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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by 황교장 2008. 12. 14.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옥산서원을 나와 다리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이 주차장 앞에 고택이 있다. 독락당이다. 옥산리는 약 30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다. 이중에서 약 200여 호가 회재선생의 후손인 여강(驪江) 이씨라고 한다. 여강 이씨 옥산파의 종가집이 바로 독락당(獨樂堂)이다. 일명 옥산정사라고도 한다.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 가정집이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독락당 대문

 

독락당은 회재선생이 사간으로 재직할 당시에 중종과 사돈이 되는 김안로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파직된 후 이곳에 머물면서 지었다.

중종 11년(1516)에 지어진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독락당 (옥산정사,문화재청 사진)

 

 독락당 담장 살창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보다 살창이 있어 앉은 곳에 따라서 계류가 달리 보이게 된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독락당(獨樂堂)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고 옥산정사(玉山精舍) 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다.

안채에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안내판에 개방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2년 반 전에 영산대학교에서 받은 일반연수 때 이 집의 종손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난다. 선생의 모든 유품이 자기 집에 있지 양동마을의 무첨당에는 없다고 한다. 독락당이 회재선생의 실제 후손임을 유난히 강조를 하였다.

 

그때 해설사로 함께 동행했던 분은 이 마을 출신이면서 선생의 후손인 고려대학교 교수님이었다. 내가 듣기에 종손이 하도 그 사실을 강조하길래 왜 저렇게까지 강조를 하는지를 질문을 했다. 그 답변은 다음과 같다.

회재선생의 큰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어 양자를 데린 것이 지금의 양동마을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인 무첨당이고, 독락당은 선생의 작은부인에게서 태어난 주손(冑孫, 맏손자)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법으로는 무첨당은 비록 양자이지만 대종가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독락당은 선생의 피를 직접 이어 받은 실제 자손들이다.

 

담장을 따라 나가면 자계천이 나온다. 계곡을 조금 올라가니 정자가 아주 운치 있게 서 있다. 계정이다. 계정은 자계천의 너럭바위에 다리를 걸치고 서있는 누각형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계정

 

 계정현판

 

 인지헌 현판

 

계정에는 계정(溪亭)이라는 현판 이외에도 인지헌(仁智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둘 다 한석봉의 글씨다. 특히 인지헌의 인(仁)과 지(智)는 회재선생의 구인(求仁)과 논어에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계정의 한쪽 작은방 위에는 양진암(養眞庵)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양진암의 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다. 이는 암자의 이름과도 같다. 실제 회재선생과 친하게 지낸 정혜사의 스님에게 아무 때나 스스럼없이 찾아와 머물게 하려는 배려에서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지난 연수 때 이 계정의 마루에 앉아 보았는데 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은 매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기서 친한 벗들과 시원한 맥주 한 잔과 맛있는 자연산 회와 소주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잠시 생각도 해보았다.

 

회재선생은 독락당 주변의 산과 자계천의 바위를 사산오대라고 이름지었다. 퇴계선생이 사산오대를 반석에 새겨 놓기 위해서 쓴 친필이 퇴계유묵(退溪遺墨)이다. 퇴계유묵은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사산은 북쪽 산봉우리인 도덕산(道德山),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무학산(舞鶴山), 동쪽 편에 있는 봉우리인 화개산(華蓋山), 서쪽 봉우리인 자옥산(紫玉山)을 말한다. 그리고 계정에서 볼 수 있는 계곡의 바위 다섯을 골라 오대라고 이름붙였다. 물고기 노는 것을 보면서 관조하는 관어대(觀魚臺), 돌아감을 노래하는 영귀대(詠歸臺),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의 탁영대(濯纓臺), 마음을 맑게 하는 징심대(澄心臺), 마음을 깨끗이 하는 세심대(洗心臺)가 그것이다.

계정 자리인 관어대(觀魚臺)에 앉으면 영귀대와 관어대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상류에 있는 증심대와 탁영대를 바라볼 수 있다.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에 있어 멀리 마음으로 볼 수 있다.

 

 독락당 후원의 나무들

 

계정을 지나 집 뒤쪽 후원으로 가면 새로 지은 박물관이 있고 그 앞에는 특이한 나무가 있다. 중국주엽나무다. 주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중국 주엽나무다. 조각자나무 또는 쥐엄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나무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친구로부터 종자를 얻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독락당의 풍수를 보니 뒤쪽이 허하다. 경주의 최부자집처럼 북쪽이 허한 것이다. 이 허한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비보 차원에서 나무들을 많이 심어놓았다고 여겨진다.

 

 중국주엽나무

 

이 동산을 지나 마을 뒤쪽길을 가다보면 왼쪽 산 밑에 정혜사지13층석탑이 단아하게 서 있다. 멀리서 보아도 특이한 형태다. 통일신라 석탑은 삼층석탑이 전형인데 전혀 다른 이형석탑이다. 이 탑은 국보 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정혜사지13층석탑

 

탑의 전체 높이는 5.9m, 기단폭은 2m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설명 참조)

만약에 상륜부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더욱더 아름다운 탑일 거라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정혜사지13층석탑 주변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서 있다. 하지만 어제 바람이 몹시 불더니 노란 은행잎들은 모조리 떨어져 풍경이 스산하다.

 

정혜사지를 나와서 다시 위쪽으로 길을 따라가니 저수지 밑에 장산서원이 있다. 장산서원(章山書院)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들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을 봉향(奉享)하는 곳이다. 1780(정조 4년)에 창건되었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68) 때 훼철되었다가 2006년 11월에 복원하였다. 이전인은 유배지에서 선생을 7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시신을 수습하여 수천리 빙판길을 운구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신원운동을 벌여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 만에 복작되었다. 다시 2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장산서원

 

 

 초요문 기둥

 

옥산서원이 이언적 선생을 모신 서원이라면 장산서원은 선생의 아들을 모신 서원이다. 이 서원은 2007년 경주시 건축상 중 금상을 받았다. 그러나 서원 정문인 초요문의 기둥이 벌써 금이 가 있다. 독락당은 1516년에 지은 목조건물인데도 아직도 당당하게 서 있는데 장산서원은 2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나무에 틈이 생겨 뭔가 불안하다. 현대기술이 500년 전의 기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장인정신이 없이 그저 돈만 벌기 위해서인가를 생각하니 씁쓰레한 마음이 든다.

 

 장산서원 뒤에서 본 정경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저수지 위쪽으로 올라간다. 급하고 빠른 발걸음은 필요 없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주변의 산세와 들판을 조망하면서 휘적휘적 걷는다. 무념무상이다. 옥산지에 도착했다. 제법 너른 저수지다. 2001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옥산지

 

날은 흐릿하고 눈이라도 올 듯한 날씨지만 인적 없는 길은 무념으로 걷기에 환상적이다. 길을 따라 저수지가 끝나는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없다. 이젠 조금 더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다. 해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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