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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탐매기행 2 -다시 산청삼매를 찾아서

by 황교장 2009. 3. 16.

탐매기행 2 -다시 산청삼매를 찾아서

 

 

3월 14일 토요휴무일에 지인과 함께 탐매기행을 나섰다. 산청삼매를 보기 위해서다. 남해고속도로는 차도 많이 밀리고 늘 가는 코스이기에 새롭게 길을 정했다. 며칠 전 교육신문에서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종손이 살고 있는 개실마을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십수 년 전 개실마을 앞을 지나가면서도 정작 답사는 하지 못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 꼭 한 번 들르고 싶었다.

 

여정을 노포동 지하철역-경부고속도로-남양산 방향-신대구고속도로-삼량진 IC-부곡온천-영산IC-중부내륙고속-88올림픽고속도로-고령IC로 잡았다.

고령 IC에 내리니 하도 오래전에 간 곳이라 길을 잘 찾을 수가 없다. 혹시나 싶어 이정표를 갖고 갔는데도 개실마을은 숨어 있는 마을이다. 무오사화를 당하고 난후 이곳까지 와서 숨어 산 곳이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힘들게 찾아간 개실마을은 멀리서 보아도 전통적인 양반가의 모습이다.

 

남향으로 선 뒷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다. 남주작인 안산은 잘생긴 문필봉이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점필재 종택

 홍매화

 사랑채 마루에서

 

개실마을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의 후손들이 350여 년간 살아온 집성촌이다.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이라 개화실(開花室)로 불리다가 음이 변하여 개애실, 개실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김종직선생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안향(1243-1306)이 최초로 도입한 이후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분이 김숙자이다. 김숙자의 아들이 바로 김종직선생이다. 선생은 조선 성종 때 도승지,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동방오현 중 첫째와 둘째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선생의 제자다.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획을 장식하고 있다. 무갑기을(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이어지는 사화의 시작점인 무오사화와 관련이 있다.

 

일화에 의하면 선생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지금의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에 유자광의 시(詩) 편액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시 답지도 않는 시를 붙어놓았다고 하면서 떼어내어 불태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연산군 4년(1498)에 발생한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무오사화는 1498년 유자광, 이극돈 등이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성종이 죽자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림파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삽입한 것을 이극돈이 발견하여 유자광에게 보여주었고, 유자광은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해석하여 문제 삼았다.

 

조의제문은 겉으로는 초나라의 회왕(의제)이 꿈에 나타나 이를 조문한다는 내용이었으나, 항우에게 죽은 의제는 실제로는 단종을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했던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이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이때 김종직 선생은 1492년 이미 사망한 상태라 부관참시형을 받았다.

이 무오사화 때문에 선생의 5대손이 1650년 경에 이 마을로 피신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아직도 이 마을은 유교적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 동네의 가장 중심인물은 종손이다. 종손의 말이라면 누구라도 복종한다. 옛날 풍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묵은세배이다. 묵은세배란 음력 12월 30일 즉 그믐날에 집집마다 방문하여 어른들에게 인사를 가는 것이다. 다시 새해가 되면 새해세배를 한다. 즉 이틀간에 두 번의 세배를 하는 셈이다.

 

개실마을의 가장 큰 자랑 중 하나는 효자마을이라는 것이다. 이 동네 할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 마을서는 5대 효자가 났으예. 저 우로 잉어빼미라카는 못이 있는데, 한겨울에 병든 모친이 잉어 묵고 싶다 캐가 못가에 앉아 울고 있는데 잉어가 꽝꽝 언 얼음을 깨고 제절로 튀어나왔다 안캅니꺼.”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잉어가 스스로 얼음을 깨고 뛰어나와 약이 된 것이다.

 

 

효도란 어릴 적부터의 의식적인 교육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가르치지 않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지 치사랑은 드물다. 자식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지만 부모에 대한 효도는 교육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종택 안 마당에 수백 년된 홍매화가 있다. 꽃봉오리만 올라 있어 피려면 다음 주나 되어야 할 것 같다. 다른 매화는 다 피었는데 오래된 고목 홍매화는 늦게 피는 것 같다. 화엄사 흑매도 해마다 보면 다른 매화보다 1, 2주 후에야 피는 것 같다.

 

 

아쉬움을 남기면서 개실마을을 뒤로 하고 해인사IC로 들어가서 88고속도로를 가는데 가야산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어제 비가 온 후 기온이 뚝 떨어져 가시거리가 너무 좋다. 가야산이 시야에서 없어지고 조금 더 달리니 덕유산 자락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옆에 탄 지인도 오늘 날씨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마냥 즐거워하신다.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눈이 하얗게 덮힌 지리산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정말 가시거리가 좋은 날이다. 대전통영고속도로를 갈아 타고 지곡IC로 나왔다. 예정에 없었으나 김종직선생의 종가를 보고는 제자인 일두 정여창선생의 고가가 생각나 이 참에 한번 들르고 싶어졌다.

 

정여창선생의 고가는 안의와 함양 사이에 있는 지곡면 개평(介坪)마을에 있다. 개평(介坪)은 댓잎 네 개가 붙어 있는 개(介)자 모양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개평마을 또한 전통적인 양반마을이다. 고랫등 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있다.

이곳에 오면 늘 풍수상의 의문이 생긴다. 개평마을은 우리나라의 양반동네들의 일반적인 특징 그대로 정남을 향하고는 있는데 북현무인 마을 뒷산이 너무 멀리 있어 없는 것처럼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집은 선생이 타계한 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다고 한다. 입구 솟을대문 위에는 다섯 개의 정려패(旌閭牌)가 있다. 정려패는 나라에서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기려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는 것을 말한다. 효자패가 네 개이고 충신패가 하나다. 지금까지 솟을 대문에 정려패가 무려 다섯 개가 있는 곳은 내 경험으로는 이곳이 처음이다.

 

 솟을대문

 정려패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양반의 권위가 느껴지는 사랑채가 나타난다. 높은 축대 위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벽면에 힘차고 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충효절의(忠孝節義)다. 이 집안이 자자손손 효자와 충신이 왜 배출된 것을 알 것 같다. 당당하게 충효를 이렇게 사랑채에 써 놓은 집은 본 적이 없다.

충신과 효자는 어릴 때부터 집안의 교육을 받아야 나올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신과 효자는 태어나는 것이기보다는 양육되는 것이다.

 

이집은 고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답사처 중 하나라고 한다. 고건축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곳은 논산의 윤증고택과 이집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의 식견으로도 공간 구성이 참 잘 짜여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삼천여 평의 너른 대지 위에 사랑채, 안채, 별당, 사당, 곳간 등으로 구분되어 전체적인 균형미가 느껴진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선생은 본관은 하동(河東), 호는 일두(一蠹)다. 두(蠹)는 ‘좀 두’이다. 좀벌레와 같이 보잘것없다는 의미로 겸손의 표시다. 여창(汝昌)이란 이름도 중국의 사신과 선생의 부친이 만나는 자리에서 중국사신이 선생을 눈여겨보고는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관상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고 하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은 김굉필, 김일손 등과 함께 김종직선생에게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선생은 갑자사화에 또 한 번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갑자사화(1504, 연산군 10)의 원인은 우리에게 ‘금삼의 피’로 잘 알려진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였다.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가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성종은 1479년(성종10)에 폐비하고 다음해 사사(賜死)하였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사건이라 연산군을 그때까지 몰랐다.

그러나 폐비사건이 외할아버지인 임사홍에 의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은 귀양 보내어 사사했다. 또한 윤씨의 사사에 찬성하였던 사람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여기에 김굉필(金宏弼)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여창선생은 이미 귀양지에서 돌아가신 후였으므로 부관참시를 당한 것이다. 천하의 한명회(韓明澮)도 부관참시를 당한 사화가 바로 갑자사화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떠올리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았다. 여행은 때로는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떠올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젠 본격적인 탐매기행이다. 다시 함양으로 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는데 그만 순간적으로 실수를 범했다. 진주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도로 대전방향으로 올라갔다. 다시 지곡IC로 나와서 고속도로에 다시 올려서 지리산 IC로 나왔다. 남명매를 보기 위해 조식선생께서 말년을 보내신 산천재로 갔다.

 

 산천재와 남명매

 남명매

 산천재 마루에서 본 천왕봉

 

산천재 앞마당에 피어 있는 남명매는 최고의 절정이다. 이 매화는 선생이 61세 때이던 명종16년(1561)에 손수 심은 것 이라고 한다. 은은한 매화향이 정취를 더한다. 미리 온 분들이 산천재 마루에서 매화를 감상하면서 차를 마시고 있다. 멋을 아는 분들이다. 우리가 들어서니 자리를 피해 준다. 그리고 차 한잔 드시라고 한다. 산천재에 툇마루 끝의 창문이 열려 있다. 마침 어제 비가 많이 온 덕분에 천왕봉 정상 부근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어 정취를 더해준다. 조식선생의 높은 안목이 느껴진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김해에서 이곳 산천재로 옮겨 말년을 보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산천재를 나와 단속사터에 있는 정당매(政堂梅)를 보러 갔다. 정당매를 보러 가는 길은 조용하고 아늑한 맛을 준다. 주도로에서 벗어난 길이기 때문이다. 이직도 옛날의 풍광이 그대로 남아있다.

단속사터에 도착을 하니 서울에서 온 답사반이 버스 두 대를 타고 왔다. 단속사터의 정당매는 통정공 강회백(姜淮伯1357-1402)선생이 심었다는 나무다. 선생의 벼슬이 정당문학 겸 대사헌이라서 이름 붙여진 것이 정당매다. 선생은 시 ,서, 화의 삼절이라는 강희안(姜希顔1417-1465), 강희맹(姜希孟 1424-1483)형제의 친 조부이기도 하다.

 

 정당매

 

2년 전에 왔을 때보다 더 활짝 핀 정당매를 볼 수 있었다. 정당매 옆에 홍매로 보이는 꽃봉오리가 붉게 맺혀 있다. 함께 간 지인이 이 나무는 홍매가 아니고 벚꽃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니 나무 줄기가 벚꽃이 확실하다. 지리산 분지에 있는 벚꽃이 개화하기 일보 직전이다. 부산보다도 훨씬 빨리 필 것 같다. 눈 내리고 난 후 눈이 빨리 녹는 곳이 명당이라고 한다. 명당은 온도가 높은 곳이다. 일조량이 좋고 장풍 즉 찬바람을 잘 막아주는 곳이 명당이다. 이곳은 확실히 명당인 모양이다.

 

 

산청 삼매 중 마지막으로 남사마을에 있는 원정매를 보러 갔다. 남사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고령개실마을, 지곡개평마을에 견줄 만한 동네다.

원정매는 분양고가(汾陽古家)에 있다. 고려 말 문신인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 1303-1380)선생이 심었다는 700년 된 홍매화인데 2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옆에 새로 심은 것이 한 그루가 있고, 죽은 고목에서 나온 한 가닥 새로운 줄기에 탐스러운 원정매가 피었다. 은은한 향기가 일품이다.

 

원정매

 

분양고가를 나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 1376-1453)이 7살 때 심어 올해로 꼭 627년이 된 우리나라 최고령의 감나무를 감상했다. 하연선생은 원정공의 증손자로 포은 정몽주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고 한다. 세조 때 청백리로 뽑힌 분이다. 감나무 옆에는 사양정사(泗陽精舍)라는 건물이 위엄을 더하고 있다.

 

627년 감나무

 최씨고가 홍매

 

사양정사를 나와 마을길을 따라 한바퀴를 돌았다. 살고 싶은 마을이다. 집집마다 매화 한 그루씩은 피어 있다. 수백년은 됨직한 최씨고가의 홍매화는 담넘어 감상을 했다.  이것으로 산청삼매를 모두 감상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국도를 타고 원지를 나와서 의령읍을 거쳐 단군 역사 이래로 이나라 최고 재벌인 삼성 고 이병철회장의 생가를 방문했다. 방문시간이 지난 관계로 문이 잠겨있다. 마침 옆집문이 열려 있어 옆집에 들어 갔다. 여기에서도 오래된 매화나무를 보았다. 전에 방문했을 때 관리인이 이집은 이병철회장의 삼촌집이라고 말해 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담장넘어 보이는 집이 이병철생가

 

올해도 놓치지 않고 탐매기행을 마쳤다. 매년 가는 탐매기행이지만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오래된 지인과 함께 한 이번 탐매기행도 색다르고 뜻이 있었다. 여러 번 간 곳도 있고 처음 간 곳도 있었다. 여러 번 간 곳은 다시 가 보아서 정겹고, 처음 간 곳은 처음 간 곳이라 설렘이 있었다. 정겹고 설렘이 있어서 여행은 즐겁다. 여행은 내가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시켜준다. 이 충전된 에너지로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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