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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하계직원 연수 2 -내앞종택과 병호시비

by 황교장 2008. 9. 19.

하계직원 연수 2 -내앞종택과 병호시비

 

몸이 피곤하여 금방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다시 깼다. 중앙선 열차가 굉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한 번 깬 잠을 다시 청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또 다시 굉음이 울린다. 짜증이 났다. 중앙선 철길을 이쪽으로 나게 한 당시의 일본사람들을 욕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할 수가 없었다. 이젠 잠이 다 달아났다. 주변을 살피니 다들 곤히 자고 있다. 나만 신경이 더 예민한 것 같다. 내 시야에 퇴계선생의 친필인 임청각 현판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이어 고경명선생의 제임청각, 이상룡선생의 거국음이 차례로 내 눈에 확인이 된다. 세월을 거슬러 타임머신을 탔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분들은 이곳 군자정에서 많은 세월들을 보냈다고 한다. 살다간 시대는 달라도 나와함께 겹쳐 들어오고 있었다. 풍류의 대가인 이집 종손 출신 이종악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같이 놀고 있다. 역사가 살아 있는 이곳 군자정에서 하룻밤을 보내니 만감이 교차되는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빗소리가 들린다. 아침이다. 더 누워있고 싶어도 누워 있을 수가 없다. 평소 5시에 일어나는 습관 때문이다. 오늘은 2008년 7월 19일이다. 아침 목욕 갈 희망자를 모집했다. 겨우 한 분만 따라나선다.

7시에 이집에서 차려주는 정갈한 아침을 먹고 8시에 출발했다.

 

 임청각  대청마루

 

제일 먼저 가는 답사처는 택리지에 나오는 4길지 중 한 곳인 의성김씨의 종가집인 내앞종택이다.

 

안동 시내에서 영덕 방향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한 15분 올라가다 보면 국도 연변 좌측에 고풍스런 기와집들이 즐비한 마을이 나타난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의성 김씨 집성촌인 천전마을이다.

의성 김씨는 신라 56대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의성공 김석(金錫)이 시조다. 신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신라 왕통을 계승할 수도 있었다. 경주 김씨와는 같은 조상을 두고 있는 셈이다.

의성공의 후손인 김만근이 임하현 오씨에게 장가들면서 처가가 있는 내앞 마을에 터전을 잡았다. 내앞의 의성 김씨 대종가는 김만근의 손자인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을 불천위를 모시는 종가이다.

 

이 집은 보물 제 4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6세기에 불에 타 버렸던 것을 학봉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다.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그 곳 상류층 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서 완성했기 때문에 그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많다고 한다.

이집 안채는 口자형이고 다른 주택과 달리 안방이 바깥쪽으로 높게 자리를 잡고 있다. 행랑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 가옥 구성이 巳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학봉선생은 무남독녀인 안동 권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의 재산으로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내앞종택 전경

 

이중환은 택리지의 복거총론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정하는 데에는 네 가지의 기본 조건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한 가지라도 모자라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지리(地理)가 아무리 좋아도 생리(生利)가 부족하면 오래 살 만한 곳이 못 되고, 생리(生利)가 아무리 좋아도 지리(地理)가 나쁘면 또한 오래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또 지리(地理)와 생리(生利)가 모두 좋아도, 인심(人心)이 좋지 못하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고, 가까운 곳에 경치 좋은 산수(山水)가 없으면 정서를 키우지 못한다고 주장을 한다.

 

여기서 첫째인 지리는 풍수를 말한다. 지리는 먼저 수구(水口 ,집앞에 물이 드나드는 입구를 말하는데 입구가 좁아야 좋다)를 보고, 그 다음은 들의 모양을 본다. 다음으로 산의 모양을 보고, 그 다음으로 흙의 빛깔을 보고, 그 다음은 조산(朝山, 멀리 앞으로 보이는 산)과 조수(朝水, 앞으로 흘러드는 강)를 본다.

두 번째가 생리다. 생리는 그 땅에서 얻어지는 생산품이다. 즉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자다. 따라서 비옥한 땅이어야 한다.

셋째가 인심이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성품이 착하고 인심이 좋은 곳을 말한다.

넷째가 산수다. 즉 경치가 아름다워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부자들이 강남에 모여 산다거나 심지어 같은 아파트 라인이라도 층수에 따라서 햇빛과 경관이 좋은가에 따라 몇 억이 차이가 날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택리지에서는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이 부합하는 곳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우리나라 지세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발원한 강물은 유유히 흐리지 않고 쏟아지듯 급히 흐르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강가에 정자를 지으면 지리의 변화가 많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시냇가에는 평온하고 아름답고 시원하고 깨끗한 운치가 있는데다 물을 끌어 들여 농사 짓는 편리함이 있다. 그래서 ‘바닷가에 사는 것이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이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海居不如江居 江居不如溪居)’는 것이다. 시냇가에 살만한 곳으로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첫째로 꼽는다. 중략 ...

이밖에도 안동 동남쪽에 또 임하천이 있으니 청송읍 시내 하류가 황지 물과 합치는 곳이다. 이 임하천에는 학봉 김성일의 옛집이 있는데, 지금도 집안이 번성하여 이름 있는 마을로 남아 있다. 그 옆 위쪽에는 경치 좋은 몽선각과 도연선찰이 있다.” 「택리지」-이민수 역, 평화출판사-

 

이상이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살았던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선비들이 살 만한 곳은 바닷가도 아니고 강가도 아닌 시냇가가 최고라는 의미다. 따라서 퇴계(退溪)선생도 시내 계(溪)를 쓰고 이집의 불천위인 청계(靑溪)공도 시내 계를 쓴다. 상계에 토계가 있다면 이곳 내앞에는 반변천이 있는 것이다.

 

안동 지방에서 회자되는 말 가운데, ‘천금(川金)이 쟁쟁(錚錚)이요 하류(河柳)가 청청(靑靑)’이라는 말과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즉 내 앞에 사는 의성 김씨들은 쇳소리처럼 쟁쟁하고, 하회에 사는 풍산 류씨들은 푸른 솔처럼 청청하다’는 내용이다. 의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절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3년에 한 번씩은 강이 범람을 해야 비옥한 옥토가 되듯이 유가에서는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였던 선비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다.

이 두 가지 속담에 다 해당하는 곳이 바로 내앞종택인 것이다. 이곳이 명문으로 알려진 계기는 자녀교육 때문이다. 불천위인 청계공은 아들 다섯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다. 이때 붙여진 이 집의 이름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다. 일제 강점기에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지은 ‘조선(朝鮮)의 풍수(風水)’에도 명택의 사례로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밝은 달 아래에서 귀한 사람이 입는 옷[紗]을 세탁하는[浣] 형국)에 자리잡은 오자등과택이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룡은 약봉 김극일(藥峯 金克一, 1522-1585), 귀봉 김수일(龜峯 金守一, 1528-1583), 운암 김명일(雲岩 金明一, 1534-1570),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 1541-1591)이다.

어제 처음으로 답사한 학봉종택의 학봉이 바로 이 집의 넷째 아들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제미 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내앞종택 설명

 

청계공이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사자암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떤 관상가에게서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參判)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이 집 현판에는 ‘寧須玉碎 不宜瓦全(영수옥쇄 불의와전,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글귀가 있다. 그리고 평소에도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줄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볼 것이다(人寧直道以死 不可枉道以生 汝等爲君子而死 則吾視猶生也 爲小人而生 則吾視猶死也, 인녕직도이사 부가왕도이생 여등위군자이사 칙오시유생야 위소인이생 칙오시유사야)’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 글은 이 집 자녀교육의 요체다. 이러한 교육이야말로 금부도사가 세 번 올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키워준 것이다. 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라는 의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것이 인간의 목숨인데 ...

이러한 교육의 힘은 구한말 의병운동과 만주 독립운동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천전 문중에서만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32명이다. 그 중 학봉 후예는 15명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단일가문 중에서 가장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백하 김대락(白河 金大洛, 1845-1914년),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과 월송 김형식(月松 金衡植) 등이 모두 내앞분들이다.

 

 내앞종택 사랑채

 

여기서 한 번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병호시비이다. 학봉종택을 이야기 할 때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여기서 정리하고자 한다.

병호시비(屛虎是非)의 병(屛)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이고, 호(虎)는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지칭하는 말이다.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가리자는 것이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선생을 지칭하고, 호계서원은 학봉 김성일선생을 지칭한다. 이 두 분은 살아 생전에는 퇴계선생에게 함께 동문수학한 수제자들로서 매우 사이가 좋았다. 서애의 장손인 류원지의 처는 학봉의 증손녀이자 퇴계의 둘째 손자인 이순도의 외손녀이다. 즉 퇴계 학봉 서애가문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것이다.

 

이렇게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에 다툼이 벌어진 것은 퇴계선생을 모신 호계서원(당시 여강서원)에 수제자 두 분을 함께 모시고자 했다. 그런데 퇴계선생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관직에서는 직위의 서열이 영의정 다음에 좌의정, 우의정이 순서다. 좀 더 서열이 높은 분을 왼쪽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 제자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이는 학봉이 네 살이 많고, 벼슬로 보면 서애는 영의정이고 학봉은 경상감사였다. 서애 쪽에서는 영의정 벼슬이 더 높으니 서애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쪽에서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서애와 학봉의 인물이나 학문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서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과 학봉의 사상을 숭상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치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풍산 류씨와 이곳 의성 김씨 간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양쪽의 주장과 세가 팽팽히 맞서 결말이 나지 않자 당시 상주에 있던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에게 판단을 물었다. 당시에 정경세란 분은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받았다. 서애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했고 왕자의 사부까지 지낸 국가의 원로다. 뿐만 아니라 영남학파의 좌장으로서 널리 존경받고 있던 사람이다.

판단의 내용은 ‘두 선생의 연치(年齒)차는 견수(絹隋)에 미치지 않고 작위(爵位)의 차는 절석(絶席)에 있다’라고 했다. 이는 연장자와 함께 갈 때는 조금 뒤에 떨어져서 따라 가지만 벼슬 차이인 영의정과 경상감사는 같은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서애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이는 우복이 서애의 문하생 출신인 것도 한 몫 한 것이다.

서애를 좌(左)로 학봉을 우(右)에 모시도록 했다. 그래서 학봉 측은 거역할 명분이 없자 일단 승복으로 첫 번째 시비는 끝났다. 그러나 여기서 두 번째 시비가 벌어졌다.

 

1805년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학봉, 서애와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1637)의 네 분을 문묘에 종사하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려는데, 누구를 앞에 적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한강과 여헌은 관직의 높낮이를 크게 중시하지 않은 분들이라서 나이순으로 학봉을 앞에 올렸다. 그러자 서애 쪽에서 서열이 잘못됐다고 따로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아예 모두를 기각해 버렸다. 이로서 두 번째 시비가 끝이 났다.

 

마지막인 세 번째 시비는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이 된 한강과 여헌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억울하게 문묘 종사의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따라서 한강과 여헌의 제자들이 두 분을 따로 대구의 이강서원에 모실 것을 결정했다.

이에 안동 유림은 이를 규탄하는 통문을 썼다. 이때 통문의 작성이 학봉 쪽이었던지 이번에도 학봉을 앞에 거명했다. 서애파는 다시 이것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시비이자 마지막이다. 이 세 번째 시비로 인하여 서애파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서애를 병산서원에 따로 모셔가게 되었다. 결국 이황은 도산서원에, 학봉은 임천서원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갈라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200여 년간에 걸친 병호시비가 끝이 났다.

 

모실 분을 잃어버린 호계서원은 사당 없이 강당만 남았다가 안동댐 건설로 서원 자리가 수몰되자 임하면 임하리로 옮겨가 버렸다. 작년에 임하댐에 가보니 호계서원은 댐 밑에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쓸쓸하였다. 옆집에 개를 몇 마리 키우고 있어 개짓는 소리가 하도 크고 위협적이어서 제대로 답사도 못했다.

임천서원은 본래 임하면 임하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09년에 안동시 송현동으로 옮겨 다시 세워져 지금에 이르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농암 종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회자되는 얘기지만 상계도 처음에는 호론(虎論)이었고, 표면상 중립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퇴계 10대 종손 고계 이휘령이 예천 맞질의 도회(道會)에 참석했을 때 진행자가 '어느 쪽인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고계는 '우리는 非屛非虎(비병비호)입니다.'라고 답변했다 한다. 중립이라는 얘기다. 젊은 퇴계 종손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수사였다. 그러나 이 말은 즉시 공박을 받았다. 참석자들은 '그렇다면 그대는 非班非常(비반비상) 아닌가" 했다. 이 공박은 결국 상계를 병론으로 굳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상계의 병론으로의 입장 정리는 진성 이씨 전 문중을 병론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하계만은 끝까지 호론의 입장을 견지했다."

- 이성원 토계로의 여행-

 

또 다른 자료인 '豊柳마을'의 류현우씨의 글에서 병호시비에서 상소를 올린 문중 순서를 보면
병파(屛派) ; 개성고씨(산양 녹문),안동권씨 화산파(가일),

선성김씨(무섬 우금),순천김씨 김윤안(구담),풍산김씨(오미 오록) 하회 우천,우복 정경세,선성이씨 고산파(상리),회재파(양동) 옻골

호파(虎派) ; 의성김씨(내앞 지례 금계 귀미 해저),전주유씨(무실 박실 대평 삼산),광산김씨 후조당파(외내),안동김씨 보백당파(묵계),상락김씨 송은파(사촌),경주손씨 우재파(양동) 풍양조씨 검간파(승곡 운평),전주최씨 인재파(해평)

비병비호 ; 상계파, 한양조씨 호봉파(낙남세력,검남,3불차,양력)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영남의 전 유림이 두 편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두 곳 중 한 곳을 택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라는 의미도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병호시비를 부정적으로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많다고 여겨진다.

두 집단 간의 경쟁이 다양한 측면에서 발전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 세상에는 경쟁이 없으면 퇴보한다. 즉 발전이 없다. 물론 선의의 경쟁이면 가장 좋다. 이러한 긍정적인 예로서 문벌(文罰)이라는 게 있다. 문벌이란 선비답지 않게 파렴치한 행위를 한 자에게 그 죄상을 열기(列記)하여 서원의 벽에 붙여두는 것을 말한다. 선비가 문벌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견딜 수 없는 치욕(恥辱)으로 생각했다.

 

이는 세계 역사상 어느 나라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처럼 사고나 생각이나 사상의 차이에 따라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최고의 치욕을 느낀다는 것은 문화민족의 표본이다. 생존이라는 기본적인 대명제가 일단 해결되고 난 후 삶의 질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격론을 벌인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사회과학 이론인 Maslow의 욕구이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병호시비는 생리적인 욕구의 문제로 다툰 것이 아니라 존경의 욕구나 자아실현 욕구를 가지고 다툰 것이다. 즉 고급의 다툼인 셈이다. 병호시비는 선의의 경쟁이라는 측면이 더 많다. 가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더욱더 학문과 수신에 전념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가문 사이에 벌여졌던 선의의 경쟁이 ‘천금(川金)이 쟁쟁(錚錚)이요 하류(河柳)가 청청(靑靑)’하다는 선비정신을 영원히 지속시킬 것이다.

 

내앞 종택을 나와 다음 답사처로 향했다. 어제밤만 해도 16일 보름달이 훤하게 밝았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제법 많이 온다. 옷이 젖을 정도로 많이 온다. 차는 어느새 영양을 지나고 있다. 요즘은 영양하면 영양고추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영양은 한국문학의 산실이다. 작가 조지훈, 이문열, 김주영의 고향이고, 우라나라 인문학의 대가인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가 모두 주실마을 한양조씨들이다.

 

 

 지훈 문학관과 호은종택

 

조지훈 시인의 고향인 주실마을에 도착을 했다. 1년만에 다시 온 것이다. 다행히 우리 일행이 차에서 내리면 비가 잠시 멈춰 주었다. 하늘이 우리들을 돌본다고 느껴진다. 아마 우리 일행 중에 누군가가 삼대 적선을 한 분이 있었을 게다.

지훈문학관은 일 년 전이나 다름없이 그대로다. 선생님들은 이곳이 처음이라 아주 기뻐한다, 특히 국어선생님 중 한 분은 너무 감사하다고 한다. 문학관 견학을 하고는 생가를 찾았다. 이곳 마을 출신이면서 지훈 시인과는 인척이 된다는 문화해설사 분이 이 마을에 대한 설명을 구수하게 잘 한다.

설명의 내용은 나의 여행기 ‘주실마을과 지훈문학관’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분에게서 새로운 설명을 들었다. 이 마을에서 인물이 많이 나오고 학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나온 데에는 문필봉의 영향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관계라고 한다. 따라서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자식들을 공부시킨 결과라고 해석을 한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우리 일행은 다시 영남의 최고 정자로 평가 받고 있는 서석지로 갔다. 호남을 대표하는 정자가 소쇄원이라면 영남을 대표하는 정자는 서석지다. 서석지는 언제 누구와 함께해도 좋다. 그만큼 멋진 곳이다. 이 마을 전체가 멋이 있는 동네다. 다들 즐거워한다. 모부장은 동심으로 돌아가 서석에 앉아도 본다. 이 서석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석간수를 이용하여 연못에 물을 채운다. 이곳은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여 자연과 인간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멋으로 만들었다.

 

 

 서석지

 

아쉬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답사처인 봉감모전오층석탑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아직까지도 때가 묻지 않은 순수성을 갖고 있다. 강가에는 지금도 수달이 서식할 정도로 깨끗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의 찾지를 않는다. 명색이 국보인데도 말이다. 이 탑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봉감모전오층석탑

 

이곳에서 달기 약수까지는 30분이 소요된다. 달기약수까지 가는 길도 아름답다. 달기약수에서 닭백숙을 맛있게 먹었다. 나는 내 차를 가지고 왔기에 따로 출발을 했다. 조금 둘러가더라도 동해바다가 보고 싶었다. 여기서 작별을 고했다. 동해안을 따라가고 있는 중에 교무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모두 다 무사히 학교에 잘 도착했다고 ... 이것으로 올 하계직원 연수가 끝이 났다.

 

한편으로는 흐뭇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함께 한 사람들과는 많은 문화적 경험과 인간애를 공유했기에 흐뭇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함께 하지 못한 분들과는 그런 경험을 공유하지 못해서 섭섭했다. 올 겨울 동계 직원연수에는 꼭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수가 되었으면 한다. 함께하는 직원연수는 생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면 같이해야 한다. 이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애에 대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이 연수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신 교장선생님과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여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해준 상조회 회장님과 총무님 그리고 이 글에 좋은 사진을 제공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더욱더 알차고 재미있을 겨울방학 연수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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