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 기행 1 - 창덕궁
2010년 1월 11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체험과 이해’라는 주제로 ‘(사)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에서 여는 교원특수분야 연수를 받았다. 3일간은 이론 수업을 하고 2일간은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중 창덕궁, 종묘, 수원화성을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세계유산이란 세계유산협약이 규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서 그 특성에 따라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한다.
1972년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의거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지칭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분류해 보면
1. 문화유산
가. 기념물 : 기념물, 건축물, 기념 조각 및 회화, 고고 유물 및 구조물, 금석문, 혈거 유적지 및 혼합유적지 가운데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나. 건조물군 : 독립되었거나 또는 이어져 있는 구조물들로서 역사상, 미술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다. 유적지 : 인공의 소산 또는 인공과 자연의 결합의 소산 및 고고 유적을 포함한 구역에서 역사상, 관상상, 민족학상 또는 인류학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2. 자연유산
가. 무기적 또는 생물학적 생성물들로부터 이룩된 자연의 기념물로서 관상상 또는 과학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것.
나. 지질학적 및 지문학(地文學)적 생성물과 이와 함께 위협에 처해 있는 동물 및 생물의 종의 생식지 및 자생지로서 특히 일정구역에서 과학상, 보존상, 미관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것
다. 과학, 보존, 자연미의 시각에서 볼 때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주는 정확히 드러난 자연지역이나 자연유적지
3. 복합유산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징을 동시에 충족하는 유산
2009년 11월 현재 세계유산은 890점으로 이 중 문화유산이 689점 (전체유산의 77%), 자연유산이 176점 (전체유산의 20%), 복합유산이 25점 (전체유산의 3%)이며, 세계유산협약 가입국은 186개국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세계유산은 다음과 같다.
[ 문화유산 ]
1. 종묘(199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2. 석굴암, 불국사(199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3.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4. 창덕궁(1997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5. 수원화성(1997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6. 경주역사 유적지구(2000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7. 고인돌유적(2000년 세계문화유산 등재)
8. 조선시대 왕릉(王陵) 40기 (2009년 06월 27일 세계문화유산 등재)
[ 기록유산 ]
1. 훈민정음(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2. 조선왕조실록(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3. 직지심체요절(하권)(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4. 승정원일기(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5.조선왕조의 의궤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6.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7. 동의보감(2009년 0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 무형유산 ]
1.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2001.5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2. 판소리 (2003.11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3. 강릉단오제(2005.11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4. 강강술래 ( 2009. 9. 30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5. 남사당놀이 ( 2009. 9. 30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6. 영산재 ( 2009. 9. 30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7. 제주칠머리당영등굿 ( 2009. 9. 30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8. 처용무 ( 2009. 9. 30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 )
[ 자연유산 ]
1.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 2007. 6 지정)
이론 수업을 한 3일 동안은 세계문화유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강의를 들었다.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에 관한 내용은
제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고급, 2009.10.26.)에 출제되기도 했다.
2일간의 이론수업을 마치고 1월 13일 7시에 부산시청에서 두 대의 관광버스에 나누어 타고 80여 명이 서울로 출발했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는 일기예보라 옷을 많이 입었다. 그리고 배낭에도 여벌의 옷을 넣었다. 날이 추워서 버스 유리창에 서려 있는 김이 얼음이 되어 밖의 경치를 보려면 계속 얼음을 닦아내어야 한다.
경상도를 지나 충청도에 진입을 하자 눈이 점점 많이 쌓여 있다. 고속도로변의 한적한 눈 덮인 시골마을의 풍경을 보니 내 어릴 적 같이 놀던 동무생각이 떠올랐다. 12시 조금 지나 서울의 국방부 민원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고 특히 여군이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특이하게 보였다.
점심을 잘 먹고는 제일 먼저 창덕궁에 들렀다. 도착하는 즉시 입장을 바로 할 수는 없고 예약된 시간에 30분 간격으로 문화유산 해설사와 동행을 해야만 된다. 예약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돈화문을 통하여 바라본 앞산의 경치는 멋이 있었다. 풍수상 주산이다. 주산의 대단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관리하는 분에게 산의 이름을 물어보니 북한산 보현봉이라고 한다.
북한산 보현봉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그리고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1) 다시 지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을 한 누문(樓門)이다.
다른 궁궐의 문은 앞면 3칸인 데 비해 이 문은 2칸이 더 넓다. 중국의 황제가 아닌 제후국의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된다는 원칙을 벗어나 5칸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두 칸은 벽으로 되어 있다. 문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니 이 원칙을 지킨 것 같다.
돈화문
회화나무
우리 일행은 1시 30분에 입장을 했다. 입장을 하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화나무 밑에서 문화유산 해설사로부터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에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된 형태로 복구했다고 문화유산 해설사는 특히 강조를 한다.
1820년대에 제작된 동궐도에 비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는 거의가 다 일제강점기에 없어지거나 변형된 것이다.
동궐도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창덕궁은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되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1997년 12월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학여행, 25년전 여름방학 때 들렀던 이곳은 이번으로 네 번째 이다. 그런데도 처음 오는 것 같은 설렘이 있었다. 나이에 따라서 문화유산을 보는 눈이 달라지겠지만 산세를 거스르지 않은 자연스러운 건물의 배치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금천교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꺾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금천교는 1411년(태종 11년)에 만들어졌다. 600년이 된 다리다. 서울에 남아 있는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천교의 금천은 한자로 금천(禁川)과 금천(錦川)의 두 가지를 다 쓰고 있다. 금천(禁川)은 아무나 함부로 건널 수 없는 다리라 해서 금할 금자를 쓰는 금천교(禁川橋)이고, 비단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비단 금자를 쓰는 금천교(錦川橋)라 한다.
이 금천은 풍수상 명당수(明堂水)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풍수적인 의미 외에도 대신들이 이 다리를 건너 입궐하면서 맑은 물 위에 사심을 털어버리고 공명정대한 길로 임하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다리 양방향 끝 쪽에는 작은 돌인형 석상이 있다. 이 석상은 이 다리를 지키면서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않도록 감시하는 벽사의 기능을 한다.
지금은 금천교 아래로 맑은 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하얀 눈만이 쌓여 있다. 그 눈 위로 사심을 툭툭 털어 버리고 금천교를 지나니 진선문이 나온다.
진선문은 조선 태종, 영조 때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 시절에 일반백성들이 돈화문을 통과하여 이곳까지 들어와서 북을 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간다.
진선문
진선문을 지나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인정문(仁政門)이 나온다. 인정문(仁政門)은 보물 제8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인정문은 1405년(태종 5년)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년)경 재건하였다. 그러나 1744년(영조 20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 복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정문
인정문을 들어서면 그 안에 인정전(仁政殿)이 있다.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인정전
태종 5년(140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음과 양이고, 5개의 봉우리인 오악은 목화토금수, 오행을 나타낸다.
인정전을 바라보면 용마루에 문양이 박혀 있다.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李花), 즉 오얏꽃이다. 오얏은 자두라고 한다. 자두는 자주색 복숭아라는 뜻인 자도(紫桃)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인정전 마당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나의 중시조인 통덕랑 할아버지께서 정오품이기에 정오품의 품계석에 눈길이 갔다. 인정전 마당은 내 상상보다는 좁게 느껴졌다.
선정전
인정전을 나오면 푸른 기와로 된 선정전이 보인다. 선정전(宣政殿)은 보물 제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지금의 청와대의 푸른 기와가 이 선정전의 청기와를 모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코스는 희정당이다. 희정당(熙政堂)은 보물 제815호다.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년)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孝名世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희정당 내부에는 1920년 순종의 명을 받아 해강 김규진이 그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남아 있다.
2010년 1월 8일 뉴스에 창덕궁 희정당에 소방시설 공사 도중에 동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등록문화재 제240호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의 왼쪽 가장자리 부분이 6cm가량 찢어졌다는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희정당은 건물 입구를 너무 많이 개조하여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번잡하였고 일제강점기의 영향인지 왜색의 느낌이 많이 들었다.
희정당을 나와 선평문을 들어서면 왕비의 침실이자 공식적인 활동공간인 대조전이 나온다.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다. 왕이 용이기 때문에 용이 용을 누르는 형상이 되어 용마루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 후궁이 많았던 왕이 이 대조전에서 왕비와 함께 머물 적이 몇 번일런지...
대조전
대조전은 보물 제816호다.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반정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대조전은 1910년 경술국치인 어전회의가 열린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191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자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수천 칸 전각들을 헐어낸 재목으로 대조전과 그 일곽을 복원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중건으로 ‘동궐도’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조선 후기의 궁궐 그림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본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궐도라고 한다.
제작 연대는 궁궐 건물의 소실이나 재건 연대 따위로 미루어 1826년에서 1831년 사이로 추정된다. 가로는 576cm, 세로는 275cm이다. 국보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원
대조전을 나와 야트막한 산고개를 넘으면 우리나라 정원 중 가장 아름답다는 후원이 나온다. 비원(秘苑)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잘못 불린 이름이다. 조선시대는 후원(後苑), 내원(內苑), 상림원(上林苑), 금원(禁苑)으로도 불렀다.
창덕궁 후원은 북한산과 응봉에서 뻗어 내려온 맥의 수림으로 약 9만 평이라고 한다. 한때는 100여 개 이상의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누각 18채와 정자 22채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후원도 불타 버렸으나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이때의 모습이 왕조실록의 주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이한 화초와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의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다"라고 했다.
부용정
후원 안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곳이 있다. 바로 부용지와 부용정과 주합루가 있는 영역이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부용정과 부용지이다. 사극에서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부용지와 부용정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만약 이 두 곳 중 하나가 없다고 생각하면 평범한 정자와 연못이 될 것이다. 이 둘의 궁합은 최고라고 생각된다.
부용지의 모양은 네모다. 그리고 네모난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연못은 대개 네모나고 또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하나씩 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져 왔다.
‘삼국사기’ 백제 무왕 때 기록을 보면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 밖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고 네 가장자리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방장 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도교사상이 일찍부터 정원 조영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부용정은 1707년에 지은 택수재를 1792년(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했다. 정자의 두리기둥 초석들이 물속에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부용정은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축하해주던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당
부용지 동쪽에는 영화당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되는 장방형의 단층집이다. 이 건물은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영화당이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지금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영화당 앞마당에 해당하는 춘당대는 왕족을 위한 휴식공간이면서도,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한 곳이기도 하다.
주합루와 어수문
후원 연못 부용지 북쪽 양지바른 언덕에 위엄 있게 서 있는 건물이 보인다. 주합루(宙合樓)이다. 주합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누각으로 되어 있다.
주합루는 2층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2층의 누각일 경우 2층에는 '누(樓)'라고 명명하고, 1층에는 '각(閣)'이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들어가는 현판도 각각 다르다.
이곳 1층의 이름은 그 유명한 규장각(奎章閣)이다.
주합루란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이고, 규장각이란 ‘하늘의 별 가운데 문장을 맡은 별인 규수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다.
원래 규장각의 기능은 임금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던 곳이다. 이를 정조가 1776년에 새로이 건물을 짓고 학문과 정책 연구기능을 강화하면서 인재를 발탁하는 기구로 삼았다.
여기서 ‘초계문신제’ 시행을 통하여 신진인물이나 중하급 관원 가운데 유능한 인물들을 많이 발탁하여 왕이 직접 교육 시켜 중용했다.
이는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주합루의 편액은 정조 어필이고 규장각의 편액은 숙종의 어필이라고 한다.
어수문
주합루는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오르기 전에 문이 있다. 이 문이 어수문(魚水門)이다. 이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 간의 친밀한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는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의미일 게다.
어수문은 큰 문 하나와 좌우로 작은 문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큰 문은 왕이 드나드는 문이고, 작은 두 개의 문은 신하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부용정을 나오면서 얼마 전에 다녀온 보길도의 부용동이 자꾸 떠올랐다. 이곳은 비록 왕궁이지만 규모나 자연친화적인 면에서 윤선도의 부용동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왕과 윤선도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 같으면 보길도에서의 고산의 삶을 택하겠다. 규모도 그러하지만 각자에게 짐 지어진 삶의 무게면에서도 그러하지 않은가. 윤선도의 보길도는 시끄럽게 간섭하는 신하들이 없는 절대권력이었지만 이곳의 왕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가지나 되었겠는가.
금마문
영화당을 뒤로 하고 후원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금마문(金馬門)이 나온다. 금마문을 들어서면 단청을 하지 않은 두 채의 작고 소박한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기오헌과 운경거이다.
문화유산해설사가 설명하길 운경거는 서재였다고 한다. 책을 운경거에 쌓아 놓고 기오헌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기오헌
운경거
기오헌은 정면 4칸 측면 3칸, 운경거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크기다. 운경거는 기오헌에 딸린 집이다.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짜리 건물로 유일하다고 한다.
기오헌은 효명세자가 순조 27년(1827)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옛 독서처 자리에 고쳐 지은 건물이다. 당시의 이름은 ‘의두합’이다. ‘동궐도’를 보면 현재의 모습과 똑같은 이 두 채의 건물이 서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각각의 명칭이 이안재와 운림거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는 기오헌(寄傲軒)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이 건물이 순조와 헌종시대를 거쳐 이안재에서 의두합으로 이름을 바꿔 왔던 것이다.
기오헌(寄傲軒)의 기오란 뜻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중 ‘倚南窓以寄傲(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있노라니) 審容膝之易安(심용슬지이안, 좁은 방이지만 편하기 그지없다)’의 시귀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효명세자는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진다.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만이었다.
기오헌을 보니 아직 한창 나이에 도연명을 사랑했다는 것은 너무 조숙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다. 더욱이 북향에 정자를 지어 독서를 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한창 성장하는 사람은 아침햇살이 비치는 동쪽에 집을 지어야지 이곳처럼 음침한 북향에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 효명세자가 요절한 데에는 이러한 풍수도 일조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경당
기오헌 건너편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대부집이 있다. 연경당이다.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에 출제되어 틀린 문제라서 이곳을 답사를 하고 싶었으나 체감온도 영하 20도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다.
지난주에 26cm의 눈이 내리면서 1937년 적설 관측 이후 73년만에 기록적인 폭설 탓에 해설사 분도 대충 해설을 하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다.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제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고급, 2009.10.26.)에 출제된 창덕궁에 대한 문제의 정답은 맞출수 있겠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99칸 이상의 방은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이곳 연경당은 120채의 건물로 만들어졌다.
효명세자 때 만들었다가 고종 때 외국공신의 접견실로 활용했다고 한다.
낙선재
다시 돌아 나와 낙선재(樂善齋)로 향했다. 낙선재는 1847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다. 지금의 창덕궁 소속이 아니고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다고 한다.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낙선재가 유명한 이유는 조선의 마지막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여사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가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가 1989년 사망했다.
올해로 조선 왕조가 망한 지 100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계절과 날짜를 잘못 잡았다.
다음에는 날씨 좋은 계절에 와서 목요일 자유관람을 해야겠다. 문화유산해설사만 졸졸 따라다니기에는 볼 것이 너무 많다. 혼자 자유로이 와야만 풍수도 보고, 관산도 할 수 있는데 일행이 같이 오니 집단의 일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추워서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다음 여정인 종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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