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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70 청년 초등 동창생들과 함께 한 동해안 여행-2

by 황교장 2023. 4. 29.

다음날 아침 5시에 일어나보니 팔을 들 수도 없고 옷조차 입기가 힘이 들었다. 팔을 풀기 위해 리조트 사우나에 가니 문이 닫혀 있었다. 아침 7시에 사우나 문을 연다고 적혀 있다. 2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바닷가로 나와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혼자서 파도와 함께 맨발로 걷는 맛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발바닥에 닿는 모래알의 느낌은 어릴 적에 자란 낙동강변 모래밭을 걷는 기분이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발에 부딪히는 파도를 느꼈다. 처음에는 삼라만상이 다 떠오르다가 점점 무념무상의 경지까지 가게 되어 팔이 아픈지도 모르게 걸었다. 만 보가 넘었다. 사우나 시간에 맞추어 들어갔다. 한증탕에서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는 나의 힘자랑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반성했다. 오른손잡이인 친구가 왼손잡이인 나에게 손목을 잡히고도 졌을 때 그 친구의 기분을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고 나의 힘자랑만 했다.

이런 호승심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나를 주관적으로 생각할 때 정관격 사주라 올바르고, 통 크고, 합리적이고, 끊임없이 공부하여, 나름 바람직한 인품의 소유자로 착각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아픈 어깨로 고통을 당하면서 나를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해보니 편협되고, 주관적이고, 상대에 대한 배려성도 없고, 저만 잘난 줄 아는 소인배이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처럼 진정으로 반성한 적은 없었다. 이제야 철이 드는 셈이다. 평소 같으면 땀을 더 많이 내야 몸이 개운한데 어깨가 아파 길게 할 수가 없어 일찍이 밖으로 나왔다.

아침식사에 전복뚝배기가 나왔다. 크고 싱싱한 전복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오른팔이 올라가지 않아 왼손으로 식사를 했다. 그나마 왼손잡이 덕을 본 것이다. 아침식사 후 야외 카페에서 각자 좋아하는 메뉴의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담소 중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행복에 대한 철학이 조금씩 다 달랐지만, 설득력이 있는 내용들이었다. 이에 나도 한 다리를 끼어들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해소되면 그게 곧 쾌락이라고 생각했다. 쾌락이 곧 행복이다.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해소됨과 동시에 찾아오는 쾌락, 즉 정적인 쾌락이다. 정적인 쾌락은 ‘아타락시아’라고 부르는 ‘흔들림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나는 평소에 에피쿠로스 철학에 많은 공감을 하였다. 지금은 어깨가 아파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비록 팔은 아파도 오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은 고통을 잊게 하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가까이에 있는 동해 두타산 무릉계곡과 삼척 죽서루와 추암 촛대바위를 볼 계획이다. 먼저 무릉계곡으로 향했다. 내 차에는 여자친구만 네 명이다. 나는 사주에 여복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도 여자친구들만이 내 차에 탄 셈이다. 무릉계곡은 동해시에 있지만 이곳이 동해시와 경계에 있는 삼척시라 오히려 삼척보다 동해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무릉계곡은 여러 번 온 곳이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계절에 따라 풍광은 다르고, 누구와 같이 가느냐에 따라 여행의 질은 달라진다.

주차하고는 용추폭포를 목표로 수준별 등산을 했다. 무릉계곡은 호암소에서 용추폭포까지 이르는 약 4㎞에 달하는 계곡이다. 선두 그룹은 먼저 가고 나는 뒤에 처진 친구들과 같이 갔다. 그런데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은 친구들이라 나보고 먼저 가라고 한다. 이들을 뒤로 두고는 호젓하게 혼자 걸었다. 올해는 유난히 계절이 빨리 찾아왔다. 적어도 열흘은 먼저 온 것 같다. 특히 오늘 날씨는 5월 하순의 기온이다. 최고 기온 26도까지 올랐다. 웃옷을 벗어 어깨에 걸치고 걸었다.

학소대가 나왔다. 예전에는 학소대에 물이 제법 흘러 보기가 참 좋았는데 거의 물이 말라 있다. 조금 더 가자 절경이 나타났다.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큰 바위가 있고, 개울물은 반석 사이로 흐르고 있다. 무릉도원이다. 아침에 만 보 이상 걸어서 체력에도 무리가 느껴졌다. 이곳에서 낮잠을 잠깐 자기로 했다. 운동화를 베개 삼고 웃옷을 이불로 삼았다. 잠자리가 바뀌어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래서 눕자마자 잠이 몰려왔다. 한 십여 분을 코까지 골아가면서 자고 일어나니 개운 그 자체였다. 양말을 벗고 탁족도 했다. 신선이 따로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무릉도원이었다. 무릉도원은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도연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분이기도 하다. 그는 동진 말기의 시인이다. 도화원기에 묘사된 풍광이 이곳 두타산과 청옥산 계곡의 기암괴석과 푸른 못 등이 닮아 이곳을 무릉계라고 한 것이다.

신선놀음이 조금 지겨워질 때쯤 먼저 간 친구들이 내려왔다. 이들에게 탁족하기를 권유했다. 처음엔 망설이다가 시원하고 피로가 다 풀린다고 하자 친구들도 반석 위를 흐르는 시원한 계곡물에 탁족을 했다. 물속에는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올챙이들이 발을 간질인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어릴 적 삶 그 자체였다. 용추폭포까지 다녀온 친구는 총 5명이다. 이들 중 어제 과음을 한 친구도 있다. 대단한 체력이다.

 

이들과 함께 내려왔다. 용추폭포까지 오르지 못한 친구들이 삼화사를 구경하고는 절 입구 의자에 모두 앉아 있다. 삼화사는 영동 남부지방의 중심 사찰로서 유서 깊은 절이다. 보물로 지정된 삼화사 삼층석탑과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이 있다. 마침 형형색색의 모란이 화려하게 피어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삼화사 삼층석탑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내려오다 무릉반석에 올랐다. 이곳에서 이승휴가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찾았던 많은 시인 묵객들의 기념 각명이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곳 산수의 풍치가 절경을 이루어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다. 무릉계곡 일대의 지질은 크게 화강암과 석회암층으로 구분된다. 화강암은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대규모의 마그마가 천천히 냉각되어 굳은 것이고, 석회암은 주로 얕은 바다에서 생물들의 껍질이 퇴적되어 석회암으로 된다. 이렇게 퇴적된 퇴적물들이 융기되었기에 동해안을 융기해안이라 불린다. 무릉계곡의 상류에는 주로 화강암이다. 무릉반석을 포함한 기암괴석은 화강암 지형이다. 무릉계곡 하류에는 석회암층이 분포한다. 호기심이 많은 친구들은 무릉반석에 올라 반석에 새겨진 각명을 해석해 보기도 한다. 초서체로 쓰인 글자는 해독하기가 어렵다. 설명이 없으면 짐작조차 하기 힘든 것이 초서이다.

반석을 뒤로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이곳은 옛날부터 식당가로 유명하다. 경치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는 죽서루로 향했다. 무릉계곡에서 죽서루까지는 약 30여 분이 걸렸다.

죽서루도 많이 가본 곳이다. 그런데 운전을 하는 데 어깨에 통증이 계속 이어졌다. 마침 약국이 있어 타이레놀을 먹었다.

죽서루 근처에는 주차 공간이 부족하여 몇 번을 돌다가 겨우 찾았다. 죽서루에 오르니 친구들은 누각 마루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자기들 집에 온 것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죽서루와 같은 목조건물은 사람들이 쉬고 놀아야 건물이 오랫동안 유지된다고 한다. 이곳을 개방해 놓은 것을 보니 삼척시 관계자들은 깨어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된다.

삼척 죽서루(三陟竹西樓)는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된 명소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이다.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서루는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알 수 없으나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누각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과 초석이 없이 기둥 밑면을 자연 암반 위에 직접 세운 것이다. 길이가 모두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중 8개는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우고 나머지 9개는 자연석 위에 세웠다.

관동제일루

이 누각을 세울 당시 동쪽에 죽장사 또는 죽죽선(竹竹仙)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살던 집이 있어, 이름을 ‘죽서루(竹西樓, 서쪽에 지은 누대)’라 하였다고 한다. 누대 안에는 수많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숙종의 어제시(御製詩)와 율곡의 시도 걸려 있다.

죽서루

누각 전면에 걸려 있는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1711년(숙종 37) 이곳 부사였던 이성조의 글씨이다. 누 안쪽의 ‘제일계정(第一溪亭)’은 1622년(현종 3) 미수 허목의 글씨다.

허목 제일계정

당시 삼척 고을은 조수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다. 허목(許穆)이 삼척 부사로 부임해 척주동해비를 세우자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훗날 서인들이 이 비석을 부숴 버렸다. 그러자마자 파도가 동헌 앞까지 밀려 들어왔다. 이를 예견한 허목이 관아 대청마루 밑에 똑같은 비석을 하나 더 숨겨놓아 이를 세우자 더 이상 조수로 인한 피해는 없어졌다고 한다.

척주동해비

바다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척주동해비의 탁본이나 모사한 글씨가 물과 관련된 재난을 막아준다고 믿어 지금도 부적처럼 사용된다고 한다. 척주동해비는 허목이 동해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비문을 새겨 바닷가에 세워서 풍랑을 진정시킨 비석이다.

척주동해비 전면

그 뒤 비석이 유실된 것을 1710년(숙종 36)에 삼척부사 박내정이 유실한 비석의 탁본으로 옛 비석과 같은 비석을 다시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척주동해비 후면

허목은 눈썹이 길어서 눈을 덮을 정도여서 호를 눈썹 미(眉)와 늙은이 수(叟)의 미수(眉叟)를 쓴다. 묘하게도 허목은 여든여덟 살을 의미하는 쌀미(米)와 목숨 수(壽)의 미수(米壽)와 발음이 같아 88세까지 살았다.

미수 허목 초상

허목(1595-1682)은 50세가 될 때까지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다가 과거 시험도 보지 않고 능참봉으로 발탁되어 이조판서와 우의정까지 역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허목은 학문과 글씨에 전념해 독특한 전서체인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서예사에 큰 업적으로 평가받아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도 받고 있다.

안동 지역을 답사해 보면 곳곳에 미수 허목의 전서를 볼 수 있다. 그는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을 대상으로 남인의 주장을 대변했다. 견해 차이로 아웅다웅하면서도 친하게 지냈던 윤휴와는 사이좋게 사문난적 1호와 2호로 낙인찍힌 인물이기도 하다. 허목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맞먹는 인물로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과 재주를 보였다. 성리학자이자 역사가이며 시인이었고 화가로도 일가견이 있어 난초 등 다양한 그림과 붓글씨 등을 남겼다.

이곳 죽서루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정철의 관동별곡의 장소로도 유명하다. “眞진珠쥬館관 竹듁西셔樓루 五오十십川쳔 나린 믈이 太태白백山산 그림재랄 東동海해로 다마 가니,”로 시작하는 관동별곡의 죽서루 편은 고등학교 시절 외운다고 고생한 기억들이 생생하다.

죽서루를 나와 추암(湫岩) 촛대바위로 갔다. 촛대바위의 일출은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 화면으로 자주 나온 곳이어서 우리에게 친숙한 곳이다. 촛대바위는 우리 숙소가 있는 솔비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그런데도 이곳은 삼척시가 아닌 동해시 추암동에 속한다. 촛대바위는 바다에서 솟아오른 형상의 기암괴석으로 그 모양이 촛대와 같아 촛대바위라 불린다.

우리 친구들은 촛대바위가 가장 잘 보이는 능파대에 올랐다. ‘능파대(凌波臺)’는 도체찰사로 있던 한명회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는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능(凌)은 건너다, 능가하다 라는 뜻이 있어 이는 파도를 이겨낸 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촛대바위 주변에 솟아오른 약10여 척의 기암괴석은 동해바다와 어울려진 절경이다. 동해안의 일부 해안에서만 석회암이 나타나는데, 이 해안이 대표적이다.

석회암은 화학적 풍화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 일대의 석회암은 바닷물에 의해 토양은 용해되고 석회암만 노출되어 절경을 이룬 석회암 기둥이다. 이러한 석회암 기둥을 라피에(lapié) 또는 카렌(Karren)이라 한다.

이곳 촛대바위에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그 어부에게는 정실이 있었다. 그러나 정실은 얼굴이 박색에다 마음까지 고약해, 어부는 첩을 들였다. 그런데 첩은 천하일색이라, 정실의 시기를 사고 말았다. 밥만 먹으면 처첩이 서로 아웅다웅 싸워 결국 하늘도 그 꼴을 보지 못하고, 그 두 여인을 모두 데리고 갔다. 그러자 홀로 남은 어부는 하늘로 가버린 두 여인을 그리며 바닷가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 있다가 망부석처럼 바위가 되었다.” 그 바위가 지금의 촛대바위라는 전설이다. 약간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썰렁한 전설이다. 지금의 촛대바위 자리에 원래는 돌기둥이 세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은 기둥 2개가 벼락을 맞아서 부러졌는데, 그것을 두고 민가에서 야담으로 꾸민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라고도 한다.

촛대바위군을 보고는 출렁다리를 건너 동해의 맑고 푸른 바다를 감상하고, 단체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것으로 오늘 계획된 세 곳의 관광을 마쳤다.

저녁은 추암해수욕장이 있는 이곳에서 대게와 회가 같이 나와 푸짐하게 먹었다. 전 같으면 저녁 식사를 하고 반드시 들리는 코스가 노래방이다. 이젠 그 누구도 노래방 가자는 친구가 없다. 코로나가 놀이 문화를 바뀌어 놓은 것이다.

숙소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있는 방에서 호출이 왔다. 호출 내용은 사주 상담이다. 사주 상담은 친구를 위한 재능 기부이다. 다섯 명의 친구들의 사주 상담을 해 주고는 우리방에 왔다. 그런데 우리방 남자친구들도 사주상담을 해 달라고 한다. 친구와 자녀들 사주상담까지 다 하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강행군이다. 이젠 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