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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남도여행1-조계산 선암사와 선암매

by 황교장 2024. 3. 27.

남도여행1-조계산 선암사와 선암매

 

2024년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2박 3일간 대학동기들과 남도 여행을 떠났다.

부산을 출발하여 함안휴게소에서 만나 선암사 입구인 승주IC로 나와 진일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처음은 강진 사의재와 영랑생가를 보고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가려고 계획하였지만 선암사 매화가 만개한 때라서 계획을 갑자기 바꾸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선암사만큼 자주 와본 절도 별로 없다. 올 때마다 선암사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어 늘 새롭게 느껴진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문학기행을 왔을 때가 처음이었다. 낯선 전라도 사투리에 정감이 간 것도 ‘태백산맥’ 덕분이다.

선암사는 조정래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생은 태고종인 선암사 스님의 아들이다. 태고종은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 자율에 맡길 뿐이지, 태고종의 스님이 모두 대처승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태고종 스님의 3분의 1 이상이 비구라고 한다.

선암사는 529년(백제 성왕 7)에 아도화상이 지은 절이라 한다. 아도화상께서 이곳으로 와서 산 이름을 청량산(淸涼山), 절 이름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또한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남방비보(南方裨補)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 영봉산의 용암사,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와 함께 조계산 선암사를 창건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선암사 대각국사 진영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은 100여 동에 이르는 대가람을 증축했다. 당시에는 2천여 명의 스님이 정진했을 정도로 절이 번창했다고 한다. 지금도 대각국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선암사 대각암 부도(보물 제1044호)가 있고, 대각국사 진영(보물 제1044호)이 있다. 그러나 대각국사비와 부도탑은 북한 개성에 있는 영통사에 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영통사 대각국사 부도
선암사 대각암 부도

현재의 선암사는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이며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이다. 총림은 강원과 선원에서 수 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을 뜻한다.

선암사로 가는 길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운치 있는 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길가에는 아름드리 졸참나무가 많다. 굴참나무와 갈참나무가 크게 자란 것을 많이 보아왔지만 졸참나무가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것도 선암사에서 처음 알았다.

올겨울 유난히 비가 많이 와서인지 계곡물이 마치 여름처럼 곳곳에 작은 폭포를 이루며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친구들과 아름다운 길을 따라 삼삼오오로 담소를 나누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승선교가 나타난다. 승선교는 내 고향 창녕 영산에 있는 일명 ‘원다리’로 불리는 ‘영산만년교’와 같은 홍예교이기에 더욱더 관심이 가는 다리다. 벌교홍교, 여수에 있는 흥국사홍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무지개다리인 홍예교를 대표하는 다리다.

승선교는 아래쪽의 작은 다리와 위쪽의 큰 다리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선암사 진입로는 작은 다리를 건너 계곡 건너편 길을 통해 다시 큰 다리를 건너오게 되어 있었는데 길을 확장하면서 지금처럼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 큰 다리로 건너야만 승선교를 제대로 감상할 수가 있다.

큰 다리는 길이 14m, 높이 4.7m, 폭 4m로 조선 숙종 39년(1713)에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다.

용은 물길을 통해 들어오는 잡귀나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지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승선교를 지나면 강선루가 나온다.

승선교와 강선루의 경치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선암사(仙岩寺), 승선교(昇仙橋), 강선루(降仙樓)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글자는 신선 선(仙)자이다. 이는 불교적인 색채보다도 오히려 도교적인 요소이다. 이렇게 신선 선(仙)자가 들어있는 데에는 조계산 주산인 장군봉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던 바위가 있어 붙여졌다고 한다.

선암사가 위치한 자리는 풍수적으로 장군대좌형으로 알려져 있다. 장군대좌형은 장군이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호령하는 형국을 말한다. 그래서 선암사에는 천왕문이 없다. 주봉이 장군봉이고 이곳이 장군대좌형이라 장군이 선암사를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수호신인 사천왕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선암사는 풍수상 우리나라 10대 명당 터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터라도 완벽한 풍수는 없다. 어디가 부족해도 부족한 면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기가 빠져 나가는 계곡 지점에 강선루를 세웠고 기가 너무 강한 지점에는 각황전을 건립해 철불을 모셨다고 한다.

강선루를 지나 조금 오르면 삼인당(三印塘)이 나온다. 긴 알 모양의 연못이다.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삼인당

우리나라의 연못은 기본적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에 입각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의미인 원과 정사각형의 형태로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삼인당을 지나 휘어진 길을 돌아서면 야생차밭과 함께 길이 이어진다.

 
 

그곳에 조계산 선암사라는 현판을 단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서 뒤돌아서 일주문을 다시 보면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고 예서체로 쓴 편액이 있다. 이 현판의 글씨는 풍관산인 안택희(楓觀散人 安宅熙)의 글씨라고 적혀 있다.

고청량산해천사

이 또한 풍수와 관련이 있다. 장군대좌형국과 달리 선암사를 아궁이 터라고 한다. 아궁이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서 삼인당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실재로 선암사는 1759년(영조 35)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에 선암사 터가 산강수약(山强水弱)하여 불이 났다고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산 해천사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순조 23년(1823)에 다시 불이 났다. 따라서 조계산 선암사로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쨌든 선암사는 불이 너무 자주 난 곳이다. 그래서 선암사에는 석등(石燈)이 없고, 선암사 건물에 ‘수(水)’나 ‘해(海)’자를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라 한다. 우리나라 절집의 건물들은 모두 목조로 되어 있어 불에 약할 수밖에 없다. 선암사 풍수는 기본적으로 사신사 즉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잘 구성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을 뒤로하고는 바로 매화를 보러 갔다. 홍매가 절정이다.

매화를 보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매화에 코를 대 보는 것이다. 은은하면서 짙은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암사 매화는 크기는 작지만 고고한 기품과 짙은 향기가 단연 으뜸이다.

오늘따라 무우전 출입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각황전 앞뜰에서 보는 매화는 또 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이곳의 매화나무는 천연 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매화나무는 무우전매 또는 선암매라고 불린다. 선암사 무우전 앞에 있어 무우전매(無憂殿梅)로 불리고, 선암사 절집 이름을 따서 ‘선암매(仙巖梅)’라고도 불린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중창한 선암사의 상량문에 보면 무우전매는 와룡송(臥龍松)과 함께 심어졌다고 한다.

와룡송

이 기록에 따르면 거의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매화인 셈이다. 탐매기행을 할 때 초보자들은 섬진강 매화마을로 가지만 고수들은 선암사를 찾는다. 우리나라 최고의 탐매(探梅) 여행의 명소가 바로 이곳이다.

선암매를 육당 최남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럭저럭 ‘굴목이’ 넘어온 피곤을 잊어버리고, 무엇인지 코가 에어져나가는 듯한 향기를 맏으면서 청량(淸凉)한 꿈을 찾아들었다. 이튿날 일뜨며 창을 밀치니 맑고도 진한 향기가 와짝을 들이밀어 코로부터 온몸, 온 방안을 둘러싸버린다.

새빨간 꽃을 퍼다 부은 춘매(春梅)가 지대 밑에 있는 것을 몰랐었다.”

육당이 송광사에서 출발하여 굴목재를 넘어 아름다운 돌배나무꽃도 보고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에 흐드러지게 핀 철쭉꽃도 보고는 선암사의 무우전에서 쓰러져 자고나서 느낀 소감을 적은 글이다.

육당은 매화를 “화사하면서 농염한 것이 탐스러운 부잣집 새색시가 곱게 차려입은 화려한 복장에 고급향수를 기구껏 차린 듯한 매화도 결코 못쓸 것이 아님을 알았다.

매화다운 매화도 좋지마는, 도화(桃花) 같은 매화도 또한 일종의 정취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도화일 성불러도 매화의 기품이 있을 것이 다 있음에랴. 매화인 체를 아니하는 매화, 매화티를 벗어난 매화가 어느 의미로 말하면 진짜 매화라 할 매화일지도 모를 것이다.”

무우전매

육당선생은 고고한 매화보다는 향이 찐한 홍매를 좋아한 것 같다.

매화사랑은 퇴계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퇴계 이황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였다고 할 정도로 고고한 선비들이 좋아했던 꽃이 매화다. 선생은 매화를 너무 사랑해서 병상에서도 하얗게 피어오른 매화를 즐겨 구경하고 시로 남겼다.

脫却紅塵一萬重(탈각홍진일만중)

일만 겹의 붉은 티끌에서 벗어나

來從物外伴癯翁(래종물외반구옹)

속세 밖으로 와서 늙고 여윈 나의 벗이 되었구려

不緣好事君思我(불연호사군사아)

일을 좋아하는 그대가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那見年年氷雪容(나견년년빙설용)

어찌 해마다 빙설같은 얼굴을 볼 수 있으리오

 

이 시는 퇴계 선생이 마지막으로 지은 매화시로 매화시첩 끝에 실려있다. 시에 나오는 분매는 임종하는 날 물을 주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는 그 분매라고 한다.

조식 선생의 매화사랑도 빠질 수가 없다.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조식 선생이 말년의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매화 피는 것을 보고 맑은 기운과 정신을 갖게 된 것을 노래한 시이다.

梅花(매화)

歲晩見渠難獨立(세만견거난독립)

한 해가 저물어가니 홀로 지내기 어려운데

雪侵殘夜到天命(설침잔야도천명)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까지 내렸구나

儒家久是孤寒甚(유가구시고한심)

선비 집은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했는데

更爾歸來更得淸(경이귀래경득청)

매화가 피어나니 다시 맑은 기운 솟아나네

 

산천재와 남명매

남명 조식선생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선비로 살았다. 61세 때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산천재를 세웠다. 이때 조식 선생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뜰에 심고 벗을 삼았는데 이 나무가 바로 ‘남명매’이다.

고불매

대명매

계당매

선암사의 무우전매는 백양사 고불매(古佛梅, 천연기념물 제486호), 전남대학교 대명매, 소쇄원 아래 담양지실마을 계당매, 소록도 수양매와 함께 ‘호남오매’에 속한다. 호남에 호남 오매가 있다면 영남에는 ‘산청삼매’가 있다. 산천재에 있는 남명매, 단속사터에 있는 정당매, 남사마을에 있는 원정매가 그 주인공이다.

원정매

정당매

선암사에는 무우전매 말고도 350년에서 600년을 묵은 고매들이 50여 그루나 있다. 선암사 매화는 토종 매화들로 일반매화에 비해 꽃잎의 크기는 작지만 훨씬 더 향기롭다. 선암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데에는 유홍준 교수의 덕택이 크다. 문화재청장으로 있을 때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구례 화엄사의 들매, 그리고 선암매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선암매는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 한 그루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 두 그루를 말한다.

율곡매

선암매 백매

기존에 지정된 매화에 더해 2024년인 올해 구례 화엄사 홍매화를 천연기념물에 추가·확대 지정했다. 홍매화의 지정 명칭은 ‘구례 화엄사 화엄매’다. 지금까지 화엄매는 일반적으로 화엄사 흑매로 알려져 있다. 홍매화이지만 하도 붉어서 거의 흑색에 가까울 정도로 붉다는 의미다. 화엄사 매화나무는 조선 숙종 때 심어졌다고 알려져 수령이 300년이 넘는다고 한다.

화엄매

그런데 아쉽게도 지리산을 바라보며 봄마다 꽃을 피우고 있는 조식선생이 심은 남명매가 천연기념물에 빠져 있다. 남명매도 빠른 시간내에 지정되어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남명매

선암사 매화를 감상하고는 선암사 경내를 둘러볼 차례다. 선암사의 가람 배치는 전체가 경사지에 축대를 쌓아가며 배치한 공간구성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각과 전각 사이도 그냥 둔 것이 아니라 화단을 조성하여 갖가지 꽃나무들이 심겨 있다. 그래서 선암사는 1년 365일 꽃이 없는 날이 없다고 한다. 봄에는 매화, 산수유, 살구,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자두,벚꽃, 배, 사과, 겹벚꽃, 영산홍, 자산홍, 철쭉이 시차를 두고 연이어 피어난다. 특히 겹벚꽃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아 겹벚이 만개할 때면 오래된 절집이 젊어진 느낌을 받는다.

 

선암사의 꽃 구경은 열흘에 한 번씩 와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열흘마다 몸단장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백당나무, 불두화, 산딸나무, 층층나무의 새하얀 꽃이 청초하게 피어난다. 연이어 태산목, 오동나무로 이어져 자귀나무, 배롱나무에서는 붉은 꽃을 피운다.

봄에는 나무꽃이라면 여름에는 풀꽃이 있다. 선암사 돌담 밑에는 봉숭아 채송화, 다알리아가 해마다 그 자리에 피어난다. 가을로 접어들면 삼인당 주변에 꽃무릇이 환상적으로 피어난다. 가을이 깊어가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은행나무가 온 산을 물들이고, 절마당에는 은목서의 향기가 진동한다. 겨울이면 난대성 식물인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팔손이나무,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가 절 곳곳에 초록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선암사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근래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대대적인 중창 불사로 인해 절이 망가지는 것을 피한 데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 현재 선암사는 조계종 소유의 사찰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분규 사찰로 규정되어 있어 조계종이나 태고종 어느 쪽에서도 관할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법적 재산관리권은 해당 지역 관청인 순천시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흔한 중창 불사 한번 없이 옛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매화를 보고나서는 달마전 안마당에 있는 수각을 보러 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다. 이 수각은 수 년 전에 운 좋게도 선암사 스님에게 특별히 안내 받은 곳이다. 일명 ‘칠전선원수각’으로 알려진 이 돌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각이라고 한다. 이곳은 영화 ‘동승’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 물은 야생차밭에서 흘러 내려온 약수이다. 다양한 크기의 돌로 된 수조는 네 개로 이어져 있다. 이 수조들은 각각 용도가 다르다.

칠전선원수각

제일 위쪽 돌확의 물은 상탕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청수나 찻물로 사용되고, 두 번째 돌확의 물은 중탕으로 스님과 대중의 음용수로 사용하고, 세 번째 돌확의 물은 하탕으로 밥을 짓고 과일과 채소를 씻는데 사용되며, 네 번째는 허드렛물 탕으로 빨래도 하고 발을 씻는다고 한다.

순조어필 대뵥전

선암사에 또 하나 특이한 건물이 있다. 대복전이다. 정조대왕이 후사가 없어 선암사의 호암대사에게 명하여 백일기도를 하게 한 후에 아들을 낳았다. 바로 그 아들이 순조다. 순조임금은 그 보답으로 많은 선물과 함께 대복전 현판도 써 주었다고 한다.

대복전을 나와 대웅전 영역으로 갔다. 모든 절의 중심은 대웅전이다. 그런데 선암사 대웅전도 멋이 있지만 나의 마음을 끄는 것은 대웅전 현판 글씨다.

김조순 대웅전

개인적인 취향으로 우리나라 절집 대웅전 현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씨라 생각된다. 이 현판 글씨의 주인공은 순조 임금의 장인인 김조순의 글씨다. 김조순(1765~1832)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대명사이다. 조선을 망친 원인 중 하나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인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렇게 힘차고 멋진 글을 쓸 수 있는지가 궁금하여 김조순에 대하여 찾아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는 언행에 조심하고 순상(循常)했으며 본인의 공을 자주 내세우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순조는 스승과 같은 장인이라고 평했다. 1785년(정조 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선혜청제조 등 순탄한 관직살이를 했다.

본인의 개인적인 능력도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비당파적인 노론 시파였기 때문에 극단에 치우치지 않아 서인과 남인 양쪽에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문장이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죽화도 잘 그렸다. 말년에 정조는 건강이 나빠지자 직접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추천하여 그의 딸이 순조비가 되었다.

그는 과거제의 문란으로 출세길이 막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어려운 민생 현안을 임금에게 알리는 것에 힘썼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후 본인 집안이 세도정치의 길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론 안동김씨의 세를 끌어올려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육조고사

선암사에서 유명한 또 다른 현판은 만세루에 있는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글씨다. 이는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아버지인 김익겸(1614~1636)의 글씨라고 한다.

육조고사(六朝古寺)의 뜻은 중국의 선승 육조(六祖) 혜능이 중국의 조계산에 살았던 것과 같이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인연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육조(六祖)를 뜻하는 글자가 육조(六朝)로 달리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익겸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손자로 1636년 청나라의 경축행사에 참가한 청나라 사신 용골대의 주살을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성을 지키다가 함락되기 전에 김상용을 따라 남문에 올라가 분신 자결했다.

김익겸의 부친은 김장생의 셋째아들 김반(金槃,1580~1640)이다. 그는 특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후 이조 정랑,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 등을 두루 지냈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문묘에 종사된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그의 제자이자 아들인 김집(金集, 1574-1656)은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분이다.

율곡 이이는 그의 스승이자 사돈이다. 율곡의 딸이 그의 아들 김집의 처이다. 송시열,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수항, 김수흥, 김익훈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또한 송시열의 후대에서도 윤증, 박세당 등의 소론계 학맥으로도 분화, 계승되었다.

이들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에 김집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보통 김집을 스승님으로, 김장생은 노스승님, 큰스승으로 불렀다. 그의 증손자 김만중은 1665년(현종 6)에 정시문과에 장원한 인물이다. 그는 경연사로 있으면서 김수항이 아들 창협의 비위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1688년 풀렸다. 그러나 이듬해 또 다른 탄핵으로 다시 남해 노도(櫓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삼지닥나무

구운몽은 종전까지는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발견된 ‘서포연보’에 따르면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이처럼 김장생, 김집, 김반, 김익겸, 김만중 등은 소위 말하는 광산 김씨로 우리나라 조선조 양반의 대명사로 알려진 집안이다. 도올 김용옥도 이 집안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을 나와 삼성각 앞의 와룡송과 매화를 보고는 선암사가 자랑하는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된 곳이다. 전남지역 뒷간의 전형적인 평면구조인 ‘정(丁)’자형 건물로 가장 오래되었고 또 현존하는 절집 뒷간 가운데서 가장 크다고 한다.

화장실을 뜻하는 단어들은 참 다양하다. 해우소, 뒷간, 변소, 통시 등 많은 이름이 있지만 이곳의 이름은 ‘뒤ㅅ간’으로 사이 ㅅ을 넣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풀어난 소설 ‘칼의 노래’의 작가인 김훈은 그의 에세이집인 (자전거여행 1, ‘그리운 것들 쪽으로’ 선암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배설의 낙원이다. 전남 승주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아, 똥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좀 멀더라도 선암사 화장실에 가서 누도록 하라. 여기서 똥을 누어보면 비로소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3백 년이 넘은 건축물이다. 아마도 이 화장실은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일 것이다. 화장실 안은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어와서 양명(陽明)하다.”

그러나 선암사 화장실은 “저녁에 스님이 대변을 보고 나서 아침에 소변 보러 화장실에 들르면 그때서야 쿵하고 똥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깊다.

시인 정호승은 선암사 해우소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선암사/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은 웃음과 울음이라고 한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한다. 그래도 삶에 한이 쌓이고 한의 무게에 두 어깨가 축 처지면 울음 또한 좋은 치료제가 된다. 해우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울음으로 근심을 배설하고나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선암사 해우소는 그렇게 큰 만큼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근심들을 풀어줄 것이다.

해우소를 보고 내려오는데 삼인당(三印塘)이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생각하게 한다.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의 제행이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말하고 무상은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은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은 제법(諸法) 또한 모든 존재를 의미하고, 무아(無我)는 즉 아(我)가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아가 없다는 의미이다.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열반(涅槃, nirvana)은 ‘불어서 끄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이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번뇌의 불을 끈 상태를 말한다. 열반 과 적정(santi)은 동의어로서 열반의 의미가 바로 적정을 뜻한다.

삶에 있어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탐진치(貪瞋癡)라고 한다. 즉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말함인데 이를 삼독(三毒)이라고도 한다. 탐진치가 모두 소멸되었을 때가 열반이다. 열반에 이르는 길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한다. 따라서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인 셈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탐진치’가 없어질까를 생각하다가 육조고사의 현판에서 말하는 육조 혜능의 불립문자도 함께 생각났다. 혜능이 강조한 불립문자는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이는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는 의미다. 즉 선종의 핵심 가치인 ‘마음이 곧 부처’라는 心卽佛(심즉불)이다.

정답이 없는 세상살이에 선암사를 탐방하면서 잠시나마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젠 동백꽃을 구경하기 위해 강진 백련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