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1 - 우암 송시열
완도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갔다. 이집은 회와 구이를 같이 팔고 있었다. 옆 사람이 먹고 있는 것을 보니 구미가 당기어 같은 것을 달라고 했다.
모듬해물이다. 낙지, 전복, 참소라, 개불, 멍게 등 다양한 해물맛을 볼 수 있었다. 한 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분이 말을 걸어왔다. 이분과의 대화를 통해 좋은 정보를 하나 얻었다.
노화도와 보길도가 다리로 연결이 되어 보길도에 가기가 아주 쉬워졌다고 한다. 여행의 참의미 중 하나는 그 지역사람들과의 소통이다. 격의 없는 대화는 지역색까지 허물 수 있다.
보길도는 아련한 추억이 많은 곳이다. 여러 번 가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갔기에 보고 싶은 곳을 다 보지 못하고 온 곳이기도 하다. 이참에 보길도를 샅샅이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보길도는 완도 화흥포항을 떠나 노화도 동천항으로 가면 쉽게 갈 수 있다. 완도읍에서 전망대 뒤쪽으로 일주도로를 따라 10여 분 가면 화흥포항 이정표가 나와서 그 이정표를 따라 가면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화흥포항에서 청해진카페리3호에 차를 실었다. 승용차 운임만 받고 운전기사는 공짜이고 요금은 만육천 원이다. 완도에서 노화도 가는 길은 거대한 바다목장을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어민들에게는 바다는 분명 삶의 터전이다.
바다목장
시간은 40여 분 정도 소요되었다. 노화도 동천항에서 노화읍까지는 한적한 시골 마을길이다. 섬들은 일반적으로 경사가 심해 농사가 잘 안되는데 노화도는 평지나 다름없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어젯밤 내린 싸락눈이 녹지 않아 좁다란 마을길에는 눈이 남아 있어 마을 풍경은 마음을 더 편안하게 만든다. 타임머신을 타고 삼십년 전 고향마을로 날아온 듯한 느낌이다.
노화도에서 10여 분 가면 노화읍의 중심지가 나온다. 노화읍은 보길도 올 때마다 보길도에서 바라보기만 했지 막상 가보지는 못한 곳이다. 보길도와 노화도를 연결하는 보길대교가 나왔다. 이 다리 하나가 두 섬을 하나의 섬으로 만들었다.
보길도는 가장 최근에 온 것이 7년 전쯤이다. 그때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는 글씨를 보기 위해서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를 찾았으나 안내판이 중간에서 끊겨 찾지 못하고 돌아선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그곳으로 표지판을 따라 갔다. 중간중간 안내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별 문제가 없이 찾을 수 있었다.
바닷가 쪽으로 호젓하게 난 길을 따라가니 웅장한 바위가 나타난다. 미역을 가득 실은 배가 보길도와 소안도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 배에 실은 미역은 전복의 사료로 쓰인다고 한다.
해식애
소안도
바닷가 센 파도가 만들어 놓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날이 맑아서 가시거리가 더 좋다. 그러나 정작 글씨가 쓰인 석벽은 찾지를 못하고 지나쳤다.
다시 한 번 자세히 찾아보니 먹물이 많이 묻은 곳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한 때문일 것이다.
글씨는 그다지 크거나 깊게 파이지 않았는데 먹물이 너무 많이 묻어 있어 명확한 판독이 잘 안될 정도다. 안내판의 해설을 보면 암각시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암각시문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여든 셋 늙은 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푸른바다 한 가운데 떠 있구나)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쫒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밖에)
貂裘舊恩在(초구구은재, 담비갈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선생은 1689년 장희빈의 소생인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로 숙종의 비위에 거슬려 모든 관작이 박탈되었다.
제주도로 귀양을 가면서 풍랑이 세어 보길도에서 잠시 쉬면서 이곳에 한탄의 오언율시를 지어 석벽에 새겨 놓고는 귀양지인 제주도로 떠났다. 그러나 미처 한 달도 되기도 전에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賜藥)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선생은 본관은 은진이고,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리고 이이-김장생-김집-우암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계승했다. 또한 동방 18현 중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존칭은 송자(宋子)이다. 이는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즉 공자(孔子)나 맹자(孟子)처럼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가르친 제자만도 900여 명에 이르고 그중 약 60명이 고위 벼슬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우암뿐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대신의 신분으로 그것도 역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약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선생을 평가할 때는 극단적인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다 받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평가가 무엇인지, 영욕이 무엇인지,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송리 해수욕장과 상록수림
다음 목적지는 예송리이다. 예송리는 다시 중리해수욕장을 나와 삼거리에서 언덕으로 올라가야 된다. 지난번에 왔을 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사람의 기억은 늘 부정확하다. 여러 기억들이 얼키고설키어 분명하지가 않다.
예송리는 몽돌해수욕장으로도 불리는 아름다운 해변이다. 이 해변의 자갈들은 억만 년의 세월 동안 바닷물에 씻기어 둥글둥글해진 검은 돌들이다. 파도가 한번 일렁일 때마다 청량한 해조음을 내고 있다. 밤에 고요할 때 이 소리를 듣고 득도하는 도인이 나올 법도 하다.
해조음과 몽돌
예송리에는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예송리의상록수림(禮松里의常綠樹林)'이 있다. 남해물건방조어부림과 같은 기능을 한다. 즉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는 방풍림의 기능과 물고기가 서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하여 물고기들을 유인하는 어부림의 역할도 한다.
물건리와의 차이점은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은 주로 낙엽활엽수이지만 이곳 예송리는 상록수림이다. 따라서 사시사철 늘 푸르다. 이곳이 남해보다도 더욱 더 기후가 따뜻하다는 의미도 된다.
이 수림은 약 300년 전에 이곳 주민들이 만든 숲으로 길이가 약 740m, 폭이 30m쯤 되는 반달모양의 숲이다.
숲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로는 후박나무, 동백나무, 메밀잣밤나무, 구실잣밤나무, 참가시나무, 붉가시나무, 생달나무, 까마귀쪽나무, 우묵사스레피나무, 종가시나무, 섬회양목, 송악, 팽나무, 작살나무, 구지뽕나무, 찔레꽃, 누리장나무, 졸참나무, 상동나무 등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나무들이 많이 있다.
나무에다 이름표를 붙여 놓아 살아있는 학습장이 된다.
마을사람들은 또 음력 4월 12일에는 해신제(海神祭)를 올리고, 음력 정월 초하루날에는 숲 앞에서 후손이 없어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영혼을 위해서 각자의 신위(神位)에 제상을 마련해서 명복을 빈다고 한다.
예작도와 당사도
예송리에서 바로 건너편에 바라다 보이는 섬이 예작도다. 예작도에는 천연기념물 338호로 지정된 '예작도 감탕나무'가 있다. 감탕나무는 껍질을 벗겨 절구로 찧으면 끈적끈적한 천연접착제를 만들 수 있는 귀한 자원식물이라고 한다.
예작도라는 이름의 유래는 마을사람들이 예의범절이 밝아 예작도라 하였다고도 하고, 마을 앞에 우거진 방풍림이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어부를 예절을 갖추어 맞이하는 듯한 형태라 하여 예작도(禮作島)라 부른다고 한다.
예작도 뒤편에 제법 길게 보이는 섬이 당사도다.
임철우씨의 소설을 영화화한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대부분 당사도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작가 임철우의 고향은 전남 완도군 금일면 평일도다. 그리고 85년부터는 이곳 예송리에 살았다고 한다. 평일도와 보길도는 이 작품의 주 무대라고 주장하는 글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당사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당사도(唐寺島)라는 섬의 지명이다. 어떤 이가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영화를 보고 당사도의 풍광이 하도 마음에 들어서 당사도를 직접 보고 싶어 노화도 어느 선창에서 동네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당사도 가는 배 여기서 타요?”
“당사도가 어디랑가? 첨 들었는디”
“지비가 잘못 왔는개비네. 당사도라는 데는 이 근방에는 없는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시던 할아버지가 마침 그때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에게
“어이 자네 당사도라고 들어봤능가”라고 물어 보았다.
아저씨가
“아~ 자지도요” 하고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그제서야
“옴메, 자지도가 당사도랑가?”
당사도(唐寺島)는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엔 제주도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입구라 하여 항문도(港門島)라 불리다가 다시 자지도(者只島)로 바뀌었는데 그 이름 역시 발음이 이상하여 당사도로 바꾸었다고 한다.
당사도라는 이름으로 바뀐 게 82년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당사도 인근 사람들은 자지도라는 이름에 익숙하다고 한다.
중리해수욕장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중리해수욕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잠시 차를 멈추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이젠 보길도의 핵심인 부용동으로 향한다.
Ena mytho tha sas po pou ton mathame pedia
Ena mytho tha sas po pou ton mathame pedia
Itan kapios mia fora pou 'fige stin erimia
Ki apo tote sta vouna zouse pia me to kinigi
Ki apo tote sta vouna zouse pia me to kinigi
Ki apo misos stis yinaikes den katevi sto horio
Ki apo misos stis yinaikes den katevi sto horio
Yia to mytho pou mas lete allo mytho tha sas po
Yia to mytho pou mas lete allo mytho tha sas po
Itan kapios mia fora dichos spiti ke gonia
Itan kapios mia fora dichos spiti ke gonia
Yia tous andres ihe friki ki ena misos foyero
Yia tous andres ihe friki ki ena misos foyero
Omos oles tis yinaikes tis agapage tharro
Omos oles tis yinaikes tis agapage tharro
Omos oles tis yinaikes tis agapage tharro
어느 봄날 그대와~ 나
무지개 보며 꿈을 꾸었지
행복에 찬 눈동자~로
둘이는 서로 사랑을 했네
바람따~라 별을따~~~라
멀리 멀~리 떠났나
가랑잎이 흩날리~며
황혼이 지던 어느 가을날
다정스런 미소속~에
둘이는 서로 맹세를 했네
바람따~라 별을따~~~라
멀리 멀~리 떠났나
구름따~라 달을따~~~라
멀리 멀~리 떠났나
꽃도 지고 낙엽지~고
물새들마저 멀리 떠나고
사랑하던 그 사람~도
내곁을 멀리 떠나버렸네
바람따~라 별을따~~~라
멀리 멀~리 떠났나
구름따~라 달을따~~~라
멀리 멀~리 떠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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