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역사 3-3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한 시기 – 3
펠리페 3세(재위 1598~1621)
펠리페 3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세 번째 왕이다. 1598년 아버지 펠리페 2세가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공주와 결혼했다. 왕의 나이 21살, 왕비의 나이 14살이었다. 그들은 결혼 기간 13년 동안에 8명의 자녀를 낳을 정도로 화목했다. 왕비가 사망하자 왕은 재혼하거나, 정부를 두지 않았고 혼외자식도 만들지 않았다. 10년을 독신으로 살다가 사망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펠리페 3세
유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는 드물게 무려 5명의 자식이 성인으로 성장하였다. 장남인 펠리페 왕자는 훗날 펠리페 4세가 되었다. 장녀인 안 도트리슈(1601~1666)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3세와 결혼했다. 셋째 딸인 아나 마리아(1606~1646)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3세는 아버지 펠리페 2세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억압하는 엄격한 종교정책을 펼쳤다. 그는 1609년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했다. 그의 유일한 장점은 악의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카라바조 그리스도의 매장
펠리페 2세는 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수석대신에게 “짐은 귀족들이 왕인 내 아들을 지배하지 않을까 걱정이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펠리페 2세의 우려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펠리페 2세가 죽자마자 데니아 후작은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국가의 최고위직에 앉혔다. 소위 총신(寵臣) 정치의 시작이었다. 데니아 후작은 국가에 필요한 개혁들을 시행하는 것보다 자기 집안을 부유하게 만들고 권력을 오래 누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599년 데니아 후작에서 레르마 공작으로 승진하여 권력이 강화된 이후에는 더 많은 재물을 모으기에 바빴다.
루벤스 레르마 공작의 기마상
펠리페 3세와 각료들은 사냥, 연극, 궁정 연회로 늘 바빴다. 외교관들은 그들을 만나서 보고하고 지시받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늘 불평했다. 레르마 정부가 단호한 태도로 추진한 정책은 모리스코(1492년 이후 무슬림에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사람이나 집단)들을 스페인에서 추방한 것이었다. 이때 스페인에서 추방된 모리스코 수는 총 30만 명 중 약 27만 5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모리스코가 추방됨으로써 아라곤과 발렌시아의 비옥한 토지들이 황폐되었다.
모리스코 추방
펠리페 3세의 통치 시기에 스페인과 갈등관계에 있던 주요 국가들인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평화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그를 ‘평화의 왕’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1598~1621) 동안 스페인의 영향력은 할아버지 카를 5세와 아버지 필리페 2세의 시대에 비해 크게 쇠퇴해 프랑스와 영국에 점차 주도권을 넘기게 되었다.
호세 데 리베라 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
그의 재위 동안 네덜란드의 북부 7개주는 네덜란드공화국을 세워 독립했다. 1602년에는 네덜란드동인도회사를 세워 아시아로 진출했으며, 향신료 무역을 둘러싸고 포르투갈과 대립했다. 에스파냐는 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 네덜란드에 패했다. 1609년 펠리페 3세는 12년 휴전협정을 맺어 실질적으로 네덜란드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레르마 공작 체제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긍정적인 업적이 네덜란드와의 12년 휴전협정이었다. 레르마 공작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당한 수완을 발휘하여 관철시킨 일이다.
바야돌리드 라모타성
펠리페 3세는 수도를 1601년에 바야돌리드로 옮겼다가 1606년에 다시 마드리드로 옮겼다. 이러한 해프닝 덕분에 현재 바야돌리드에는 호화로운 바로크 양식이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바야돌리드 두에르 강
161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를 탄압했다. 이를 계기로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펠리페 3세는 가톨릭 동맹을 지원해 평화주의는 깨지게 된다.
펠리페 3세 때 돋보이는 것은 문화 부흥이다. 문학에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이 시기 작품이다. 미술에는 리베라와 수르바란이 있다.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빛과 어둠의 뚜렷한 대비를 통한 극적인 표현, 특히 야경을 특색으로 하는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을 채택한 리베라는 벨라스케스나 고야와 같은 후배 화가들의 주된 묘사 대상이기도 했다. 수르바란은 스페인의 신비주의적 종교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이다. 그 외 희곡, 성체 신비극 등은 스페인 문화의 황금 세기를 보여준다.
수르바란 성 베드로의 환영을 보는 성 베드로 놀라스코
펠리페 3세는 1621년 3월 31일 마드리드에서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원인은 피부의 세균감염으로 인한 피부질환인 단독(丹毒)이었다. 엘에스코리알 수도원에 매장되었으며, 아들인 펠리페 4세가 왕위를 이었다.
벨라스케스 펠레페 4세
2. 펠리페 4세(재위 1621~1665)
펠리페 4세는 1605년 펠리페 3세의 장남으로 바야돌리드에서 태어났다. 펠리페 3세의 사망으로 펠리페 4세는 16살의 나이에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다.
무기력했던 선왕 때와는 달리 펠리페 4세는 주목할 만한 대외 전쟁의 승리를 거두었다. 총신 올리바레스 백작이 추진한 국내 개혁정책도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개혁 대상들의 반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처럼 정치개혁이 좌절되면서 펠리페 4세의 재위기간에 스페인은 더욱 뚜렷하게 쇠퇴해갔다.
벨라스케스 펠리페 4세 입상
1640년 카탈루냐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1635년부터 1659년까지 계속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맺은 피레네조약(1659년)으로 피레네 산맥 동부의 루시옹과 세르다냐 지역을 빼앗겼다. 1640년 포르투갈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왕정복고전쟁이 시작되면서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의 왕위를 잃었다. 1648년에 30년전쟁의 결과로 베스트팔렌조약이 체결되었다. 베스트팔렌조약의 결과 네덜란드 저지대 지방 17주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그리고 에스파냐가 지배하던 남부 네덜란드 지역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벨라스케스 사냥하는 펠리페 4세
펠리페 4세는 불과 10살이던 1615년에 프랑스 앙리 4세의 공주 부르봉의 이사벨과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이사벨과의 사이에서 2남 6녀의 자녀를 얻었으나 막내딸인 마리아 테레사(1638~1683)만 살아남아 프랑스 루이 14세와 결혼(1660년)해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훗날 그녀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를 열었다.
펠리페 4세는 1644년 이사벨과 사별한 뒤에 1649년 조카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인 마리아 안나와 다시 결혼해 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한 마르가리타(1651~1673)와 카를로스 2세(1661~1700)만 성년을 넘겼다.
벨라스케스 마르가리타
펠리페 4세는 할아버지 펠리페 2세나 아버지 펠리페 3세와는 다르게 향락을 즐긴 ‘난봉꾼’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여러 명의 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30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그중 유일하게 인정한 아들은 호세피나 칼데론 사이에서 1629년 태어난 서자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이다.
벨라스케스 로마의 메디치 정원
정치적으로 몰락한 펠리페 4세 시기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가장 빛나는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펠리페 4세는 통치자라기보다는 탐미주의자이자 문화의 후원자였다. 그는 왕실 축제와 문학, 연극, 음악 창작을 후원했다. 칼데론(1600~1681) 등 뛰어난 극작가들이 등장했다. 왕 또한 극작가들의 애호가였으며 직접 연극 작품을 쓰거나 몸소 연극배우로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벨라스케스 마르가리타 세살무렵 초상
. 당시 스페인의 연극 작품들은 국외에서도 인기를 누릴 만큼 유럽 문화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펠리페 4세는 음악 애호가로 자작곡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수천 권의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펠리페 4세는 미술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 세비아 출신의 벨라스케(1599~1660)와 화려하고 장대하며,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는 평가를 받는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1577~1640)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을 후원하면서 미술의 황금세기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왕실 미술관을 획기적으로 넓혀 약 800점의 그림을 구입하여 부엔 레티로 궁전에 비치하였다.
루벤스 삼미신
특히 벨라스케스와 펠리페 4세의 우정은 각별했다. 벨라스케스는 24살의 젊은 나이로 스페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인사위원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벨라스케스를 마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귀족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귀족의 작위를 내렸다. 왕실의 열쇠까지 받는 등 엄청난 특권을 누렸다.
펠리페 4세 기마도
벨라스케스가 1625년에 왕의 명령으로 그린 기마도는 펠리페 4세의 위풍당당한 자태와 함께 배경에 자연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기마도를 본 선배 궁정 화가들은 이를 비난했다. 당시만 해도 초상화에 배경으로 자연 풍경은 지양해야 하는 것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벨라스케스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이에 노화가들이 공격한 것이었다. 벨라스케스는 화를 내며 자신의 그림에서 서명을 지워버리고 라틴어로 “Didacus Velazquius, Fictor Regis, expinxit.”라고 적었다. 직역하자면 “디에고 벨라스케스, 왕의 화가, 내가 그렸다.”라는 뜻이다. 대단한 자부심이다.
왕과 대중의 반응은 노화가들의 비판과는 달랐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본 대중과 궁정의 사람들, 특히 펠리페 4세는 기마도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펠리페 4세는 이 그림에 거액을 주고 동시에 같은 액수의 교회 연금 혜택도 약속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가 외교 임무를 띠고 외국으로 떠나있던 동안에는 다른 궁정 화가들이 펠리페 4세 자신은 물론이고 왕실 가족의 초상화도 그리지 못하게 하였다.
벨라스케스 시녀들(1656년)
미술 평론가들과 화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회화로 선정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1656년)’은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의 초상화이다. 마르가리타는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의 부인이 되었다. 이 그림은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받으며 모네, 마네, 드가, 고야, 달리, 피카소 등이 재해석하기도 했고, 예술가뿐 아니라 비평가, 기호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탈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등에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기도 했다.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또한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1574~1655)는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에 갔을 때 로마 교황의 요청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교황은 매우 까다로운 성품으로 성격이 급하고 자신의 일에는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다. 이 작품에서 당시 75세의 인노첸시오 10세는 교황의 공식복장을 하고 있다. 정결하게 빛나는 붉은 모자와 순백의 레이스로 장식된 법의와 붉은색의 휘장과 금장 장식 의자가 지상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은 교황과 너무도 닮아 회당 안에 걸어둔 이 초상화를 보고 실제로 교황이 앉아 있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자유롭고 거친 붓터치와 선이 아닌 색채와 빛을 통해 사물의 형태를 표현한 그의 화법은 19세기 사실주의 화가와 그 이후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특히 마네는 “나는 나의 회화적 이상을 벨라스케스 안에서 발견하였다”고 말하였다.
벨라스케스가 펠리페 4세를 만난 인연과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를 만난 인연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귀인을 만나면 대운이 열린다. 벨라스케스도 자기의 진가를 알아주는 펠리페 4세라는 귀인을 만나 승승장구하여 죽을 때까지 불멸의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다.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의 미술품을 수집하게 했다. 이때 수집된 작품들은 오늘날 스페인의 프라도미술관에 보존된 핵심적인 작품들이다.
루벤스 농부들의 춤
이처럼 펠리페 4세의 문화적인 안목과 재능은 탁월했지만, 정치적 의지나 능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펠리페 4세는 이질로 추정되는 병으로 1665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해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 안치되었다. 그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가 에스파냐의 왕위를 이었다.
카를로스 2세
3.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
펠리페 4세의 뒤를 이은 카를로스 2세는 네 살 때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불구였다. 모후 마리아가 10년간 섭정하였다. 이 기간 중 네덜란드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궁정 내의 음모로 고통을 받는 등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하였다. 1675년에 친정이 시작되어 이복형인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1629~1679)를 중용하였다.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그는 펠리프 4세의 서자로 시칠리아 총독이 되었으며, 카탈루냐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 중인 플랑드르 사령관이 되어 뛰어난 용기를 보였으나 1658년 뒨전투에서 프랑스군에 패하였다. 1677∼1679년에는 카를로스 2세에게 중용되어 수상을 지내다가 갑자기 죽었다. 동양 같으면 서자라도 왕이 되었을 것인데 좀 아쉽다.
카를로스 2세는 친정시대에도 루이 14세의 침략정책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첫 전쟁(네덜란드 전쟁)은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는 마리아 테레사 데 아우스트리아(자신의 부인)의 소유”라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루이 14세가 일부 국경 지대를 통합하고 스페인과 평화 조약(네이메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루이 14세
루이 14세의 팽창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1674년 동맹을 결성했던 네덜란드, 스페인, 오스트리아는 1684년 프랑스가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자 2차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스페인은 1684년 8월 레겐스부르크에서 맺은 휴전 조약을 통해 코르트레이크와 딕스뮈드는 돌려받았으나 스트라스부르크를 프랑스에 20년간 양도하였으며, 저지대 국가 방어에 핵심 요충지인 룩셈부르크를 완전히 포기했다.
마리아나 루이스 왕비
1688년에 일어난 3차 전쟁에서는 스페인은 프랑스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항하여 합스부르크 동맹을 체결하여 싸웠다. 그 결과 프랑스는 일부 영토를 양도하는 대신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1689년 프랑스 스파이 혐의까지 받던 프랑스 출신의 마리아 루이스 왕비가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연대에 맞서서 플랑드르와 카탈루냐를 공격하면서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은 캄포르돈과 우르헬을 잃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관대하게 마지막 전쟁에서 점령한 땅을 모두 돌려주었을 뿐 아니라 이전에 점령한 스페인의 영토 일부도 돌려주었다. 왜냐하면 모든 유럽이 후계자가 없는 카를로스 2세 사후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2세
후세가 없던 카를로스 2세는 이미 1696년의 유언장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바이에른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적시해놓았다. 그러나 1699년 2월 페르디난트가 7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카를로스 2세의 유언장은 취소되었다. 이제 스페인의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이나 부르봉 가문의 필리프 중 한 명에게 계승될 상황이 되자 두 가문의 대립은 첨예해졌다.
카를로스 2세와 왕비
카를로스 2세는 사망하기 한 달 전인 10월 11일, 필리프를 후계자로 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 유언장에서 왕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위를 공동으로 맡지 못하도록 명시함으로써 스페인이 프랑스에 흡수되는 것을 막았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는 40세 생일을 닷새 남겨놓고 죽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을 통치한 184년간의 시기가 끝이 났다. 카를로스 2세는 선왕들의 시신이 있는 에스코리알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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