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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기행 2 - 종묘

by 황교장 2010. 1. 24.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기행 2 - 종묘

 

창덕궁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종묘까지는 10여 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잠시나마 버스 안에서 언 몸을 녹였다.

종묘에 들어서니 문화유산 해설사가 친절하게 맞이해 준다. ‘이렇게 추운 날의 관람은 평생 기억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종묘에 대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시작한다.

 

성의 없이 앵무새처럼 읊조리던 창덕궁의 해설사와는 달랐다. 종묘의 해설사분은 ‘여러 분들이 교사들인만큼 춥다고 시간을 줄이지 않고 더욱더 알차게 설명 하겠다’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프로정신이다. 프로는 추위와는 상관이 없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왕조가 종묘를 가장 중시한 이유는 유교적 세계관 때문이다. 유교적 세계관에서의 인간은 영혼인 혼(魂)과 육체인 백(魄)으로 결합되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인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신인 백은 땅에 묻는다. 혼을 모신 곳이 사당이고 백을 모신 곳이 무덤이다. 왕의 혼을 모신 곳이 종묘이고 왕의 백을 모신 곳이 왕릉이다.

 

 종묘 정전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는 “임금은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열면 반드시 종묘를 세운 다음 조상을 받드는 법이다. 이것은 자신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저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후한 도리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종묘는 왕실 조상의 혼을 신주로 받들어 국가적인 제례를 올려 왕권의 존엄성과 정당성을 내세워 통치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조선 왕조의 통치 철학이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할 때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나 왕이나 모두 조상신을 최고로 모신다. 그 중 왕의 조상은 하늘의 명을 받았기에 가장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역대 왕들은 하늘로부터 권위와 우수한 유전 인자를 받았다고 생각한 셈이다. 왕은 죽어서도 최고의 귀신으로서의 지위와 권능을 갖는다는 일종의 특별한 선민의식이다.

 

일반적으로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고 한다. 종묘와 사직을 잘 보존하는 것이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직(社稷)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조선이 농업국가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수한 선민인 왕들이 농업을 장려하여 백성들을 잘 먹여 살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신로 어로 세자로

 

이곳 종묘에서는 왕이라 해도 가운데 길은 다니지 못했다. 가운데 길은 조상의 영혼이 다니는 신로(神路)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이고 왼쪽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이다. 종묘야말로 조선 왕조의 정신적인 지주인 셈이다.

 

종묘는 창덕궁보다도 4-5도 가량 더 기온이 내려간다고 문화유산해설사가 설명을 한다. 거리상 불과 1km 떨어져 있는데 그렇게나 기온 차이가 크게 날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피부로 직접 느끼는 체감 온도는 그 이상인 것 같다.

창덕궁은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양지 바른 곳이 많아서 잠시나마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이곳 종묘는 귀신을 모신 곳이어서 그런지 을씨년스럽다.

 

종묘의 추위에 얼어 종종걸음을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니 인상적인 것이 보인다.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전사청 앞에 있는 성생위다. 소수서원에 가면 성생단이 있어 늘 궁금했는데 이곳에 있는 찬막단과 성생위를 보니 이해가 확실히 된다. 이곳이야말로 바로 성생단 원조인 셈이다.

 

 

 

 

 성생위와 찬막단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국보 제227호)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보물 제821호)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핵심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둘 중에서도 더 중시되는 건물은 정전이다.

 

정전은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395년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다. 그러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 둘 정전이 없었다.

이때 고안해낸 것이 영녕전이다.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1421년(세종 3년)에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신 것이 영녕전의 시초라고 한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열아홉 분의 왕과 서른 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정전

 

정전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가만 있지를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카메라 셔터를 눌리는 것조차도 추워서 싫다. 정말 춥다. 날씨가 추워지면 생리적으로 소변은 더욱 자주 마려운 법이다. 정전을 나오니 화장실이 앞에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가니 그곳에는 스팀장치가 되어 있어 몸을 녹이기에 적당했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한참 몸을 녹이고 나서 영녕전으로 다가가니 문화유산 해설사는 이미 영녕전 설명을 다 마쳤다. ‘추운 날씨에도 너무 적극적으로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지막 인사말을 나누고 있었다.

이런 추위에도 자신의 의무를 끝까지 다하고서는 표정도 밝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정말 프로답다. 성의 없이 딱딱한 말투와 굳은 표정으로 해설하는 창덕궁의 문화유산해설사와는 차별화가 된다.

 

이는 우리 교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학생들에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프로정신을 가지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교사와 성의 없이 반복된 동작과 무표정한 얼굴로 수업하는 교사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영녕전

 

영녕전은 혼자만 들어가서 사진만 찍고 나왔다. 영녕전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열다섯 분의 왕과 열일곱 분의 왕후 및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과 황태자비인 이방자여사((1901-1989, 일본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대부가의 사당에는 불천위와 직계 사대 조상을 모신다. 예를 들면 1대 아버지, 2대 할아버지, 3대 증조할아버지, 4대 고조할아버지까지 모신다. 그러면 불천위와 4대를 합쳐 위폐는 다섯이다. 그 다음 세대로 내려가면 고조할아버지의 위폐는 땅에 묻고 자신의 위폐가 사당에 안치된다.

 

이와 같이 일반 사대부는 불천위를 제외하고는 4대가 지나면 저절로 땅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왕들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간다. 정전에는 불천위 왕들과 4대까지의 왕들을 모신다. 그러다가 불천위가 아닌 왕들은 4대로 끝이 나면 영녕전으로 옮겨 영원히 모셔진다.

 

이 점이 왕과 일반사대부와는 차별화된다. 사대부가에서는 불천위가 아닌 분은 5대로 내려가면 위폐를 땅에 묻는 매안(埋安)을 하여 영원히 땅속으로 사라지는데 반해 왕은 불천위가 아니라도 영녕전으로 옮겨져 불천위나 다름없이 영원히 모셔지는 셈이다.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백성들과는 차별화하여 왕권의 정당성과 권위를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권능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종묘야말로 조선조 오백 년을 지탱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같이 간 연수생들도 추위에 발을 동동 굴린다. 모두 따뜻한 남쪽나라 부산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표정은 진지하고 밝다.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열정이다.

 

마침 그때 한 분이 마스크를 쓰고 눈만 보이는데도 눈의 표정이 하도 맑아서 말을 걸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이번 연수에 매우 만족합니까?’

그런데 그 선생님의 대답이 ‘내 표정이 밝아요?’ 라고 오히려 반문을 한다. ‘밝고 맑고 좋다’고 대답하고는 그냥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니고 관상전문가로서 표현한 것임을 은근히 강조를 했다.

 

정말 좋은 표정이다. 뭔가를 하나 성취했다는 뿌듯함에서 오는 모습 그 자체라고 생각된다. 비록 날씨는 추웠지만 선생님들의 강한 학습의욕은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강추위도 충분히 녹일 수 있는 에너지를 발생시킨 것이다.

 

문화유산답사는 현장에서 전문적인 문화유산 해설사를 모시고 직접 설명을 듣고 체험을 하는 것이 가장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학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종묘에서 해마다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다. 일반 사대부가에서 지내는 제사와 유사한 ‘종묘제례’다.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이다.

종묘제례를 할 때 사용되는 음악이 ‘종묘제례악’이다.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종묘제례’는 중요무형문화재 56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보존, 전승되고 있다.

 

지금도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관으로 봉행한다고 한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이 아닌 계절의 여왕인 5월의 첫째 일요일에 와서 제대로 한번 감상하고 싶다.

 

종종걸음을 치면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으로 출발을 한다.

 

참고로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

 

1.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면서도,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2.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형태이다. 이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3.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이유

 

1.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 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다.

2.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 때 처음 짓고 세조 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일무 등의 춤을 춘다.

3. 종묘제례악은 편종, 편경, 방향(方響)과 같은 타악기가 주선율이 되고, 여기에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등 현악기의 장식적인 선율이 부가된다. 이 위에 장구, 징, 태평소, 절고, 진고 등의 악기가 더욱 다양한 가락을 구사하고 노래가 중첩되면서 종묘제례악은 그 어떤 음악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중후함과 화려함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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