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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70 청년 초등 동창생들과 함께 한 동해안 여행-1

by 황교장 2023. 4. 29.

70 청년 초등 동창생들과 함께 한 동해안 여행-1

 

경남 창녕군 유어초등학교 38회 동기생들의 칠순 잔치 여행을 2023년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2박 3일간 삼척 솔비치 리조트에서 진행하였다.

2014년 제주도에서 회갑 잔치 여행을 한 후 9년 만에 다시 한 잔치 여행이다. 오전 10시에 장안 휴게소에서 부산지역 친구들 10명이 모였다.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3년이란 세월이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60대에서 7자를 단 70대란 호칭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70대라고 하면 노인이다.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니 아직 70대 청년이다. 지금은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의학이 발달하여 현 나이에 0,7을 곱한 나이가 과거 우리 부모 세대의 나이와 같다고 한다. 아직도 40대인 49세이다. 외형적으로도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친구들의 표정은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웃는 얼굴은 사라지고 항시 화가 난 표정으로 변한다. 눈꼬리도 쳐지고, 입도 처져 마귀할멈, 심술궂은 할아범으로 변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저 방실방실 웃고 있어 어릴 적 모습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는 다시 출발하였다. 영덕 삼사 해상공원에서 창녕에서 출발한 친구들과 합류하여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들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한다. 겉으로는 부부관계인 것 같은데 오고 가는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시골 초등학교 동기생들의 칠순 잔치 여행을 가고 있다고 하자, 그제야 이해가 된다면서 너무 좋겠다며 부러워한다.

즐겁게 점심을 먹고는 다시 출발하여 물빛 좋은 망양정 휴게소에 잠깐 들렸다가 삼척시 갈남마을의 해신당에 들렀다. 옛전에는 해신당만 잠깐 구경하고 지나간 곳인데 지금은 공원을 조성하여 입장료도 받고 있다.

이 해신당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신화가 있다. “옛날 삼척 갈남마을에 서로 사랑하는 처녀, 총각이 살았다. 어느 날 처녀는 미역을 따기 위해 사랑하는 총각의 배를 타고, 미역이 많이 붙은 바위로 갔다. 총각이 처녀를 바위에 내려 주고 돌아왔는데, 갑자기 바다에 풍랑이 일어 미역을 따던 처녀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처녀는 살려 달라고 외치며 애를 쓰다 끝내 죽고 말았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처녀가 살려고 애쓰다 죽은 바위를 ‘애바위’라고 불렀다. 처녀가 죽고 난 후부터 마을에는 계속된 흉년에 고기도 잡히지 않고, 마을에는 기근과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이 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의 꿈에 죽은 처녀가 나타나 자기가 처녀로 죽었기 때문에 억울하니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서낭당을 짓고 제를 지냈으며,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나무로 깎은 남근(男根)을 제물로 바쳤다. 그 후로 마을에는 고기가 다시 많이 잡혔고,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나가도 사고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신화는 신벌·현몽·원혼·영험 네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화의 주인공은 죽은 후 마을에 흉어와 기근을 가져오고(신벌), 마을 노인의 꿈에 나타나서(현몽), 처녀로 죽은 억울함을 호소하며(원혼), 남근을 제물로 바침으로 마을에는 풍어와 안녕을 가져왔다(영험)는 것이다.

보통 여성들과 성박물관을 함께 관람을 하면 서로가 민망하여 떨어져서 보지만 초등학교 동기 여성들과 해신당을 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성 구별 없이 같은 중성인 셈이다.

다시 출발하여 목적지인 삼척 솔비치 리조트에 도착했다. 수도권에서 출발한 친구들도 무사히 도착하여 삼 년만에 서로 만났다. 120명이 졸업하여 이 여행에 참석한 친구는 총 19명이다. 1961년 3월에 입학하여 1967년 2월에 졸업한 동기생이다. 우리들이 입학한 1961년은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해이다. 그래서 아직도 혁명공약을 암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암기한 것들은 장기기억으로 지금까지도 저장이 되어 있다.

혁명공약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여섯 가지 성명이다. 이 중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이다. 당시에 글자라고는 겨우 내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처럼 어려운 장문의 글을 외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초등학교 입학 후 3개월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5월 16일 군사 정변의 공약은 매일 아침 전체 조례에서 교장선생님이 선창하고 전교생이 따라 외치게 하는 강압적 주입식 교육이었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첫째로 언론 방송을 장악하고, 다음은 교육을 장악해야 성공한다고 한다. 나는 군사정변을 반역 행위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 잘못된 교육으로 암기한 혁명공약은 나에게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당시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그저 나이를 한 살이라도 올려 형님으로 대우받으려 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였다. 생년월일이 호적과 실제가 달라 늘 나이가 어리다는 취급을 받은 나는 실제나이를 증명하기 위해 혁명공약을 외울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 나의 주된 무기였다. 혁명공약을 외운다는 것은 최소한 1961년에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명서인 셈이다.

내가 아직 혁명공약을 외우고 있는 것을 보면 5·16군사정변은 교육을 장악하여 쿠데타로서는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쿠데타는 무력에 기반하여 정권을 전복하고 비합법적으로 통치권을 장악한 국가반역 행위이다. 이러한 국가 반역 행위가 오늘날까지도 옳고 그름에 대한 찬반 토론의 원천이 되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민생고를 해결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이 입학한 1961년의 1인당 GDP (USD)는 91달러였고, 졸업하는 1966년의 1인당 GDP는 129달러였다. 내가 치른 1969년 고등학교 입시 사회 문제에 출제된 1인당 GDP의 정답은 250달러였다. 정확한 수치는 237달러였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인 1979년엔 1,857달러다.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엔 3,627달러이고, 노태우 정권 마지막 해인 1992년은 8,140달러이다. 김영삼 정권은 IMF 이전에는 12,196달러이다가 IMF를 당한 후인 1998년에는 8,133달러로 내려갔다.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2년에는 12,788달러로 IMF 전으로 회복된 셈이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에는 23,101달러로 2만 달러를 처음 넘었다.

경제 대통령으로 자부하던 이명박 정권 마지막 해인 2012년에는 24,453달러로 5년간 늘린 것이 없었다. 박근혜 정권인 2015년에는 27,221달러, 문재인 정권 말기인 2022년에는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33,591달러로 3만 달러를 넘었다. 이는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인 1961년에 비하면 수치로는 360배 이상 잘살고 있는 셈이다. 역대 정권의 경제성장을 보면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을 많이 시켰다고도 볼 수 없다. 오히려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정권이 더 많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런데 1961년 당시에는 6·25 한국전쟁 직후라 그야말로 민생고가 가장 시급한 상황이었다. 굶어서 죽어가는 부황이 든 누런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살아남아 있다. 이러한 경험들을 같이 공유한 친구들이다. 소위 말하는 농경사회-산업사회-정보화 사회-4차산업혁명까지의 인류 5천 년 역사를 70년 만에 모두 다 경험하면서 바쁘게 달려온 세대가 우리 친구들이다. 그 와중에서 살아남아 이곳까지 와서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는 19명의 친구들은 한편으로는 인생의 경쟁에서 승리자인 셈이다. 일단 이곳에 온 친구들은 다들 건강하게 70년을 살아남았다는 증거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나이이다.

이곳에 온 친구들은 모두 首丘初心(수구초심)으로 돌아갔다. 수구초심이란 여우가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뜻이다. 여우와 같은 미물도 태어난 고향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죽는데,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고향 친구들을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오늘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뜬 눈으로 온 친구들도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전날 설레는 마음으로 잠 못 이룬 기억처럼 잠을 설쳤다고 한다.

공자는 인생 70을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공자와 같은 성인이 아닌 평범한 범인은 70이 되어도 그리운 동무들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잠 못 잔 것은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이다. 어릴 적에 많이 부른 ‘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의 가사처럼 씨동무들이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씨동무들이 솔비치 해변을 걷고 있다. 삼삼오오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뒤따라가면서 바라보자 저절로 흐뭇한 마음이 일어났다. 백사장이 다하는 지점까지 걸어갔다. 모래사장에는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분홍색 갈퀴나물도 뒤질세라 같이 뽐내고 있다. 해변 끝 경치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그동안 살았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젠 저녁 시간이다. 예약한 횟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맛집으로 소문난 횟집이다. 흰 살결을 가진 최고급의 회가 나왔다. 초등학교 다닐 당시와는 격세지감을 느끼는 식사다. 1960년대 당시에는 점심 도시락으로 보리밥과 감자와 고구마를 갖고 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것마저도 없어 그냥 굶는 친구들이 거의 절반이었다. 쌀밥 도시락을 갖고 오는 친구는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 진수성찬의 식사와의 비교가 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차적인 욕구인 먹는 즐거움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에서는 행복이 곧 쾌락이라고 주장한다. 배고픔을 해소할 때 김밥 한 줄이나 지금과 같은 화려한 고급회의 상차림이나 쾌락의 크기가 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밥 한 줄보다는 맛있는 고급 회가 더 맛이 좋아 쾌락의 크기가 더 크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이 맛있는 회에도 적용된다. 배가 고플 때는 허겁지겁 먹지만 어느 정도 양이 차면 배가 불러 더 먹는 것이 고통이다. 회가 너무 많아 남았다. 남은 회를 그냥 두고 오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남은 회를 포장하여 숙소에 가져왔다. 그런데 숙소에서 이 회를 안주로 먹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맛있는 회는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이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열아홉 명의 친구들은 큰 방에 다 모여서 대화의 꽃을 피웠다. 그런데 술 소비가 3년 전보다 많이 줄었다. 나조차도 주(酒)님과 더불어 한 세월이 50여 년이었지만, 한 잔도 안 마신 지가 2년 5개월이나 되었다. 그러니 술을 먹을 수 있는 친구들은 몇 명뿐이었다. 막상 그동안 애지중지 했던 술을 끊고 보니 우선 건강이 좋아졌다. 덤으로 여유 시간이 참 많아졌다. 글도 더 많이 쓰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얼굴도 맑아져 관상학적으로 많이 좋아졌다.

술 마실 수 있는 친구들은 아직도 건강이 허락되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는 축복이지만 이제는 서서히 끊을 것을 강조하고 싶다. 술 담배를 같이하는 친구의 얼굴색은 맑지 않다. 이는 관상학적으로는 매우 나쁜 상이다. 태생적으로 검은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술에는 장사가 없다. 술 담배를 끊어 같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남아 만남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염원이다.

12시 가까이 되자 내일을 위해 각자 배당된 방으로 헤어졌다. 그런데 내가 배당된 방에서 사고가 터졌다. 그동안 술을 끊고 헬스를 열심히 한 덕분에 근육이 많이 좋아졌다. 이 근육을 자랑하려고 친구에게 팔씨름을 하자고 했다. 친한 친구인 이 친구는 오른손잡이다. 왼손잡이인 내가 오른손잡이 친구와 오른손 팔씨름을 하여 내가 이겼다. 그리고 왼손은 손목을 잡고도 이겼다. 이것으로 끝났으면 문제가 없었다. 이어서 한 오른손 팔씨름으로 이 친구에게 손목을 잡아주고도 이겼다. 하지만 이기려고 과한 힘을 써 어깨 근육에서 뚝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 그만 두었어야 했는데 옆에서 보고만 있던 다른 친구와 오른쪽 손으로 팔씨름을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팔힘이 아주 세었다. 그러다 보니 다친 근육에 더 많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