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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서원기행 3 - 옥산서원과 이언적

by 황교장 2008. 11. 25.

서원기행 3 - 옥산서원과 이언적

 

전날에 지인들과 아름다운 밤을 보낸 관계로 늦잠을 잤다. 아직 주님이 가시지가 않고 함께 놀고 있다. 남아 있는 주님을 보내기에는 족욕이 으뜸이다. 뜨거운 녹차를 마시면서 약 50분 정도 족욕을 하니 주님도 가시고 정신도 들었다. 밖을 보니 며칠 동안 추웠던 추위도 가고 따뜻한 봄날 같은 날씨다. 이런 날은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신다. 떠나야 한다.

 

무작정 차를 몰고 떠나는데 마침 전날 보았던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에 실린 나무기행에서 회화나무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것이 생각이 났다. 회화나무하면 옥산서원이 떠오른다. 내가 알기로는 회화나무가 가장 멋이 있고 크게 자란 곳은 옥산서원 앞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주를 지나 건천IC를 나와서 포항방향으로 가다가보면 표지판에 안강읍이 나온다.

 

안강읍(安康邑)의 ‘安康’은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강(康)이다. 정말 좋은 지명이다. 삼한시대는 진한의 음즙벌국(音汁伐國)이었고, 신라시대의 파사이사금(신라의 5대왕, 80~112 재위) 23년에 비화현(比火縣)이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에 마을 주민들의 평안을 염원하는 뜻에서 ‘安康’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안강은 북동부에는 넓은 평야가 발달했다. 이 일대는 무릉산(459m), 도덕산(703m) 등 500m 내외의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각각의 산지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읍의 남서쪽 경계를 흘러서 형산강에 합류한다. 안강평야는 경주평야보다도 들판이 더 넓은 것 같다. 신라 천 년을 이어온 데에는 안강들판의 풍요롭고 비옥한 토질에서 생산된 생산물도 한 몫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에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영 경관을 망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안강읍에서 영천 방향으로 약 5분 정도 가다가 보면 옥산서원 표지판이 우측에 나온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산세가 예사롭지가 않다. 이곳이 바로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다. 이 옥산리에 옥산서원이 있다.

 

 옥산서원 가는 길

 

옥산서원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창건 2년 뒤인 1574년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우리나라 오대서원 중 하나다. 즉 도산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과 함께 오대 서원의 명성을 누리고 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옥산서원은 마을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바로 가야 한다. 그러나 주차장 시설이 부족하다.

 

 

 회화나무

 

그러나 옥산서원까지 가는 길은 환상적이다. 수백 년 된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다. 이 나무들의 수종을 보면 귀하디귀한 회화나무가 10여 그루나 된다.  느티나무는 주로 귀목(木)으로,  회화나무는 槐木(괴목)이라 불린다. 또한 일명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린다. 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공(三公)들이 조정에다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각자 회화나무 그늘 아래 앉아 서로 마주보면서 정사를 의논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중국의 삼공은 우리나라의 삼정승과 같은 격이다.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는 출세한 사람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 옥산서원에 회화나무를 심은 연유도 이곳에서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 벼슬도 삼정승에 이르고, 학문으로도 큰 학자가 많이 배출되라는 염원일 게다.

 

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에는 맑은 물이 너럭바위 위로 흐르면서 곳곳에 소와 운치 있는 폭포를 만들어낸다. 천변에는 수백 년 된 아름드리의 굴참나무와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2006년 여름 방학 때 영산대학교에서 한 중등교원 직무연수인 ‘논어의 현대적 재조명’ 중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답사하는 시간이 들어 있어 옥산서원에 있는 유물 유적과 독락당에 있는 유물들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유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회재선생 후손에게서 직접 들을 수가 있었다. 참 좋은 기회였다. 그 이후 2년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역락문과 현판

 

서원의 정문은 역락문(亦樂門)이다. 이 역락문은 논어에 있는 ‘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이자원방래 불역낙호)’의 ‘亦樂’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역락문의 이름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1515-1590)이 명명하고 현판글씨는 한석봉(1543-1605)의 글씨다. 이 문은 닫혀 있다. 다시 나와서 쪽문으로 들어가야 된다. 서원 벽에는 꼬마들의 낙서가 심하게 되어있다. 빨리 보수를 해야 될 것 같다.

 

 

 무변루

 

역락문 뒤에는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가 나온다. 이층으로 된 누각이다. 이 무변루도 의미가 있다. 무변은 주염계찬(周廉溪贊) 가운데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처음 문루 이름을 납청루(納淸樓)라 하였으나 노수신이 선생의 유허에 맞지 않다고 하여 무변루로 고쳤다고 한다.

 

무변루(無邊樓) 글씨 역시 석봉 한호의 글씨다. 무변루를 마주보는 건물이 옥산서원의 주 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이다. 구인의 뜻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선생의 저서 가운데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구인당(求仁堂)의 글씨도 역시 석봉 한호의 글씨다.

 

 

 구인당

 

그리고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유홍준 교수는 완당평전에서 “전서의 굳센 맛을 살려내어 이른바 ‘솜으로 감싼 쇳덩이,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으로 쓴 글씨’라고 이야기되는 추사체의 힘이 그대로 느껴진다.” 라고 평하고 있다.

 

 

 옥산서원 현판 위는 추사 아래는  아계

 

추사글씨의 현판 뒤에는 이산해가 쓴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이산해(1539-1609)는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선생의 친조카이다. 영의정을 지냈고 명필로도 유명한 분이다.

 

이 현판은 신을 벗고 구인당 마루에 올라서야 보인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선조임금이 아계 이산해에게 명하여 쓰게 한 이 현판은 1838년(헌종4년)에 구인당이 소실되어 새로 지으면서 이산해의 편액은 구인당 내벽에 달게 하고, 헌종은 추사에게 다시 현판을 쓰게 하여 전면에 달게 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왕명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다. 이 옥산서원이야말로 명필들의 전시장을 보는 듯하다.

 

구인당 대청마루에 앉아보니 연수 때 영산대학교의 부남철 교수에게서 옛날 유생들이 서원에서 수업을 받는 방식으로 논어를 배운 기억이 났다. 아주 특별한 체험이었다. 그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세월은 2년 반을 훌쩍 뛰어넘었다. ‘세월의 빠르기가 화살 같다’는 속담이 피부로 느끼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 게다.

 

옥산서원의 풍수를 보면 어래산이 북 현무이고 자옥산이 남 주작인 안산이다. 그리고 자계천은 북출 남류로 보야야 하겠다. 좌향은 거의 서향에 가깝다. 주로 서원이나 향교는 정남향으로 세우는데 반해 옥산서원은 서향으로 지어졌다. 이는 산세와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산이 있을 경우에는 강학당이 앞에 오고 위패를 모신 사당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구조이다. 그리고 강학당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옥산서원은 동재인 민구재(敏求齋)는 남재이고, 서재인 암수재(闇修齋)는 북재인 셈이다.

 

 

민구재와 암수재

 

민구재와 암수재도 의미가 있다. 민구재의 민구(敏求)는 호고민이구지(好古敏以求之)란 뜻이라고 한다. 이는 어질고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데 그쳐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학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첩하게 잠시도 머무름 없이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데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암수재(闇修齋)의 암수(闇修)는 주자자찬 가운데 암연자수(闇然自修)의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闇은 숨을 암이고 修는 닦을 수이니 이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게 밝게 펼쳐져 나감을 뜻한다. 이처럼 이름 하나하나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모신 신도비각이 있다. 이 신도비는 고봉 기대승 선생이 짓고 이산해 선생의 글씨이다.

 

 

비각과 신도비

 

옥산서원의 장서각에는 보물 4점과 선생의 유물과 각종 전적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중 보물을 번호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보물 제524호 : 중종8년(1513)에 실시한 사마시(司馬試)의 합격자 명단인 정덕계유 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보물 제525호 :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완본 9책

보물 제526호 : 우리나라 역대명필들의 글씨를 석각(石刻)하여 탁본한 해동명적(海 東名蹟) 2책

보물 제586호 :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선생의 수필고본

 

유물전시관의 이름이 청분각이고, 이 문을 들어가는 정문은 태극문이다. 이 태극문을 세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선생이 27~28세 무렵 망기당 조한보와 벌인 네 차례에 걸친 태극무극논변(太極無極論辨)은 조선조 철학적 논쟁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다. 여기에 개진된 선생의 학설은 퇴계선생으로부터 “이단의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 유물관은 일반에게 공개를 하지 않는다. 운 좋게도 연수 때 선생의 후손이며 이 마을 출신인 고려대학교 교수로 있는 분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볼 수가 있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고 기억에 선명한 것은 선생이 직접 공부했던 서책이다. 얼마나 많이 보았던지 종이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무엇이든 경지에 도달하려면 피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 여기서 이언적 선생에 대하여 알아보자. 선생은 동방오현 중 한 분이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동방오현이라고 일컫는다.

선생은 퇴계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회재(晦齋)다. 외가인 양동마을에서 1491년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 인동현감,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이곳 자옥산(紫玉山) 독락당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향나무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이후 이조, 예조, 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 인종이 죽자 종1품인 의정부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10조(書啓十條)를 올렸다.

이 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1553년 유배지에서 63년의 일생을 마감했다.

 

회재선생의 6년간 유배생활은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시기였지만 학자로서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선생의 중요한 저서가 완성되었다. 다산 정약용선생도 유배지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겼듯, 반드시 정치적으로 화려한 것만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선생을 내몰았던 김안로나 윤원형은 역사에 오점만 남기고 쓸쓸히 사라졌지만, 선생은 영원히 빛나고 있지를 않는가!

 

이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과연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과연 당대에서 가능한 것인가? 당대의 판단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둔 사람이 출세에 너무 집착하거나 재물에 눈이 멀면 결국에는 인생에 오점만 남긴다. 나 자신에게도 늘 경계를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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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없인 못살아요/노래:조영남

 

밤 깊으면 너무 조용해

책 덮으면 너무 쓸쓸해

불을 끄면 너무 외로워

누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사랑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사랑 없인 난 못살아요

 

한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 틈에 너무 막막해

오가는 말 너무 덧없어

누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사랑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사랑 없인 난 못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