두고 있다. 그러나 리더십은 사람에 근거한다. 따라서 진정한 리더는 직위가 없어도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헤드십은 권위의 근거가 제도에 있지만, 리더십의 권위는 추종자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리더십은 자발성과 상호성을 본질로 하지만 헤드십은 강제성, 일방성을 그 본질로 한다.

셋째, 공감의 유무이다. 리더십은 리더와 추종자 사이에 강한 심리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반면 헤드십은 직권자와 부하 사이에 심리적 유대감이 없다. 따라서 진정한 리더와 추종자 사이에는 거리감이 없지만, 헤더와 부하들 사이에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넷째, 생명력의 차이다. 헤드십의 경우 조직상의 상하관계가 끝나면 즉시 없어진다. 그러나 리더십의 경우는 직위에 따른 공식적 상하관계가 없어도 리더와 추종자 사이에 심리적인 유대감이 오랫동안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