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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청해진과 완도 수목원

by 황교장 2007. 8. 23.
 

 청해진과 완도수목원


청산도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바람의 방향이 청산도에서 완도 방향으로 불어 배 위에 있어도 아주 고요하다. 아기자기한 다도해는 언제 보아도 정겹다. 어제 떠난 완도항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완도항 앞에  아담한 섬이 하나 있다. 면적은 1.75㏊에 불과한 이 섬은 동그란 형상이 마치 구슬과 같다고 해서 주도(珠島)라는 지명이 붙었다. 일명 ‘추섬’으로도 불린다.  둥글고 자그마한 이 섬은 온통 상록수에 뒤덮여 있다.

주도에 자생하는 나무는 120여 종이 넘고, 섬 중앙에는 원시림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야말로 바다에 떠 있는 수목원이다. 이 섬은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돼 있어 일반인들은 맘대로 출입할 수 없다.

 

신지대교에서 본 완도 앞바다

 

완도선착장을 나와 바로 인근에 있는 음식점에서 아점으로 전복죽을 먹었다. 어제 함께 한 주님이 다 달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역시 명성만큼 해장으로는 전복죽이 최고다. 완도에 처음 왔을 때가 20여 년 전이었는데 그 당시의 기억으로는 청해진이 있었다는 장도까지는 걸어서 들어갔다가 나온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물이 너무 많다. 아마 밀물 때라서 그런가보다. 완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해신 장보고다. 최수종의 연기가 돋보이는 드라마였는데 오늘 신문에 최수종도 학력을 속였다고 나와 있다. 학위와 학력이 무엇인지 온 나라를 들쑤셔 놓고 있다. 진정한 실력만 있으며 될 터인데....


그럼 실제 장보고(張寶高)는 어떤 인물인가를 간단히 알아보자.


장보고는 그 당시로는 국제적인 유명인사라서 그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신당서, 동이전, 신라전과 일본의 일본후기, 속일본기,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명은 궁복(弓福)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 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시 서남 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장보고는 이러한 처지에 분노를 느껴 귀국한 뒤 흥덕왕에게 찾아가 신라인들의 비참한 처지를 설명하고 남해 해상 교통의 요충지인 완도에다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청해진 대사로 임명이 되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들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완전 장악하여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했다. 신라 지배 체제에서 외곽적 존재이지만 해상무역을 통해 해상왕국을 형성한 것이다.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또한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가 인솔하는 무역선단을 보냈다. 청해진은 본점이고 신라방은 중국 쪽의 거점이다.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동성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지금도 중국 산동반도에 있는 적산 법화원의 관음전 벽에는 장보고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또 산동성과 하북성의 경계인 청룡하 근방에서는 800년 동안 중국인으로 살아오던 주민 200여 세대가 1984년 인구 조사 때 조선족으로 등록해 달라고 중국 당국에 요청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장보고가 끼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청해진 본부가 있었던 장도

 

그럼 여기서 그 당시의 신라 왕조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993년 역사 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는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 신종을 남긴 35대 경덕왕(742-765, 재위 23.1년)이다.

경덕왕은 남근이 8치(24cm)나 될 정도로 정력이 대단했으나, 자식과의 인연이 희박하여 만년에 낳은 아들 한 명이 전부다. 바로 36대 혜공왕(765-780, 재위 14.10년)이다. 혜공왕은 8살에 즉위하였는데 상대등 김양상에게 23세의 나이에 살해당했다.

김양상이 37대 선덕왕(780-785, 4.9)이다. 선덕왕이 후손도 없이 병으로 죽자 신하들은 선덕왕의 조카인 김주원을 추대했다. 이 당시 김주원은 도성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마침 폭우가 쏟아져 알천을 건널 수가 없었다.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조정에서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혜공왕을 살해할 때 김양상을 도와준 실세 상대등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했다. 김경신이 바로 38대 원성왕(785-798, 13.11)이다.

그 다음부터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하늘이 내린 폭우의 사나이 원성왕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 손이다. 폭우 때문에 왕이 된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과거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한 왕이다. 원성왕의 태자 인겸이 먼저 죽어 장손인 준옹이 39대 소성왕(799-800, 1.5)이 되었다. 소성왕도 1년 5개월 만에 병으로 죽어 소성왕의 장남인 청명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40대 애장왕(800-809, 9.1)이다. 나이가 어려 숙부인 김언승이 섭정을 했다. 애장왕이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자 숙부인 김언승이 친동생인 김수종과 공모하여 애장왕을 죽이고 41대 헌덕왕(809-826, 17.3)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세조와 마찬가지로 친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것이다. 헌덕왕은 자식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왕위를 친동생인 김수종에게 물러 주었다. 김수종이 42대 흥덕왕(826-836, 10.2)이다.

따라서 폭우 덕택에 왕이 된 38대 원성왕의 태자가 인겸이고, 인겸의 아들 중 첫째가 39대 소성왕, 둘째가 41대 헌덕왕, 셋째가 42대 흥덕왕이다.

바로 이 흥덕왕 3년(828)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립하여 흥덕왕이 그를 청해대사로 임명하여 해상을 지키게 했다.

흥덕왕에 대한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흥덕왕은 부인인 장화부인을 몹시 사랑했다. 왕으로 즉위한 지 2달 만에 그녀가 죽자, 왕은 너무 슬퍼하여 매일같이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자 보다 못한 신하들이 새 왕비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주청을 하자 흥덕왕은 “짝을 잃은 새도 그 슬픔을 간직하거늘 어찌 좋은 배필을 잃고 무정하게 곧바로 부인을 얻겠는가?”라고 말한 순애보의 왕이다.

그런데 장화부인은 누구인가? 소성왕의 딸이다. 소성왕은 누구인가? 흥덕왕의 큰 형님이다. 따라서 삼촌이 질녀를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둘째형 헌덕왕과 공모하여 큰형 소성왕의 아들인 애장왕을 죽였다. 자기가 죽인 조카 애장왕의 친 여동생이 바로 장화부인인 것이다.

세계 역사상 이러한 역사는 아마 신라만이 있을 것이다.

흥덕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흥덕왕의 4촌동생인 균정과 조카인 재륭이 왕권다툼을 벌여 조카인 재륭이 승리하여 43대 희강왕(836-838, 1.1)이 되었다.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의 아들이다. 이때 희강왕과 왕권을 다투던 균정은 죽고 균정의 아들 우징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여기에 묘하게도 희강왕이 승리하는데 일등 공신인 김명이 희강왕을 죽이고 44대 민애왕(838-839, 1.1)이 되었다. 민애왕도 원성왕의 손자 김충공의 아들이다.

따라서 민애왕, 희강왕, 우징 모두 폭우의 사나이 원성왕의 증손자다.

민애왕이 왕위에 오르자 균정의 아들 우징은 장보고에게 군대 오천 명을 빌려 민애왕을 죽이고 45대 신무왕(839, 0.7)이 되었다. 결국 폭우의 사나이 원성왕의 손자 3명과 증손자 4명이 왕이 된 셈이다. 신무왕은 장보고 덕분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천 호에 봉했다.

이때 신무왕은 장보고에게 자기가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둘째왕비로 맞이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신무왕은 재위 7개월 만에 몸에 종기가 나서 죽었다. 이어 신무왕의 아들 김경응이 46대 문성왕(839-857, 18.2)이 되었다.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아버지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자기의 둘째부인으로 맞이하려 하자 조정대신들이 반발했다. 엄격한 골품사회인 신라에서 바닷가 출신인 천민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다. 문성왕은 대신들의 뜻을 받아들여  염장에게 밀명을 내려 장보고를 살해하게 했다.

장보고의 죽음으로 인해 18년간 유지해온 청해진이 와해되어 그 동안 구축했던 해상권이 무너진 것이다. 역사에 있어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장보고가 승리했다면 신라역사는 달라졌을 텐데.....


청해진의 본부가 있었다는 장도를 지나 국내 최대의 난대림 집단자생지인 완도수목원으로 향했다. 완도읍에서 수목원 가는 길은  상황봉을 비켜 넘어가야 한다. 바위의 경치가 독특하고 위엄이 있다. 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644m의 상황봉이다. 그 아래로 백운봉(600m), 쉼봉(598m), 업진봉(544m), 숙승봉(461m) 등이 이어지는데 오늘같이 가시거리가 좋은 날은 경치가 빼어나다. 고개를 넘어 상황봉 반대편에서 이정표를 따라가면 완도수목원이 나온다. 수목원은 입구부터 깨끗하게 잘 단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난대림 수목원이다. 수목원으로 들어서면 산림전시실이 나온다. 여기서는 각종 전시물과 영상물을 통해 난대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난대림 및 난대수종의 소개, 목재를 활용한 가공품, 황칠공예품, 산림속의 곤충들을 공부할 수 있다.


난대림이란 일반적으로 연 평균 14℃ 이상, 1월 평균 기온 0℃ 이상, 강수량 1,300~1,500mm를 유지하는 북위 35° 이남의 남해안과 제주도, 울릉도 지역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온화하고 일교차가 적으며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상록활엽수림(늘 푸른 넓은 잎나무)이다.

완도수목원에는 식물 전시 공간인 29개의 전문소원과 유리온실, 산림전시실, 전망대(2개소), 학술탐방로(6.4km) 등이 있다. 식물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식물종은 2007년 1월 기준 3,715종이다.

또한 뻐꾹나리, 금새우란 등의 특산·희귀수종과 난대림수목원을 대표하는 동백나무군락, 붉가시나무군락, 잣밤나무군락, 이나무군락, 소사나무군락, 복수초 군락 등이 자라는 산림의 보고가 바로 완도 수목원이다.

수목원은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찾는 이가 적다. 그러나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에게는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산림전시실을 나와 앞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사계절정원으로 길이 이어진다.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많이 이용되는 사계절정원에서는 다양한 향기를 가진 허브식물들과 작은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사계절정원 안쪽에는 호수 위로 걸어가는 나무다리 길이 이어진다.

 

나무다리 길

 

이 나무다리 길은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나무들과 곤충들을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사랑하는 연인들과 거닐기에도 적당하다. 나무다리는 다시 숲으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숲 속에 마련된 작은 공연장이 있다. 무대 주위로 벤치와 농구장이 마련되어 있어 가족들의 휴식장소로 사용할 수 있다. 나무그늘 벤치에 누워 잠시 조용한 휴식을 취했다.

수목원의 면적이 워낙 넓어서 방향 잡기가 쉽지가 않다. 첫 방향을 반대 방향으로 잡아 고생을 했다. 그러나 곳곳에 휴식공간을 두어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두어서 쉬어가기에는 아주 적당하다. 가족 단위 나들이에도 최적이다. 동백나무 자생지를 지나 수목원의 백미인 유리온실로 향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온실에는 500여 종의 열대, 아열대식물의 야자류와, 선인장, 관엽식물, 과일류, 허브류, 알로에, 용설란 등의 식물을 볼 수 있다. 생각보다는 온실 안이 덥지가 않다. 자동온도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온실을 돌아보고 나면 수련과 노랑어리연이 피어있는 수생식물원이다.

 

수생식물원

 

수련

 

 수련과 부들, 노랑어리연꽃 

수생식물원에서 정상으로 향해 가면 학술탐방로와 수목원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처음에는 상황봉 등산을 할 욕심을 부려보았는데 오늘 기온은 너무 높다. 거기다가 습도까지 숨이 막힌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등목을 하는데도 잠깐 지나면 다시 덥다. 내 몸이 느끼는 감각으로는 올 중 제일 덥다.


전망대까지만 가려다가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처음으로 보는 열매가 맺어 있는 나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분명히 처음 보는 나무다. 그런데 팻말에 이름이 없다. 한창을 내려와도 그 신기한 나무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수목원 전문가들도 모르는 나무를 이렇게도 많이 심어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입구에 이름표가 달려 있다. 이 신기한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의 이름은? 정답은 목련이다. 목련꽃만 늘상 보았지 꽃이 지고 난 다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음 언젠가 선선하고 맑은 가을하늘이나 야생화가 만발하는 봄날을 기약하면서 해남대흥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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