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

보길도 2-고산 윤선도

by 황교장 2010. 1. 10.

보길도 2 - 고산 윤선도

 

중리해수욕장을 나와 선착장으로 가는 길가 마을에는 아직도 노란 유자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한겨울의 색다른 풍경이다.

선착장을 지나 이정표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명승 제34호로 지정된 ‘보길도윤선도원림’을 만난다.

 

 

고산 윤선도 선생이 51세 때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신했다. 당시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선생은 왕을 돕기 위해 수백 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다.

 

도중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태종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산은 청나라 오랑캐에게 항복한 것이 억울하여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가복(家僕)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해 떠났다.

 

남쪽으로 가는 도중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을 발견했다. 섬에 올라 산수를 보니 천하의 길지였다. 그만 제주도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그곳에다 터를 잡았다. 그 섬이 보길도 부용동(芙蓉洞)이었다고 한다.

 

 세연정

 

부용동의 입구에는 매표소가 있다. 우리나라 관광지의 문제점 중 하나는 곳곳에 돈을 받는다는 데 있다.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특히 여름철에 받는 자연발생유원지의 입장료는 더욱 그렇다.

물론 이해는 된다. 쓰레기와 관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받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볼거리 먹을거리 등을 만들어 그 지방자치단체의 세금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세연정 옆 초등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면 매표를 안 해도 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체통을 살려 매표를 하고 들어갔다.

 

세연정은 민간인이 만든 연못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호화롭고 아름다운 조경을 자랑하는 정원이라고 한다. 세연(洗然)이란 의미는 ‘주변의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세연지

 

고산의 5대손인 윤위가 쓴 기행문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의하면

“일기가 청화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 서대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 도(島)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그른 적이 없었다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명의 무희들이 춤을 추었다고 하는 동대와 서대를 지나 연못 사이에 위엄 있게 서있는 세연정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자세한 설명서를 붙여 놓았다. 천천히 한 바퀴를 쭉 둘러보면서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판석보(板石洑)와 혹약암(惑躍岩)이다.

 

판석보는 세연지에 물을 채우기 위해 만들었다. 보(洑)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라고 한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다.

 

 판석보

 

 혹약암

 

세연지의 계곡에 있는 일곱 개의 바위 중의 하나인 혹약암에 더욱더 관심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혹약암(惑躍岩)에 대한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세연지 계담(溪潭)에 있는 칠암(七岩)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易經'의 건(乾)에서 나오는 '혹약재연(惑躍在淵)'이란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로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혹약재연’은 역경의 ‘건위천’ 괘를 설명하는 효사 중 九四 或躍在淵 无咎(구사 혹약재연 무구, 구사는 혹 뛰어 못에 있으면 허물은 없다)에서 따왔다는 의미다.

이는 실력을 길러 때가 오면 깊은 못을 박차고 물 위로 도약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혹약재연 다음의 효사는 ‘구오’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구오 비용재천 이견대인, 구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이다. 이는 최고의 기회를 만나 최고의 성공을 거두어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쳐보고자 함이다.

 

‘구사’는 ‘구오’가 없으면 큰 의미가 없다.

이것을 보면 고산은 그저 세연정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안빈낙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치부심(切齒腐心)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린 것이다.

기회가 오면 다시 조정에 나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펴볼 수 있기를 갈망하는 데서 혹약암이라고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주역과 풍수의 대가로 알려진 고산다운 발상이다.

 

세연정을 나와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전형적인 시골풍경이다. 부용동이다. 안내표지판에 동천석실로 가는 이정표가 나와 있다. 새로 만든 돌다리를 건너면 동백나무, 광나무, 가시나무 등 난대 상록활엽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

청량한 공기를 뿜어내고 있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따라 10여 분을 올라가면 전망이 탁 트인 곳에 동천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정말 멋진 곳에 자리 잡았다.

 

 동천석실

 

풍수에서 일반적으로 흙이 많은 산은 바위가 있는 곳이 명당이고, 바위가 많은 산은 흙이 있는 곳이 명당이라고 한다.

동천석실은 이 두 가지의 경우를 다 포함하고 있다. 부용동은 전체를 보면 바위보다 흙이 많은 토산이다.

따라서 바위가 많은 곳이 명당일 수 있다. 동천석실이 있는 곳은 바위가 많다. 동천석실이 있는 자리는 바위와 바위의 틈 사이의 흙 위다. 이 흙이 있는 곳에 건물을 지었다. 이는 명당 중 명당이라 생각된다.

이 자리는 강한 기가 응축된 혈자리인 동시에 부용동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관산자리다.  

 동천석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이곳에서 본 부용동은 입구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연꽃처럼 오목하여 부용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전체를 살펴보니 주봉인 격자봉(格紫峯. 425m)에서 혈이 내려와 맺은 곳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낙서재이다. 정말 멋지게 자리를 잡았다. 바로 혈처가 아닌가. 완벽한 풍수다. 고산의 풍수실력을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이런 곳을 발견했으니 제주도에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선생이 동천석실을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한 이유가 이해된다.

 

동천석실(洞天石室)의 동천(洞天)은 신선들이 사는 곳인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나온 말이다.

주변의 사물들을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난(石欄), 석정(石井), 석천(石泉), 석교(石橋), 석담(石潭)으로 명명하고 가운데 명당자리에 겨우 한 몸 누울 수 있도록 한 칸짜리 집을 짓고는 명명하기를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였던 것 같다.

 

고산은 이곳을 신선들이 사는 동천석실이라고 명명하고 자신도 신선처럼 소요하면서 살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꿈에서나마 한 번쯤 꿈꾸어왔던 호사를 그 시절에 이미 고산은 다 누린 것이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동천석실을 내려와서는 낙서재로 향했다. 낙서재로 향하는 길가에는 동백꽃이 피어 있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내가 보았던 동백나무들 중에서 최고다. 고창의 선운사나 강진의 백련사의 동백나무숲보다도 더 자연스럽고 울창하게 보인다.

 

 

낙서재는 한창 복원공사 중이다. 낙서재(樂書齋)는 ‘학문이나 글을 즐기는 집’이 라는 뜻이다. 낙서재는 선생의 보길도 생활에 있어서 처음이자 끝이다. 맨 처음 자리 잡았던 곳도 이곳이요, 생을 마감한 곳도 이곳이다. 낙서재는 선생의 살림집이다.

 

동천석실에서 낙서재를 볼 때는 이 주변의 모든 기운이 이곳에 머물러 있게 보였다. 과연 이곳에 앉아 보니 내 몸도 좋은 기운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낙서재

 

낙서재에서 관산을 해보면 동천석실이 바로 정면에 있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면 바로 좌향이다. 동천석실이 남향이고 낙서재는 북향이다. 아쉽다.

만약에 낙서재가 남향이고 동천석실이 북향이었더라면 낙서재는 더욱더 좋은 명당에 속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낙서재에서 바라본 동천석실

 

선생이 개척한 부용동은 28,000평에 이르는 넓고 장대한 정원이라고 한다. 주변의 산까지도 포함시킨다면 수백만 평의 정원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상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가지 못할 장대한 스케일이다. 부용동 정원에다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자신의 이상향을 건설한 것이다.

 

비단 이것뿐인가. 대대로 이어져온 해남 윤씨 종가의 종손으로서 녹우당의 만 평이 넘는 집과 재물들, 해남 금쇄동의 120만 평의 은거지를 합치면 우리나라 역사상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한 것이다.

 

새벽녘에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학문을 즐겼고, 날이 밝으면 술과 안주, 악공, 미희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고, 그래도 삶이 쓸쓸하고 외로우면 동천석실에 올라 신선을 꿈꾸며 놀았다. 그래도 심심하면 한잔 술에 주옥 같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부사시사 중 동사(冬詞)를 보면

 

압희난 萬頃琉璃(만경유리) 뒤희난 千疊玉山(천첩옥산)

至국悤(지국총) 至국悤(지국총) 於思臥(어사와)

仙界(선계)ㄴ가 佛界(불계)ㄴ가 人間(인간)이 아니로다.

 

앞에는 유리바다 뒤에는 첩첩옥산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仙界(신선)인가 佛界(불계)인가 人間界(인간계)는 아니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시에의 평균 수명에 비하면 85세라는 나이는 하늘이 내린 수명이다. 그런데 선생의 일생 중 20년은 유배생활을 했다. 이는 남과 타협하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에서 왔다고 한다.

이러한 면은 성격적인 결함이라기보다는 강한 에너지다. 선생은 정쟁에서 늘  최일선에 있었다. 요즘말로 표현한다면 서인의 저격수인 셈이다. 이 에너지가 아직도 해남윤씨를  최고의 반열에 두는 것일게다.

 

고산의 최고의 정적이었던 우암과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두 분 다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다. 즉 공동 사부인 셈이다. 이는 서로 뜻만 맞으면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암은 서인이고 고산은 남인이다. 또한 두 분 다 기질 상으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을 사료를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마찰

두 분의 제자인 효종이 붕어하자 장지를 어디로 정하느냐에 있어서 고산과 우암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고산은 장릉, 우암은 홍제동을 추천했다.

당시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摠護使)인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장지를 택하러 가면서 효종 말년에 파직된 고산을 대동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산이 추천한 곳이 수원 장릉자리였다. 그런데 우암은 그곳은 오환(五患)의 염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환은 장지를 정할 때 피해야 하는 다섯 자리다.

 

1. 도로가 날 자리

2. 성곽이 될 자리

3. 연못이 될 자리

4. 세력가에게 빼앗길 자리

5. 농지가 될 자리

 

장지는 우암의 주장대로 홍제동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4년 후인 1673년에 석물에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이장했다. 그곳 역시 문제가 있는 자리였다.

 

2. 두 번째 마찰

효종이 붕어 했을 때 선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인 자의대비가 생존해 있었다. 그런데 법통 상 아들인 효종의 죽음을 맞아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이것이 제1차 예송논쟁이다.

 

우암은 주자의 예법에 충실하여 "자의대비는 이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장자의 예에 따라 3년복을 입었으므로 둘째아들인 효종의 죽음에 임해서는 기년(1년)복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왕위는 계승했지만 장자가 아닌 '체이부정'이므로 3년복은 부당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하여 맨 먼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사람이 윤휴였다.

"예법에 장자에 대하여 3년복을 입는 것은 조상의 종통을 승계하였기 때문인데 한 나라의 왕통을 이은 임금은 아무리 차자라고 하더라도 등극 후에는 적자로 보아야 하므로 3년복이 당연한 것이다.

또, 체이부정의 논리는 돌아가신 선왕의 왕통을 부정하고 그것이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궤변이 되고 만다."라고 주장하여 본격적인 논쟁이 전개되었다.

우암은 주자의 원칙에 충실하여 임금이라 하더라도 '가례'의 일반적인 예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고, 윤휴의 논리는 왕권 계승의 정통성과 관계된 정치적 고려에서 출발한 현실적 사고의 결과였다.

허목도 왕권의 정통성 부정이라는 위험성을 지적하여 우암의 '체이부정' 논리를 공박하고 나왔다.

이에 고산은 상소를 올려 우암을 직접 지목하면서

 

“송시열은…(장자가) 성인이 돼 죽으면 적통이 거기에 있어 차장자가 비록 동모제(同母弟)이나 이미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었고, 이미 왕위에 올라 종묘를 이어받았더라도 끝까지 적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차장자가 부친과 하늘의 명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體)로서 후사가 된 후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면,

이는 가짜 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정 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 (현종실록)

 

이는 서인들이 세운 논리의 모순을 정확히 뚫어본 말이지만 ‘가세자, 섭황제’ 운운한 것은 역공을 받을 소지가 충분했다. 이 과격한 논리로 인해 서인이 반박할 빌미를 주어 자의대비 복상은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고산은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73세다. 이 나이까지도 꿈을 버리지 않고 정치적인 저격수 노릇을 한 셈이다. 결국 함경도 삼수로 귀양 가 8년 후인 81세가 되어서야 풀렸다. 81세가 되어서야 이곳 부용동으로 와서 살다가 85세에 낙서재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동안 선생의 행적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왜냐하면 51세에 이곳에 은거한 후에도 정쟁에 계속 휘말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연정의 혹약암을 보는 순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비록 은거하기는 했지만 은거지에서도 정치적인 꿈을 버리지 않고 때가 되면 다시 조정에 나아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보고자 한 것이다.

결국 정치적인 이상은 실현하지 못하고 이 곳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보길도에 남아 있는 고산과 우암의 흔적을 찾아보면서 나는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주역 건괘의 마지막 효는 上九 亢龍有悔(상구 항룡유회)다.

‘하늘에 오른 용은 뉘우침이 있다’는 뜻으로,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듯이, 부귀가 극에 이르면 몰락할 위험이 있음을 경계해 이르는 말이다.

 

인간의 나이 70을 넘어 80이 되면 항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은 73세의 나이에 과격한 상소를 올리고, 우암은 83의 나이에  왕의 뜻에 반하는 상소를 올렸다.

 

후인들에게 맡겨두어도 좋은 나이에 여전히 정치 일선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욕심이 결국 유배지에서 생의 말년을 보내게 만들었지 않았을까.

 

 

보길도에서 늦은 점심으로 해신탕(삼계탕에 전복을 넣은 것)을 먹고는 공룡알해변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시간이 늦어 다음을 기약하였다.

다음에 오면 반드시 보길도의 높은 산들을 내 발로 밟아보리라 마음 먹었다. 보길대교를 거쳐 노하도 산양진항에서 땅끝으로 나왔다.

 

 땅끝 등대

 

땅끝은 이제 많이 알려진 관광지로 변해 있어 7년 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만간 다시 오리라 마음 먹었지만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을지, 다시 찾았을 때 또 이곳은 어떻게 변했을지, 나 역시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알 수 없다. 삶은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이 아닌가.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