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

한국의 세계문화유산기행 3-수원화성

by 황교장 2010. 1. 27.

한국의 세계문화유산기행 3-수원화성

 

종묘를 출발하여 수원화성으로 향했다. 밖의 날씨는 춥지만 차안에서 보는 서울의 풍광은 멋이 있다. 서울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이다.

서울에 오면 가시거리가 시원찮아 늘 회색빛의 도시였는데 오늘은 화창함 그 자체다. 멀리 북한산까지 보인다. 한강을 끼고 도는 서울은 아름답다. 차창에 비치는 서울 도심을 구경하면서 얼었던 몸이 점차 회복이 되자 졸음이 함께 왔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되는데 차창으로 수원화성의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화성 안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시간이 아직 일러 저녁식사 시간과는 한 시간 가량 여유가 있었다. 같은 방에 배치된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저녁 식사를 지인들과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에 보니 낯이 익은 분이 앞에 있었다. 2006년 여름방학 때에 영산대학교에서 실시하는 ‘논어의 현대적 재조명’ 연수를 같이 받은 선생님을 이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보는 순간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로 당시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재생이 된다. 같은 학교에서만 오신 선생님이 자그마치 열두 분이었다. 작년에 파라미타에서 실시한 연수가 너무 좋아서 단체로 함께 왔다고 한다.

이분들과 밤 시간을 함께 했다. 이 연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쓴 주최 측 분들과 더불어 함께 한 밤은 오랫동안 기억으로 남을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다음날은 아침 식사 후부터 본격적인 화성답사다. 먼저 수원화성박물관을 관람했다. 여기서 채제공 초상 시복본(보물1477-1호)을 만날 수 있었다.

 

 채제공 초상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인 다산 정약용선생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영의정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연인원 70만 명의 노동력과 80만 냥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10년 계획으로 1804년 갑자년에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불과 2년 8개월만에 대단한 역사를 끝낸 것이다. 여기에는 채제공의 리더십과 정약용의 거중기, 녹노 등 과학적인 방법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과거에는 성곽을 쌓을 때 주로 임금 없이 강제동원이 많았는데 화성은 인부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또한 임금을 지급했다. 노동력에 대한 충분한 대가의 지급이야말로 축성을 빠른 시일에 완성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채제공은 수원화성의 총괄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와 정조의 스승이자 영의정을 지낸 최고의 인물이다.

초상화에 나타난 눈동자가 사시라 논란이 많았기에 더욱더 관심이 갔다.

 

이 초상화는 화산관 이명기(李命基, 1756~?)의 작품이다. 초상에 있어서는 김홍도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명기는 아버지, 동생, 아들 및 장인까지 도화서 화원으로 이루어진 화원집안 출신이다. 20대 후반에 이미 초상을 그리는데 있어 ‘독보일세(獨步一世)’라는 평가를 받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이다.

 

 

 화성행궁의 홍살문과 신풍루

 

수원화성박물관을 나와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수원화성은 그동안 열 번 이상 왔었다. 그러나 행궁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로 수학여행단과 함께 와서는 주차장을 나와 입구에서 연무대를 거쳐 동북공심돈과 창룡문만 보고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다른 장소로 옮겼기 때문이다.

 

화성행궁의 문화유산해설사는 정년퇴직한 역사 선생님처럼 보인다. 설명이 아주 자세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기본 인식이 전문가 출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해설을 하고 있다. 특히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을 세계사와 더불어 설명하는 점은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된다. 이분도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자세하면서도 이해가 쉽게 설명을 한다.

 

화성행궁 (華城行宮)은 정조가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소에는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며, 성곽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정문인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봉수당과 일월도

 

신풍문으로 들어가면 좌익문이 나오고 다시 중양문이 나온다. 중양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奉壽堂)이 나타난다.

봉수당은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장수를 받들어 술을 드려 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정조의 ‘갑자년 구상’이라는 것이 있다. 화성의 완공 예정 시기는 1804년 갑자년이었다. 이때 왕세자가 15세로 성년이 되는 해이자 어머니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해였다.

정조는 이때를 기다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곁인 화성에서 살고자 한 계획이 갑자년 구상이었다. 갑자년 구상을 실현하고자 지은 건물이 화성행궁인 것이다. 그러나 그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고 49세에 붕어했다.

주역 및 당대의 최고 풍수가인 정조도 자신의 운명은 몰랐던 것이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이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완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그 후 1997년에 복원되었다.

봉수당은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에 비하면 규모면에서는 작으나 생활하기에는 편하게 보인다.

 

 

 

 운한각 현판과 정조 어진

 

행궁을 다시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화령전으로 갔다.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정조의 초상화인 영전(影殿)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 지내던 건물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비록 돌아가신 선왕이지만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화령전의 중심건물인 운한각에 정조의 어진(御眞)이 봉안되어 있다.

 

정조의 어진은 한일합방 직전에 창덕궁으로 옮겨 봉안하던 중 일제강점기에 분실되었는데, 1992년 11월 수원시에서 새로 복원하여 봉안한 것이다.

화성행궁을 쭉 한번 둘러보고는 어디서 많이 보았다고 느껴졌는데 알고 보니 드라마 ‘대장금’의 주 촬영 장소였다고 한다.

 

화성행궁을 나와 걸어서 팔달산으로 올랐다. 언덕이 제법 오르막이다. 팔달산 중턱에는 화성열차가 대기하고 있다. 열차는 연무대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열차는 뚜껑만 있고 유리 창문도 없다. 오늘도 어제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열차를 타니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장안문과 홍예문

 

열차에는 그 동안 가까이 지낸 분들과 함께 탔다. 이분들이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하기에 아는 것만큼 답변을 했다. 열차는 화성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도록 천천히 간다. 사대사화, 예송논쟁,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 덧  장안문이 보인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은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 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 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 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 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 수,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연무대 앞의 넓은 공터에서 열차는 멈추었다. 이곳에서 30분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을 한다. 일행 몇 분과 함께 성곽을 따라 숙소까지 걸어서 갔다. 동북공심돈을 지나고 창룡문도 지나고 성을 따라 팔달문까지 갔다.

 

 팔달문

 

팔달문(보물 제402호)은 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전국 각지로부터 사람과 물산이 모이고 흩어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팔달문을 뒤로 두고 숙소인 사랑채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는 1박 2일의 세계문화유산답사를 마무리했다. 1시 조금 지나서 버스는 부산으로 출발하여 5시 40분에 서면에 무사히 도착했다.

 

참고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고급)에서 수원화성과 정조에 관한 문제를 풀어보자. 여기에서 수원화성과 화성을 축조한 정조에 대하여 알아보면 정답을 찾을 수 있겠다.

 

 

 

 

 

 

 한국사 고급문제

 

 ★ 수원화성

 

화성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만들어졌다.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를 '엎드린 용이 여의주를 갖고 희롱하는 형국(盤龍弄珠形)'이라고 알려진 수원화산의 현령원으로 1789년에 이장했다. 현령원 터는 고산 윤선도가 '천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최고의 명당'으로 평가한 자리로 효종의 장지로 추천한 자리라고 한다.

 

정조는 사도세자 묘소를 천하명당 자리라고 불리는 자리에 이전하고서 그 효험이 나타났다. 수빈박씨에게 바로 태기가 있어 그 이듬해 1790년 6월 18일에 순조가 태어났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혜경궁 홍씨의 생신날 사도세자의 탄생처인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음덕으로 세자를 얻었다고 믿었으며, 이렇게 얻은 세자가 성년이 되는 대로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정조는 현령원을 매년 참배를 하다가 5년 후인 1794년에는 화성을 수도와 버금가는 규모로 새로운 도성을 만들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장용외영을 설치하고, 대유둔전이라는 국영농장을 개선하고 상공인을 유치하여 상업도시, 농업도시, 군사도시로 성장시켰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특징이다.

축조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으나 1775-1979년까지 축성 직후인 188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정조

 

정조(1752-1800)는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7-1800)이다. 이름은 산(祘).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1759년(영조 35년)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었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는 사가로 쫒아내었다. 문성국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 보냈다가 사사했다.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했다.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정조의 탕평은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준론(峻論)탕평이었다.

 

정조의 준론탕평은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과는 차이가 있다.

완론탕평은 붕당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없애고자 각기의 명절보다도 타협을 종용하는 것인 반면 준론탕평은 충역, 시비, 의리와 명절을 중요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하는 청류탕평책이다.

청류를 정계의 중심부로 대폭 끌어들여, 이른바 준론탕평 또는 청류탕평을 펴게 되었다.

 

정조는 1788년에는 남인 채제공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정조의 준론탕평은 결국 사림세력에 의한 공론정치의 방향보다는 관료제의 정점이 되는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사림정치 이념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왕권강화를 지향했다.

 

정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를 실시했다. 이는 친위세력을 목적으로 규장각에서 37세 이하의 젊은 문신을 선발하여 일정기간 재교육시켜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어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학자를 길러내어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는 왕권강화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서얼 출신으로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신해통공을 시행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가진 금난전권의 특권을 폐지하고, 육의전에서 취급한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을 자유로이 판매하게 되었다.

 이는 1791년에 좌의정 채제공의 주창에 의해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하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도고권을 폐지하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반 상인들이 금난전권에 저촉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했다. 이는 왕의 호위와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친위부대이다. 이를 점차 확대하여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시켰다.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하였고 외영은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기존 5군영보다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장용영은 그 설치 목적이 왕권강화에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1802년(순조2년)에 혁파되고 말았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잡문체를 숙청하고 전통고문으로 돌려서 바로 잡으려고 했다. 당시 유행한 한문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으로 환원시키려고 한 주장 및 그 사업을 말한다. ‘문체순정’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이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보완하여 정조 때 새로 재정된 법을 덧붙여 만든 법전이다.

 

정조는 조선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문집인 홍재전서를 편찬했다.

 

정조는 추관지(형률),탁지지(재정),무예도보통지, 일성록, 동문휘고, 등을 편찬했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정조는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49세의 일기로 붕어했다. 독살의 논란이 많았으나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당시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와 주고받은 편지글들이 최근에 발견되어 병사로 무게 중심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 

유언에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었다. 능의 이름은 건릉(健陵)이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가 함께 묻힌 합장묘다. 2009년 6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