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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포르투갈 여행3-호카곶과 파티마

by 황교장 2023. 3. 1.

포르투갈 여행3-호카곶과 파티마

리스본을 나와 호카곶(카보다로카)으로 향했다. 리스본 중심을 벗어나 해안선을 따라 아기자기한 언덕길을 달린다. 차는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다가 전망이 확 트인 곳에 멈추었다. 직감적으로 호카곶임을 알 수 있었다. 곶(串)은 바다 쪽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를 말한다. 우리나라도 장산곶, 호미곶, 간절곶 등이 있다. 이곳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호카곶에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은 강하지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걷기가 좋다. 파도는 해안 절벽에 부딪혀 크게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가까이 있는 물빛은 에메랄드빛이지만 먼바다로 갈수록 검은색에 가까운 검푸른색이다. 옛사람들이 저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무섭게 느껴졌다. 산책로 끝 절벽 위에 십자가 탑이 있다. 이 탑에는 “여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Onde a terra acaba e o mar começa)”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세상사는 시작과 끝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삶의 시작인 생일과 그 끝인 죽음을 기념하는 기일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게 여긴다. 이곳 호카곶도 땅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호카곶을 나와 파티마로 향했다. 파티마는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로 알려져 있다. 파티마로 가는 길은 4차선 고속도로로 교통체증 없이 아주 잘 달린다. 포르투갈만의 특색있는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스쳐 지나가는 농촌 마을은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독재자 살라자르의 농업정책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멀리 흰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오고 있다. 한여름에 난 산불이다. 특히 올해는 유럽에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상기온으로 산불이 많이 발생하고 강물이 거의 다 말랐다.

차는 고속도로를 지나 꼬불꼬불 힘든 고개를 넘어간다. 제법 험준한 산악지역이다. 고갯마루에서 보이는 분지에 파티마가 자리하고 있다. 배산임수와 사신사인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뚜렷하다.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성당 입구가 있다. 호텔에 짐을 두고 곧장 파티마 성당으로 향했다. 올리브 나무가 늘어선 숲을 지나자 광장이 나왔다. 광장 양 끝에는 파티마 대성당과 성삼위일체 성당이 있고, 중간에 성모 발현 예배당이 있다.

파티마 대성당은 ‘로사리오 바실리카’로 불린다. 이 성당은 성모 발현을 기념하기 위해 교황청의 명으로 지었다. 바실리카는 ‘대성당’으로 등급이 높다. 대성당은 1928년 5월에 건축이 시작되어 1953년 10월에 완공했다. 2007년에 완공된 성삼위일체 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8천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넷째로 큰 성당이라고 한다. 성당 공사비 8천만 유로는 전 세계 순례자들의 헌금이라고 한다.

조그마한 시골 마을인 파티마가 유명해진 것은 성모 발현 사건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5월 13일,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가 양을 돌보던 3명의 어린이 루치아(당시 나이 10세), 하친타(7세), 프란시스코(9세) 앞에 나타나 앞으로 5개월 동안 매월 13일 이곳에 나타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이후 10월 13일까지 출현한 마리아를 세 어린이뿐만 아니라 약 7만 명가량이 목격했다.

마리아는 세 어린이에게 인류 운명과 직결된 세 가지의 예언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파티마에서의 마리아 출현은 1930년 10월 13일 레이리아 주교가 공인하였다. 이어 로마 교황이 확인하여, 1953년 이곳에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해마다 수십만 명의 참배객이 모여들고 있는 곳이다.

당시 성모 마리아를 만난 세 아이 중 두 아이는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이 두 아이는 성모 발현 100주년이던 2017년 5월 13일에 시성이 되었다. 이는 가톨릭 역사상 어린아이가 순교하지 않고 성인이 된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치아는 평생 수녀로 살다가 2005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세 아이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루치아의 회고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는 빛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늘고 섬세한 손에는 묵주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세 가지의 예언을 들려주고, 회개를 위해 고행을 할 것을 당부했다. 고행은 낮 동안 굵은 밧줄로 몸을 묶고, 더운 날에도 물을 마시지 않으며,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묵주 기도를 드리는 것 등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3번째로 나타난 9월 13일 이후, 아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 더 큰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다음 달인 10월 13일에는 아이들의 말을 확인하려 신문기자를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파티마에 몰려들었다. 그날 날씨는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억수같이 퍼붓다가 오후 1시경에 갑자기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물러갔다.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와 묘한 은빛 원반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태양은 빠르게 회전하면서 여러 가지 색깔의 광선들을 발산하며 지상을 물들였다. 태양은 지상을 향해 기울어졌다가 지그재그 모양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반면에 태양에서 다채로운 빛을 목격했지만, 그 외에 특별한 현상은 목격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당시에 찍힌 사진에서도 태양에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때 태양을 관측 중이던 과학자들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UFO 목격담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태양이 빠르게 회전하고 형형색색의 광선을 내뿜으며 지그재그로 움직였다는 점과 태양의 이상 현상을 파티마와 그 인근 외에선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한낮에 UFO가 나타나 그것을 목격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의 관심은 성모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말했다는 세 가지 예언에 쏠렸다. 루치아에 의하면 첫 번째 예언은 지옥에 대한 환영이었다. 두 번째 예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공산주의의 등장과 확장 등에 관한 예언이었다. 문제는 세 번째 예언이었다. 세 번째 예언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계속되자 2000년 교황청에서 세 번째 예언을 발표했다.

세 번째 예언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저격 미수사건을 예언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있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암살미수 사건은 1981년 5월 13일에 발생했다. 이날은 파티마의 성모가 처음 발현한 지 74주년이 되는 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각에선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저격 미수사건이라면 왜 이제서야 공개하느냐는 점이다, 예언의 흐름으로 첫째 ‘예언’과 둘째 ‘예언’이 세계적인 사건인데 셋째 ‘예언’은 교황의 암살미수일 리가 없다는 설도 있다.

파티마가 유명세를 받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발현에 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가톨릭·동방교회 등에서는 성모(聖母) 또는 성모 마리아라고 존칭한다. 천사의 계시로 처녀로 잉태하였다. 초대 교회 때부터 성인(聖人)으로 공경받아 왔으며, 구세주의 어머니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갈릴리 지방 나자렛 마을에 살았다. 목수 요셉과 혼약하였으나 천사의 계시로 처녀로 잉태하였다. 출산이 임박하여 헤로데왕의 호적 일제조사 명령이 내려 베들레헴으로 갔으나 숙소를 잡을 수 없어 교외의 동굴 안에 있는 마구간에 들었다가 거기서 예수를 낳았다. 그런데 헤로데가 베들레헴에 장차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고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의 이야기를 믿고, 이 영아를 죽이려고 했다.

죽음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후에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그리스도가 30세가 될 무렵까지 나사렛에서 보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처형되자 그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가톨릭의 교의에 의하면 마리아는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이것을 ‘성모승천’이라고 한다. 가톨릭에서는 ‘여인들 중 가장 복되신 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크게 공경한다. 정교회 역시 성모 마리아를 크게 공경한다.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중세 때 흑사병을 그리스도의 징벌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시작되었다. 신자들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자애로운 성모로 인식하였다. 그리스도는 엄격한 심판자로, 마리아는 자비로운 어머니로 이해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기보다는 기적을 청하는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18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여 하느님의 사적 계시를 전해주었다는 보고가 잇달아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이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더욱 확장시켰다.

성모발현은 성모 마리아가 사람들 앞에 나타난 사건을 일컫는다.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은 가톨릭, 정교회 신자거나, 성모신심이 있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간혹 신자가 아닌 경우도 있다.

각 지역에서 나타나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그 지역의 주교와 교황청의 인증 작업을 거쳐 비준하는데, 이 기준은 그 발현이 의미하는 바가 교회의 교리와 합치하느냐 아니냐가 크게 좌우된다.

또한 발현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지역마다 모습이 다른데, 이는 민족과 문화가 크게 좌우된다. 대표적인 예로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는 전형적인 멕시코 원주민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성모 발현에 대한 수많은 보고가 있었지만 교황청에서 인정한 성모 발현은 다음의 10번이다.

멕시코의 과달루페(1531년), 프랑스 파리의 뤼 뒤 박(1830년), 프랑스의 라 살레트(1846년), 프랑스의 루르드(1858년), 프랑스의 퐁멩(1871년), 아일랜드의 녹(1879년), 포르투갈의 파티마(1917년), 벨기에의 보랭(1932년), 벨기에의 바뇌(1933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1945년)이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메주고리예의 성모 발현은 아직 조사 중에 있어서 최종 결정이 유보된 상태다.

이들 10곳을 살펴보면 스페인의 초기식민지 때에 발현한 과달루페를 제외하면 1800년대 이후에 성모가 발현했다. 역사적으로 크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경에는 예수의 형제로 야고보, 유다 등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들이 예수의 형제들인지 친척인지를 놓고도 해석이 갈린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는 영원한 동정녀이기에 친척 혹은 이복형제로 본다. 개신교에서는 통상적으로 동복형제로 간주한다.

개신교에서는 마리아를 평범한 인간으로 본다.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에서는 예수의 형제들은 당연히 예수를 낳은 후 요셉과 마리아가 동침해서 낳은 자식으로 보고 있다.

이슬람에서도 마리아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꾸란에는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는 성모의 수태와 성장, 예수의 어린 시절 같은 이야기들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자인 예수와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겸손함과 신에 대한 복종, 그리고 기적들을 찬양할 뿐 예수의 신성화나 성모 신심에 대해서는 분명한 메시지로 경계하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악의적이다.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서술이 너무나도 많다. 요약하면 마리아는 성적으로 문란한 여인이었고 성전에서 베를 짜는 일을 하다 마침 지나가던 ‘판테라’라는 로마군 백인대장을 유혹해서 가지게 된 것이 예수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천주교와 개신교와 이슬람과 유대교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확연히 다르다.

종교는 지역과 민족, 환경에 따라 다르고, 시대와 필요에 따라 변화하고 분열한다.

종교의 이러한 속성을 모르면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오해하거나 곡해하기 쉽고, 그로 인한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종교를 모르면 문화도 전통도 이해하기 힘들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는데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며, 다양한 인간의 삶을 고찰하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불안, 자연에 대한 신비감에서 해방될 수 없다. 따라서 위대한 힘, 절대적인 존재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마음이 곧 절대자, 위대한 힘에 대한 믿음, 즉 신앙으로 나타난다. 신앙이 체계화되고, 의식화되어, 제도화되면 이를 종교라고 한다.

종교는 믿음을 담는 그릇이다. 믿음을 담는 그릇은 종교마다 그 크기와 색깔이 다르다. 다른 것을 인정해주면 된다. 그런데 내가 믿는 그릇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다른 그릇을 깨뜨려서는 안된다. 내 그릇이 소중하면 남의 그릇 역시 소중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종교분쟁은 자기 그릇만 소중하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인들은 남을 이해하는 관용의 마음으로 그릇을 키워야 할 것 같다.

가톨릭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성모 발현을 믿기 어렵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미신이라고 폄하하지 않겠다. 남의 종교는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의 종교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가슴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아직까지 종교를 가슴으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또한 나의 한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