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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

신살 12- 홍염살

by 황교장 2009. 10. 30.

신살 12- 홍염살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다. 두 달 동안 글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바쁜 생활이었다. 이젠 여유를 조금 찾았다. 그 사이에도 부족한 글을 읽어주고 격려와 용기를 주는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메일이나 방명록에 사주를 보아달라고 부탁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전문적으로 사주를 봐주기에는 직업상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일일이 답변을 드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하시기를 바란다.

 

 

사주를 보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척해 나가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글은 참고용일 따름이다. 각자의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다. 어느 누구도 정확한 삶은 알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만약에 안다면 그 사람은 신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고의 명도로 알려진 분은 박도사로 알려진 제산 박재현(1935-2000)이다. 그도 영원히 살 것처럼 50대 후반에 고향에 새 집을 짓다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운명은 정확하게 모르는 것이다.

단지 동양의 역사와 같이 한 사주학이 작금의 현실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가장 많이 활용하는 수단이기에 사주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판단하라는 의미에서 황도사의 사주여행을 쓰게 되었다. 사주에 너무 얽매여 기본도 안 된 사주쟁이들에게 억울하게 혹세무민당하고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만약에 족집게 도사가 있다면, 즉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믿는다면 사주를 볼 이유가 없다. 내가 죽는 날을 미리 알아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가 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

 

 

신살은 이제 그만 쓰려고 했는데 지인이 어느 철학관에서 며느리 될 사람의 사주에 홍염살이 들어 있다고 결혼시키지 말라고 하는데 홍염살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질문하기에 그 대답으로 이글을 쓰고자 한다.

 

 

홍염살(紅艶煞)이란 한자로 붉을 紅, 고울 艶이다. 즉 ‘붉고 곱다’는 뜻이다. 이 살은 도화살과 작용이 비슷하다. 어떤 이는 홍염살이 도화살보다 색정이 더 강하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시중의 책들에서 주장하는 바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목이 수려하고 花前月花에 때를 즐기는 풍류심이 있다. 홍염은 함지와 비슷한 성정의 신으로 특히 여자의 사주에 이 살이 있으면 주색을 좋아하고 풍류인이다.

홍염살이 기신인 여자는 아무리 부귀한 가정에서 자랐을지라도 사사로이 간음을 한다.

홍염살이 있으면 남녀간에 허영사치를 좋아하고 외정을 즐기는 성격이 있다.

특히 여자는 홍염이 있고, 정관 편관이 섞여 있고, 상관이 있으면 창녀 팔자다.

즉 색을 밝힌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명리정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염살이란 丙일이 寅字를 보고 辛日이 酉字를 봄이니 多情多慾한 사람이요, 癸日이 申字를 보고 丁日 未字를 봄이니 눈썹을 들고 눈을 열어 秋波를 던지며 嬉嬉樂樂 外情을 즐기는 사람이요, 甲日이 午를 보고 乙日이 申時를 보고 庚日이 戌時를 봄이니 世間 사람의 衆妻가 될 사람이요, 戊己일이 辰土를 보고 壬日이 子字를 봄에 妓生이 되고, 富家의 女라 할지라도 꽃밭 달밤에 脫線할 女人이다.

 

예를 들어 일간이 甲인 사람의 사주에서 지지에 午가 있으면 홍염살이다.

이를 도표로 만들어 보면

일간

지지

 

그런데 명리요강에서는 丙日見寅 辛見酉 癸見申 丁見未 甲見午라고 되어 있어

甲丙丁辛癸일의 일간만 홍염살로 인정을 하고 있어 사주이론서마다 조금씩 달라서 통일되어 있지가 않다. 일반적으로는 명리정종과 같다고 보면 된다.

 

 

궁합을 볼 때 특히 남자쪽에서 며느리감의 사주에 홍염살이 있다는 이유로 혼인을 꺼려한다. 남자는 홍염살이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 여성은 안 되는지, 남녀 평등의 문제에 대하여 역사적, 철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면 구석기 시대나 신석기 시대에는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청동기시대가 들어오면서 지배 복종의 관계가 형성되어 철기시대부터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고구려의 원조인 부여의 ‘4조목의 법금’에는 “간음자는 사형에 처한다. 부인이 질투하면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는 산 위에 버리며 그 시체를 가지려면 소, 말을 바쳐야 한다.” 라고 되어 있어 간음자에 대해서 엄격했고 일부다처제 사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는 양성평등이 이루어진 사회로 볼 수 있다. 지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연속극이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선덕여왕’이기보다는 ‘미실’이다. 고현정의 뛰어난 연기에 더욱더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미실이라는 인물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한 마디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필사본에서는 자세히 나와 있다. 이를 요약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미실은 소지왕의 후궁이었던 벽화부인과 법흥왕과의 사이에서 난 딸인 삼엽궁주가 어머니다. 따라서 법흥왕의 외손녀다. 여기서 법흥왕과 소지왕과의 관계를 잠깐 설명하고 가자. 소지왕은 지증왕의 6촌 형이다. 지증왕은 법흥왕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법흥왕은 소지왕의 마복자이다. 특히 법흥왕과 화랑도의 초대 풍월주인 김위화랑이 소지왕의 마복자(摩復子)라고 알려져 있다. 마복자란 글자 그대로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다.

마복자 제도는 세계 역사상 신라 사회에서만 있는 풍습으로, 임신한 부하의 아내를 자기 처소로 불러 들여 살게 하면서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하여 태어날 아이와 끈끈한 인연을 맺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23대 법흥왕은 누구인가?

지증왕(남근이 1자 5치, 약 45cm)과 연제부인(키가 7척 5치 약 2m 25cm, 배설물의 양은 북만 함)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최초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고 스스로 황제를 자처한 인물이다. 따라서 소지왕이 6촌 동생 지증왕의 아내인 연제부인과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함으로써 태어난 아이가 법흥왕이다.

이렇게 태어난 법흥왕이 7촌 아저씨인 소지왕의 후궁이었던 벽화부인과 정을 통해 낳은 분이 삼엽궁주다. 이 삼엽궁주가 바로 미실이의 어머니다. 따라서 미실은 법흥왕의 외손녀다.

 

 

미실이가 관계한 남자를 보면 1.세종 2.사다함 3.진흥왕 4.동륜태자 5.설월랑 6.미생 7.진지왕 8.진평왕이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인물들의 면면들이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다.

1.세종은 지소태후와 박이사부 사이에 난 아들이다. 즉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다. 그러면 세종은 진흥왕의 씨다른 동생이다. 따라서 법흥왕의 외손자이다. 법흥왕의 외손자와 외손녀가 결혼한 것이다.

2. 사다함은 561년 열여섯의 어린나이로 가야정벌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운 제 5세 풍월주이다.

3. 진흥왕은 진흥왕 순수비로 잘 알려진 왕으로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정복왕이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친동생인 갈문왕 김입종과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사이에 태어났다. 따라서 진흥왕은 법흥왕의 친조카이자 외손자이다.

4. 동륜태자는 진흥왕의 큰아들이다. 진흥왕과 사도부인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5. 설원랑은 제7세 풍월주이자 미생의 친구이다.

6. 미생은 미실의 친동생이다.

7. 진지왕은 진흥왕과 숙명궁주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따라서 동륜태자와 진지왕은 둘 다 진흥왕의 아들이다.

8.진평왕은 동륜태자와 만호부인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즉 진흥왕의 손자다.

 

결론적으로 미실은 진흥왕과 진흥왕의 두 아들인 동륜태자와 진지왕,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과도 성관계를 맺은 셈이다. 특히 서른을 훨씬 넘긴 나이에 열세 살의 진평왕에게 첫 경험을 안겨다 주었다. 미실은 어린 진평왕을 끼고 정사를 좌지우지 했다.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부터 미실이 죽은 607년까지 무려 28년간은 미실의 시대였다. 이처럼 미실은 진흥왕 중반기에서 진지왕 대를 거쳐 진평왕까지 40여 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60세가 넘어서야 자연사를 했다.

 

 

고려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보면

 

박우가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컨대 여러 신하, 관료들로 하여금 여러 처를 두게 하되 품위에 따라 그 수를 점차 줄이도록 하여 보통 사람에 이르러서는 1인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여 여러 처에서 낳은 아들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을 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 안에 원한을 품고 있는 남자의 여자들이 없어지고 인구도 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부녀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마침 연등회 날 저녁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위하여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고자 요청한 자가 바로 저 놈의 늙은이다.” 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서로 가리키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무더기로 손가락질하였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 그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정지하고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조선조에 이르러

경전에 이르기를 ‘믿음은 부인의 덕이다. 한 번 남편과 결혼하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삼종의 의가 있고 한번이라도 어기는 예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도덕이 날로 나빠진 뒤로부터 여자의 덕이 정숙하지 못하여 사족의 딸이 예의를 생각지 아니해서 혹은 부모 때문에 절개를 잃고 혹은 자진해서 재가하니 한갓 자기의 기풍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실로 성현의 가르침에 누를 끼친다. 만일 엄하게 금령을 세우지 않으면 음란한 행동을 막기는 어렵다. 이제부터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들은 관료가 되지 못하게 풍속을 바르게 하라. -성종실록

 

 

동학 농민 운동의 폐정 개혁안 12개조

제7조 청상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이처럼 여성의 신분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신라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독특한 골품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는 남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골품이 더 중시된 사회였다. 고려시대는 신라의 유풍이 많이 남아 있어서 대체적으로 남녀가 평등한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여성의 재가가 비교적 자유롭고 재가녀의 자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 그러나 원나라 간섭기에는 몽골의 풍습인 일부다처제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고려말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하락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성종은 여성의 재가를 금지시켰다. 그 후 성리학이 발달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는 더욱더 하락했다. 갑오개혁 때 비로소 법적으로는 과부의 재가 가 허용되었다.

 

 

홍염살도 이러한 시대상황을 반영된 것으로 결국은 남존여비(男尊女卑)사상의 부산물로서 홍염살이 특히 여성에게만 나쁘게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유행하는 ‘남존여비’의 의미는 1. 남자의 존재는 여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한다. 2. 남자의 존재는 여자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한다. 3. 남자의 존재는 여자를 비명지르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라는 유머가 유행을 할 정도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2009년 10월 27일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9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평등 순위는 전체 134개국 가운데 115위로 최하위에 가깝다. 이중 경제참여 기회부분에서 가장 낮게 나타났다. 아직도 완전한 양성 평등은 요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염살이란 여성의 성행위에 대한 자율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성행위에 대한 견해는 결혼 안에서의 sex, 사랑 있는 sex, 사랑 없는 sex로 구분할 수 있다.

결혼 안에서의 sex가 가부장제 사회의 전통적 견해라면, 사랑 있는 sex는 결혼의 울타리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적 금기를 위반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금기의 위반은 비난해야 할 일이 아니며 사람의 사물화를 막고 문명발달의 새 동력을 얻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랑 없는 sex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내 몸에 대한 자기도취적 사랑이 특징이다. 즉 몸이 소비사회의 가장 아름다운 기호이고, 현대인의 성의식은 자기 몸에 대한 나르시즘이 핵심이며, 이런 나르시즘만 있는 섹스는 사람의 사물화 현상이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기호로 취급하는 사물화 현상이다’. 라고 주장을 한다.

 

 

결국 홍염살은 여성과 남성의 성(性) 평등의 문제다. 남성에게 있어 사랑 있는 sex가 가능하고 의미가 있다면 여성에게도 마찬가지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 홍염살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시대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를 고려한다면 시대착오적인 생각일 뿐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즐거움 중 중요한 것이 아름다운 sex라고 본다면 홍염살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는 훨씬 더 풍부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나 자질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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