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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모로코 여행5-쉐프샤우엔(Chefchaouen)

by 황교장 2023. 1. 24.

모로코 여행5-쉐프샤우엔(Chefchaouen)

 

페스를 나와 모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로 알려진 쉐프샤우엔으로 향했다. 쉐프샤우엔은 ‘모로코의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곳이다. 버스는 곧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가고 있다. 육칠십 년대 우리나라 시골길과 비슷한 느낌이다. 목축과 농사를 같이 한다.

작은 언덕은 목초지로 잘 정돈되어 있고 넓은 들판에는 곡식들을 수확한 흔적인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 마을들이 나타났다가는 스쳐 지나간다. 인적없는 허허벌판이 평화롭다. 페스의 복잡하고 정신없는 골목길과는 다른 풍경이다. 페스의 복잡함과 농촌의 단순하고 목가적인 풍광을 대비하면서 다시 상념에 빠져본다.

두 눈이 저절로 감겨 잠깐 졸았다가 깨어나니 휴게실이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다. 기온이 섭씨 47도다. 2018년도 실크로드인 둔황에서 45도는 경험했지만 47도는 난생 처음이다. 더위를 잠시라도 잊게 해 주기를 바라면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는  다시 출발했다. 주변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해발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올라가자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얼핏 보아서는 칼데라 호수를 연상하게 하는데 네이버 지도에는 ‘El Wahda Dam’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댐의 입구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연 호수로 보였다. 차는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험한 곳으로 달리고 있다. 험준한 이곳은 리프산맥의 일부이다.

버스는 가파른 길을 먼지를 만들면서 올라간다. 고갯마루에서 잠시 버스가 섰다. 멀리서 쉐프샤우엔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뷰 포인트였다. 두 개의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온 지맥에 파란색과 흰색으로 된,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쉐프샤우엔은 리프산맥의 일부인 티소우카(Tisouka,2,060m)산과 메고우(Megou,1,616m)산의 모습에서 유래한다. 두 개의 산봉우리가 마치 염소의 두 뿔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쉐프샤우엔의 쉐프(chef)는 베르베르어로 ‘보다’라는 뜻이고 샤우엔(Chaouen)은 베르베르어로 ‘뿔(chouoa)’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쉐프샤우엔은 ‘뿔들을 보라’라는 의미다.

설명을 듣고 마을의 배경이 되는 산을 보니 정말 염소 뿔처럼 보인다. 뷰 포인트에서 급히 사진을 찍고는 버스는 다시 달려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갔다. 골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이다. 골목 형태와 집들의 모습은 다르지만 파란색으로 칠해졌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다른 듯 비슷한 쉐프샤우엔의 골목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471년 아실라와 탕헤르가 포르투갈에 점령되자, 경각심을 느낀 이드리스 왕조의 후예가 포르투갈에 대항할 요새 도시로 처음 건설되었다. 이후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패퇴한 무슬림들과 가톨릭 세력에 의해 쫓겨난 유대인들이 이주하면서 도시는 번성하게 된다.

이곳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건축문화와 모로코 베르베르족 스타일이 결합된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얀 집에 작은 발코니, 주황색 지붕을 얹고, 마을 곳곳에 오렌지 나무를 심었다. 마치 그들의 고향인 안달루시아 전체를 옮겨놓은 것처럼 만들었다

. 창문과 문에만 이슬람을 대표하는 색깔인 초록으로 장식한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온 도시를 파랗게 칠하면서 유명해졌다. 골목길과 계단, 대문, 지붕, 심지어 길거리의 택시들까지 전부 다 파란색이다. 이것이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라고 한다.

해발이 600미터 이상이고 한낮도 지난 시간이었지만 7월의 더위는 걷기가 힘들 만큼 매서웠다. 마침 골목길에서 오렌지를 생즙으로 짜서 파는 노점상을 만났다. 모로코 오렌지가 유명하다더니 갓 짠 상큼한 오렌지 향이 더위를 잠시 식혀준다. 푸른 골목길에 자리 잡은 500년 역사의 빵집과 숙소 ‘리아드(Riad)’는 동화 속 풍경 같아 가이드는 이곳에서 다들 인생사진을 건져간다면서 우리들에게도 사진 찍기를 권한다.

골목은 시간을 반영하듯 일정하지 않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곳도 있다. 좁은 골목, 작은 문, 작은 창문, 골목길을 올려다보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골목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하늘도 파랗고 벽도 파랗다. 자연의 색과 인간의 색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있어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맑고 푸르다.

좁은 골목의 높은 파란 벽은 뜨거운 여름 햇살을 막아준다고 한다. 외적도 막고 햇빛도 막아주는 다용도로 사용되는 메디나의 구조를 이해할 것 같다. 가이드 덕분에 운좋게 한 집의 내부를 볼 수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집안도 그 푸른 빛으로 되어 있어 마치 바다에 빠진 듯하다. 기분으로도 시원하고 실제로도 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푸른색이 한다고 한다.

푸른 골목을 빠져나오니 우타 엘 하맘 광장(Placa Uta El Hamam)이다. 광장에는 커다란 소나무를 중심으로 ‘성채’라는 의미의 카스바(Kasbah)와 이슬람 사원이 있고 그 앞에는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점은 문이 닫혀 있다. 명절이라 저녁을 먹을 식당을 아주 힘들게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페스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막히지 않아 무려 한 시간 이상 일찍 도착했다. 식당의 예약 시간이 남아서 한 시간을 광장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광장 벤치에 앉아 있으니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 다섯 번 성지인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데 반드시 다음과 같은 구절로 기도를 시작하고 끝을 낸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이 구절은 이슬람 핵심 교리로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이 될 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는 것은 ‘예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라는 뜻이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는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고로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뜻이다. 이슬람의 핵심은 예수의 신격을 부정하는 데 있다.

711년 지브롤터를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온 이슬람군은 7년만에 북서 산악 지대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불과 7년만에 점령한 데 1등 공신은 유대인이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서고트 왕국의 국교가 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이슬람군이 쳐들어오자 유대인은 적극 환영하고 협조했다. 이슬람군은 유대교를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73년에 끝까지 저항하다 로마군에 패배한 유대인 대부분이 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로 흩어져 나간 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 분산)’라고 한다. 유대인이 이베리아 반도에 건너온 것은 120년경이다. 유대인들은 여러 지방, 여러 민족을 접해보았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밝고 여러 언어에 능통해서 어느 곳에 가든 재물을 관리하거나 번역, 통역, 의사, 법률가, 은행가 등 소위 지식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1492년 그라나다의 함락으로 무슬림과 유대인은 함께 추방당해 이곳 쉐프샤우엔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무슬림과 유대인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같은 형제에서 이어진 종족이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모두 셈족이다. 둘 다 셈족의 족장인 아브라함을 숭배한다. 셈족의 지도자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새 여자를 얻으라고 권했다. 새 아내가 된 여인은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었다.

하갈이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 사라가 아이를 가졌다. 이 아이가 바로 이삭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큰아들이었지만 몸종의 몸에서 태어났고, 이삭은 작은아들이지만 본처인 사라가 낳아 정통성이 있었다. 결국 이스마엘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아브라함을 떠나 새 종족의 지도자가 됐는데 이스마엘의 자손이 바로 아랍인이고, 이삭의 자손이 유대인이다. 결국 아랍인과 유대인은 배다른 형제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이 성서에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했다는 가나안 땅이었다. 구약성서에서 이 땅은 요르단 서쪽인, 지금의 이스라엘 지방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후예가 그 땅을 영원히 소유케 하겠다고 신이 약속했다는데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소유하길 원했지만 신은 가나안 땅을 이삭에게 약속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이스라엘을 건국한 것에 대한 구약성서의 근거인 셈이다.

기원전 2,000년경 메스포타미아를 떠난 셈족은 팔레스타인 지방에 자리를 잡아 왕국을 세웠다. 그런데 이집트 군대가 유대인을 모조리 노예로 끌고 가버렸다. 뒷날 모세가 유대족을 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가르고 신이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유대족은 북쪽엔 이스라엘왕국을, 남쪽엔 유다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기원전 722년 동방의 아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고, 기원전 586년엔 유다왕국도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했다. 유대족은 기원전 538년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간 바빌로니아의 노예생활을 하는데 이를 ‘유대족의 바빌론 유수기’라고 한다.

기원전 538년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유일신교인 유대교를 정립했다. 즉 ‘신은 야훼 한 분이시다. 유대민족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 인류의 종말이 오고 신은 메시아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폐쇄적인 교리와 선민의식은 예수에게 맹렬히 공격을 당해 개혁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복자인 로마의 힘을 빌려 예수를 처형당하게 했다. 구세주로 믿는 예수를 죽게 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전 기독교 세계의 미움을 받는 원인이 된 것이다.

예수가 처형된 지 40년도 안 된 서기 67년에 점점 거세지던 기독교 세력에 불안을 느낀 로마의 네로 황제는 대대적인 기독교도 소탕 작전을 벌였고 그 결과 수많은 기독교도가 순교했다. 로마군대는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로마의 종교를 거부하고 유대교를 지키려는 유대인도 탄압했다. 수도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인 성소마저 태워 없애버렸다. 이때 허물어지고 남은 일부의 벽이 이 비극을 보고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통곡의 벽’으로 유대인들의 성소 중 하나이다.

통곡의 벽

당시 약 1,000명의 유대인들이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73년 로마가 이 요새를 함락했을 때 유대인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생존자는 여인 2명과 어린아이 5명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쫓겨난 땅에는 아랍인들이 들어와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디아스포라 됐다. 서기 134년에 완전히 쫓겨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1,800년을 떠돌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건국은 비교적 잘 지내던 아랍인과 유대인을 철천지원수로 만들어 버렸다.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은 유대인 600만 명을 살육했다. 이 폭거에 충격을 받은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에 시오니즘(유대인을 독자적인 민족으로 보고, 유대인 차별ㆍ박해의 궁극적 극복을 유대인 국민국가의 건설로 달성하려는 운동)에 의거한 신생 유대국가인 이스라엘의 독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국토를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팔레스타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아랍 여러 국가는 유엔의 승인을 거부하여, 이스라엘과 아랍 여러 국가의 영토분쟁으로 인한 전쟁상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중동국가를 여행할 때 여권에 이스라엘에 간 기록이 있으면 입국을 불허한다.

그런데 이곳 쉐프사우엔의 무슬림과 유대인은 공존하며 평화롭게 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평화롭게 보이는 이곳 쉐프샤우엔에도 비극의 역사는 있다. 리프전쟁의 중심지인 이곳에는 당시의 스페인군의 숙영지가 남아 있다.

스페인군 숙영지

리프전쟁은 1921년~1926년에 있었던 스페인-프랑스 대 모로코 베르베르족이 세운 리프 공화국 간의 전쟁이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와 필리핀 등을 잃고 마지막 남은 아프리카 식민지라도 지키고자 했다. 전 모로코를 식민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는 데는 성공한다. 이후 스페인령 사하라와 스페인령 모로코 식민지를 설치하고 모로코 왕국에 정치적인 간섭을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모로코인들과 베르베르족은 몇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한때 리프 부족군의 대승에 반스페인 운동이 크게 일어나 주변 부족들과 모로코인들이 열정적으로 리프에 가담하여 리프군은 8만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성장했다. 리프 부족은 1920년 9월 18일 리프 공화국을 세우고 아브드 엘크림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프 공화국은 서구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지던 소련으로부터 국가로 승인받아 물자 원조를 약속받는 등 국가로서의 체제를 신속하게 갖추어 갔다.

스페인은 대공세로 전환했지만 셰프샤우엔 전투에서 또다시 대패하고 모로코에서 전면 철수해야 하는 위기로 몰리게 된다. 스페인과 리프 공화국 간의 전쟁을 관망하던 프랑스는 예상외로 스페인이 대패하고 고전하자 프랑스령 모로코와 프랑스령 알제리에도 이 같은 반식민지 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1924년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돕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브드 엘크림대통령은 1925년 프랑스령 모로코를 공격하여 프랑스측에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는 스페인과 함께 대규모 병력을 총동원하여 최첨단 탱크, 항공기까지 동원하였다. 그래도 리프 공화국군이 격렬히 저항하자 독가스 공격도 퍼붓는다. 1925년 9월, 스페인군은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개시하여 리프 공화국군을 분쇄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 외인부대 병력은 리프 공화국군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이때 겨자가스 공격으로 다시 리프군을 격퇴한다. 전력을 소진한 리프 공화국군은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결국 1926년 5월 아브드 엘크림은 원래의 적이던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무장해제에 응했다. 프랑스 정부는 점령한 모로코 지역에 대해 스페인의 지배권을 인정했지만 아브드 엘크림을 넘기라는 요구는 거절하고 그를 레위니옹 섬에 유배시켰다. 막대한 희생을 낸 리프 전쟁을 끝으로 모로코는 사실상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아브드 엘크림은 1947년 프랑스로 연행되는 도중 이집트에서 탈주, 그곳에서 북아프리카 해방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6년 모로코 독립 후에도 이집트에 머물며 모로코 왕제(王制)를 비판, 귀국을 거부하다가 1963년에 죽었다.

이처럼 슬픈 역사를 가진 쉐프사우엔, 지금은 모로코에서 가장 예쁜 골목길, 인디고 블루와 화이트의 대비가 눈부신 빛과 색의 마을, 스페인과 모로코 스타일의 행복한 만남, 지중해의 물빛을 닮은 마을 등 온갖 수식어가 뒤따르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모로코의 전통 요리로 저녁을 먹고는 늦은 시간에 세우타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