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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남해안을 따라 추자도까지-2

by 황교장 2010. 1. 2.

남해안을 따라 추자도까지-2

 

 하동IC에서 조금만 더 가면 섬진강이 나온다. 섬진강을 건너면 전라남도다.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섬진강 휴게소가 나온다. 매번 이 길을 지날 때는 습관적으로 들린다. 특히 지역특산물을 파는 곳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매실사탕과 복분자로 만든 젤리를 샀다. 운전할 때 졸리거나 심심하면 사탕이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약 20여 분만 달리면 승주IC가 나온다. 승주IC는 선암사나 낙안읍성으로 가려면 제일 빠른 길이다.

승주에서 표지판을 따라 10여 분 달리면 선암사와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이 둘로 갈라진다. 선암사에 잠간 들렀다가 가려다가 낙안읍성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경험 상 목적지를 정했으면 그대로 추진을 해야지 주변의 이곳저곳을 들르면 결국 목적지에 가지 못한 때가 많았다.

 

 낙안읍성은 그동안 너무 많이 다녀온 곳이라 그냥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지나쳤다. 낙안(樂安)이란 이름이 마음에 드는 곳이다. 즐겁고 평안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 역시 이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평안함과 즐거움을 받을 것이다. 풍수로 보아도 낙안은 양반이 살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있다. 낙안들판이 거의 끝나는 지점이 벌교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이자, “순천에서 인물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하지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 하지 마라.” 는 바로 그 벌교다.

20여 년 전에 태백산맥을 읽고 감동을 받아 문학기행을 온 곳이 벌교, 보성, 선암사, 지리산 등이다. 벌교역을 지나가니 염상진보다는 오히려 그의 동생인 염상구라는 인물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벌교역 앞 다방에서 온갖 나쁜 수작을 다 부리는데도 미워할 수 없는 인간적인 특성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에서 벌교 꼬막맛으로 표현되고 있는 외서댁은 식당 간판에도 등장하고 있다. 음식점 간판에 가장 많이 눈에 뛰는 것은 꼬막정식이다. 벌교꼬막의 인기를 반영하는 것일 게다.

 

 

벌교를 지나면 보성-장흥-강진으로 이어진다. 강진에서 완도 표지판을 따라가면 두륜산 뒤편으로 이어져 완도로 연결이 된다. 이 길과 함께 하는 산의 기운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두륜산에서 달마산 뒤편까지 이어져 땅끝으로 연결이 된다. 풍수상 인물이 나올 수 있는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가면 해남과 완도로 이어지는 국도가 나온다.

완도로 들어가는 초입은 아직도 공사 중이나 조금만 가면 사차선 도로가 잘 나와 있다. 곧장 완도읍으로 이어져 있다. 끝까지 가면 완도 여객 터미널이다. 여객터미널에서 추자도 가는 배편을 알아보니 아침 7시 30분 출발이다. 선착장과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완도는 전복으로 유명하다. 완도에 온 김에 전복으로 만든 요리를 다 먹어보고 싶었다. 전복회와 전복구이, 전복죽을 다 시켰다.

여행을 왔을 때는 값이 조금 더 비싸더라도 가능하면 맛있는 집을 찾는다. 전복회와 소주 한 잔, 전복찜과 소주 한 잔을 천천히 음미를 했다.

 너무 욕심을 부렸다. 많이 남았다. 남은 음식은 싸 달라고 했다.

 

 완도부두

 

12월 27일 일요일 아침이다. 눈을 뜨니 4시 반이다. 시간이 남아 가지고간 책을 읽었다. 나에게 섬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최성민 기자의「섬 오메 환장허겄네」(웅진출판, 1995.7.15. 초판 1쇄)다.

이 책을 본 이후로 섬에 대한 관심을 가져 아주 작은 섬들 외에는 많은 섬들을 가보았다. 이중 아직 가보지 못하고 남은 곳이 추자도와 가거도 정도이다. 이번에 추자도에 다녀오고 나면 가거도가 남는다.

 

6시 50분에 선착장에 도착하여 표를 샀다. 완도에서 추자도 신양항까지 요금은 21,100원이다. 배는 한일카훼리 3호다. 1호와 2호는 완도-제주도로 바로 가는 배이고 3호만이 하추자도 신양항에 들렀다가 제주로 출발한다.

 

배는 정확하게 7시 30분에 출발했다. 2년 반 전에 청산도 갈 때는 무려 한 시간 반이나 연착을 했는데 이번에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을 했다. 날이 맑아 해돋이를 보기 위해 2등 객실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오메가 일출 

 

해 뜰 시간이 되자 바다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직감적 오메가 일출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해 뜰 때의 모습이 마치 오메가(Ώ)처럼 보인다고 해서 오메가 일출이라고 하는 이 일출은 삼대가 적선을 해야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 1996년 12월 30일 욕지도에서 통영으로 가는 배 위에서 오메가를 만났고 그 이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배의 제일 위층인 3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메가 일출이다. 흥분된 마음에 캔맥주를 한 캔 사들고 마셨다. 맥주 맛이 기가 막혔다. 역시 인간은 감정의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 기분에 따라서 맥주 맛도 달라지니 말이다.

 

배는 청산도와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로 가고 있다. 청산도 뒤편으로 여서도가 보인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제법 뚜렷이 한라산도 보인다. 한라산 분화구가 있는 백록담의 형태가 특이하여 제법 뚜렷하게 보이다가 구름이 많아지면서 구름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나마 여서도는 뚜렷하게 보인다.

 

여서도는 “그 섬에 가면 애 배 나온다!”는 섬이다. 여서도는 뱃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청산도 돌아갈 때까지는 장담을 해도 여서도까지는 가 봐야 안다.”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바다의 날씨는 장담을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의 해녀들이 여서도에 왔다가 풍랑으로 뱃길이 막히면 보름이나 한 달간 여서도에 갇히게 되어 ‘씨앗’을 ‘산적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여서도 남자와 한 이불을 덮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이래저래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자진해서 어느 무성한 보리밭 골로 들어간 짝도 있었을 것이라고 최성민 기자는 농담 아닌 농을 하고 있다.

 

여서도가 있는 위치를 보니 혼자 외롭게 떨어져 있다. 파도가 아주 강할 것 같다. 언제 기회가 되면 여서도에 답사를 한번 하고 싶다. 어느 무성한 보리밭 골에서 씨앗을 산적할 기회가 올지?

 

 추자군도

 

추자군도가 눈에 들어왔다. 많은 섬들이 올망졸망 눈에 들어 왔다. 신이 빚어낸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윽고 배는 추자도에 도착했다. 10시 20분이다.

 

추자도에 내린 사람 중 나를 제외하고는 이곳 추자도의 주민들뿐이었다.

나머지 손님은 모두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추자도에 도착하여 관광안내판을 보고 있으니 전경이 다가와 관광객이냐고 묻는다.

추자도 일주를 트레킹을 하고 싶다고 하니 2시간만 하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우선 마을 뒤로해서 산 정상인 돈대산에 오르면 추자도를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정상 뒤쪽으로 내려가서 상추자도로 이정표로 잡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배에서 같이 내린 분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추자도에 맛있는 음식점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을 했다.

이곳 하추자도에는 없고 상추자도에는 많다고 한다. 버스가 곧 도착할 시간이니 자기들하고 같이 버스를 타고 상추자도로 가자고 한다. 걸어서 상추자도에 갈 것이라고 하니깐 너무 먼 거리라서 걸어서는 못 간다고 만류를 한다.

 

못 이기는 척하고 버스를 탔다. 제법 먼 거리다. 추자도는 상추자도와 하추자도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섬의 면적은 하추자도가 넓다. 그러나 인구는 상추자도에 더 많이 살고 있다. 추자도의 중심지는 상추자도다. 학교, 관공서, 목포로 가는 쾌속선 터미널이 상추자도에 있다.

 

 상추자도

 

상추자도에 내려 중심가 일대를 걸어서 식당을 찾았다. 제법 식당들이 많이 있다. 그 중 수족관에 물고기들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았다. 물고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장사가 잘 되어 회전이 빠르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생선회 작은 것 하나 시켰다. 싱싱한 농어회다. 양도 아주 많다. 소주 한 잔에 농어회 한 점이 순간적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번 여행길을 더욱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맛있는 생선회다. 회를 먹고 나니 탕이 나왔다. 그런데 부산의 매운탕하고는 탕의 색깔부터가 다르다.

 

부산에는 고춧가루를 많이 넣어서 붉은 색을 띠는데 이곳의 탕은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맑은 탕이다. 한 술 떠 먹어 보니 정말 담백한 맛이다.

싱싱한 생선뼈를 푹 잘 고은 맑은 국물은 완전 보약을 먹는 기분이다. 큰 생선뼈를 아주 잘 고아서 뼈의 속까지 잘 우러나오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맛이다.

 

 

배가 너무 부르다. 그런데도 생선회는 많이 남아 있다. 주인에게 추자도를 걸어서 한 바퀴 돌려고 하는데 남은 회랑 젓가락 하나 된장만 조금 싸 달라고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식당에서 나오자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띈다.

최영장군 사당으로 가는 표지판이다. 이 먼 곳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는 데에는 필경 곡절이 있을 것이다.

 

 

 최영장군 사당과 영정

 

표지판을 따라가니 초등학교가 나온다. 초등학교 뒤편에 자그마한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사당 안내판을 보니 고려 말 제주도에 몽고 세력인 목호(牧胡)의 난을 토벌하고 돌아가던 최영 장군이 풍랑을 만나 이 섬에 머물면서 주민에게 어획법과 영농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에 주민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다.

 

위대한 인물이 남긴 선행의 발자취는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어 나 같은 나그네의 발길을 머물게 만든다.

 

추자도 다리

 

최영장군의 사당을 나와 하추자도로 향했다. 트래킹하기에는 적당한 날씨다. 구름이 많아 가시거리가 안 좋아졌다. 하지만 한라산만 제외하고는 주변의 섬들이 다 보이는 날씨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버스를 타고 지나온 곳과 버스가 가지 않는 곳으로 길이 나누어진다. 버스가 가지 않는 뒷길을 따라 걸었다.

한 시간 이상 걸었는데도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다. 길 가장자리에는 아직도 전혀 시들지 않는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구절초

 쑥부쟁이

 

내가 길이고 길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무념무상으로 걷는다. 우리 인간은 수 만년 동안 먹이를 구하기 위해 걸었다고 한다.

인간이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조상들로부터 물러 받은 유전인자 때문이라고 한다. 걷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즐거움을 준다.

사람의 발걸음은 대단하다. 뒤돌아보니 출발점인 최영장군의 사당이 저 멀리에 있다. 갈림길이 나왔다.

 

 끝에 보이는 곳이 상추자도

 끝에 보이는 곳이 하추자도 예초리

 

갈림길 표지판에는 예초리 방향으로 황경헌의 묘 1.8km라고 되어 있다. 나와 같은 성씨이자 같은 본이다. 먼 할아버지뻘인 셈이다.

 

이분은 추자도 창원 황씨의 입도자다. 여기에는 씁쓰레한 역사가 숨어 있다. 황경헌은 황사영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천주교의 전래를 말하면 빠질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다. ‘황사영 백서사건’은 1801년(순조 1년)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당시 베이징에 머물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한 사건이 발각되어 처형당한 사건이다.

백서란 명주천에 쓴 편지라는 의미다.

백서의 내용에는 신유박해의 경위와 실태, 순교자들의 약력, 청나라 천주교 선교사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 등과 나라에 반하는 내용을 적었다. 하지만 편지는 보내는 도중 압수되었고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편지 원본은 1925년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교황에게 기증하였다고 한다.

 

1801년 황경헌(黃景憲)은 아버지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어머니 정난주가 제주 대정골로 유배 가다가 추자도에서 생이별했다.

당시 황경헌은 2살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다산선생의 조카이자 황경헌의 어머니인 정난주는 두 살짜리 아들을 안고 제주도 유배길에 올랐다. 마침 이곳 예초리 ‘물생이끝’을 지나고 있었다.

이곳은 물살이 아주 센 곳으로 지나는 배가 섬 가까이로 바싹 붙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여기에 이르러 배가 육지에 붙었을 때 정난주는 순간적으로 아이를 섬바위 위에 내려놓고 떠나 버렸다.

아이를 제주까지 데리고 갔다가는 생명을 부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시각에 예초리 사람 오상선은 소를 먹이러 이 벼랑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방금 바다로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디서 애기 울음 소리가 들려와서 그 울음소리를 따라서 가보니 절벽 바위 위에 돔방에우(배내옷의 추자말)를 입은 사내애가 울고 있었다.

오씨는 이건 필경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준 아이로 알고 기쁜 마음에 이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배내옷 속에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로 황경헌(黃景憲)이었다. 오씨는 황경헌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그로부터 황씨와 오씨 사이에는 혈연으로 여겨 결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황경헌의 자손들도 5대쯤 이어져 오다가 한때는 7∼8호까지 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1가구만 남아 있다고 한다.

황경헌의 무덤에는 김수환 추기경도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다녀갔다고 한다.

 

 신양항

 묵리마을

 

이러한 슬픈 역사를 떠올리면서 산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에 도착하는 순간 배에서 내릴 때 전경이 마을 뒤로 걸어서 돈대산 전망대에 바로 가기를 권유한 이유를 알았다. 추자도와 주변의 섬들이 눈에 다 들어온다. 보길도는 아주 뚜렷하게 보이고 한라산은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다.

 

추자도가 제주도에 속하지만 사람들의 언어나 풍속은 전라도와 가깝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풍수상 추자군도는 전라도의 섬들이 이어진 것이지 한라산과 이어진 섬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나 지형적으로나 전라도와 가까운 땅이다.

 

 보길도

큰덜섬과 보길도

 

제주도와 추자도의 차이 중 몇 가지의 재미있는 특징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제주도에서는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추자도에서는 전날 밤에 차례를 지낸다. 추석에는 아침 일찍 산소를 다녀와서는 부녀자들은 음식을 싸들고 들이나 산으로 나가 강강수월래를 즐긴다. 제주에는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2. 물건을 나르는 방식도 추자도 사람들은 거의 머리에 이고 다닌다. 제주에서는 물건을 등에 지고 다닌다. 이는 제주도보다는 추자도가 바람이 적게 분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처럼 추자도는 전라도문화권의 영향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추자도의 지리와 역사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자도는 한반도와 제주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8.3㎞ 떨어져 있다. 상추자도, 하추자도, 추포도, 황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주변에 산재한 38개의 무인도와 함께 추자군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추자군도를 이루는 섬은 실제 1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 중 가장 아름다운 열 곳을 지정하여 추자십경이라고 한다.

 추자십경은 다음과 같다.

1.우두일출(소머리 모양 우두섬의 해돋이)

2. 직구낙조(직구섬의 아름다운 저녁노을)

3. 신대어유(황금어장 신대에서 고기떼가 노는 모습)

4. 수덕낙안(사자섬 절벽에서 기러기가 바닷속으로 내려 꽂히는 장면)

5. 석두청산(석지머리 청도의 푸른 소나무)

6. 장작평사(산양포구 장작지의 자갈 해수욕장)

7. 추포어화(추포도 멸치잡이 어선의 불빛)

8. 횡간귀범(횡간도로 돌아오는 고깃배들의 풍경)

9. 곽개창파(관탈섬 곽개의 무심한 푸른 파도)

10. 망도수향(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보름섬의 고향 그리움).

 

고려시대인 1272년(원종12)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의 이름은 추자도가 아닌 후풍도다. 그러나 그 후 추자도라고 불렸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전남 영암군에 속하면서 추자도로 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섬에 추자나무 숲이 무성한 탓에 추자도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추자도는 역사적으로 전라남도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제주목에 편입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오늘날까지는 제주도에 속한다.

이런 추자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제주 속의 전라도’라 할 정도로 생활풍속이나 언어가 전라도와 비슷하고 생활필수품의 90% 이상을 목포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제법 많은 젊은이들이 제주도에 건너가서 학교를 다녔다. 이들의 정체성은 비교적 제주도에 가깝다고 한다.

 

지리와 역사란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들이 살아온 모습이 총체적으로 나타난 것일 게다. 추자도는 지금 도약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추자도 주민자치위원회는 추자도의 진면목을 제대로 홍보하자는 뜻에서 ‘2010 추자도 섬 체험의 해’로 선포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참굴비·섬 체험 특구’로 지정받았다. 따라서 관광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스스로 나서게 됐다.

주민들은 ‘추자도 올레 코스’ 개발, 쉼터 정비, 무인도 생태 탐방, 풍광 사진전, 참굴비 대축제 프로그램 개발 등을 추진한다고 한다.

 

개인적인 바람은 개발도 좋지만 자연을 살리면서 개발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다면 추자도에는 자동차를 규제했으면 좋겠다. 차 없는 ‘추자 올레길’을 많이 만들었으면 한다.

다시 올 때는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추자도의 생태체험도 해보고 아름다운 추자십경을 다 보고 싶다.

 

다시 선착장에 오니 무려 한 시간이나 남아있다. 식당에서 싸준 회를 선착장에서 풀어보니 아직도 싱싱하고 몇 가지 안주를 더 넣어 놓았다. 선착장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호젓하게 즐기고 있는데 한때의 낚시꾼들이 들이 닥쳤다.

말씨를 들어보니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다. 아니나 다를까 부산사람들이다.

내가 술 한 잔과 회 한 점을 권하니 자기들 일행이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선착장 안이 비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들이 닥치고 있다. 모두가 낚시꾼들이다. 낚시꾼들의 관상을 보니 별로 좋은 상은 아니다.

물론 추운 바닷바람을 쏘이다가 온 원인도 있겠다.

하지만 하고 많은 취미생활 중 하필이면 살생을 택할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회는 좋아해도 낚시는 싫어한다. 특히 지렁이 냄새가 싫고 살아있는 고기를 잡는다는 게 싫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선가 나의 전생록을 보니 고승 출신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낚시에는 관심이 적다.

 

배가 오후 3시 40분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으나 4시가 넘었는데도 도착을 하지 않았다. 풍랑이 거칠어서 그렇다고 한다. 4시 5분에 기적소리를 울린다. 제주도를 출발한 배가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에 올 때는 자리가 넉넉하여 아주 편하게 왔는데 앉을 자리가 없다.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신문지를 깔고 잡담을 주고받거나 술판을 벌리고 있다.

일요일 마지막 배이기에 제주도로 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이다. 겨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무사히 완도항에 도착하니 겨울밤은 일찍 어두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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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여기서 부터 온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진 백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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