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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모라중 직원연수 1일차 - 퇴계예던길과 농암종택

by 황교장 2011. 10. 23.

모라중 직원연수 1일차 - 퇴계예던길과 농암종택

 

올 여름 방학 직원연수는 경북 북부지방의 선비 문화를 체험하자고자 떠났다. 답사의 순서는 모라중- 신대구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남안동IC- 조탑리오층전탑과 권정생 생가 - 안동시장 안동찜닭(중식)- 퇴계 예던길 -대자연가든(석식) - 농암종택(1박, 조식) - 퇴계종택 - 이육사문학관- 안동간고등어 및 헛제삿밥(중식)-신세동칠층전탑 및 임청각 -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 - 서석지 - 봉감모전오층석탑 - 포항 영일만물곰식당(석식)- 부산으로 정하고 떠났다.

 

직원연수는 예정 인원보다 당일 출발 인원이 적은 것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더 많은 인원이 참가하여 분위기가 시작부터 좋았다. 청도 휴게소를 지나자 바로 개인별 장기자랑을 시작하였다.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가자 평소에 조용하게 지내는 분들도 숨겨둔 실력을 한껏 발휘를 했다.

 

 

남안동IC로 나와 첫 답사처인 조탑리오층전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여름햇빛이 강했지만 선생님들의 표정은 일상을 떠나 여행지로 온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전탑(塼塔)은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로 쌓아올린 탑이다. 탑의 형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풍토와 환경에 맞게 변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이 많아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안동조탑동오층전탑(보물57호)은 전탑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 다섯 기 중 하나이다. 우리 선생님들은 이러한 전탑을 처음 본다고 한다.

 

 

전탑을 보고는 근처에 있는, 동화작가이신 고 권정생선생이 살던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허물어져 가고 있는 선생의 소박한 두 칸집은 잡초로 무성했다. 선생은 평생을 욕심 없이 아이들과 더불어 청순하게 살다가 갔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전,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자신의 집터를 허물어 다시 자연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조탑리를 나와 안동 시내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선생의 대표작 ‘강아지똥’을 구연동화의 대가인 이성미 선생이 들려주어 더욱더 실감나게 하였다. 이성미선생이 구연동화에 일가견이 있는 줄은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안동시내에 도착하여 미리 예약해둔 종손안동찜닭을 맛있게 잘 먹었다. 직원연수 때마다 늘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 중 하나가 식사문제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아무리 좋은 연수일지언정 식사가 맛이 없으면 연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다. 우선 그 지방의 특색이 있는 메뉴를 정하고 나서 그 지방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집을 관공서나 택시기사에게 물어보고는 사전답사를 가서 직접 먹어본 후에 비교분석하여 정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한 식사를 하기 전에 적당히 운동이 되는 코스를 짠다. 그렇지 않으면 식사시간을 조금 늦추어 일단 배를 고프게 하여 무엇을 먹어도 맛이 있도록 계획을 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조탑리에서 자연스럽게 적당하게 운동이 된 상태에다 평소보다 늦은 점심식사였다. 이러다 보니 평소에 닭고기를 싫어하는 분도 안동찜닭은 너무 맛이 있다면서 개인적으로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시장이 반찬인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서둘러 퇴계예던길로 향했다. 이 길은 2시간 반 정도 걸어야 하니 조금이라도 체력에 자신이 없는 분은 차를 타고 농암종택으로 가고 자신이 있는 사람만 걷기로 하였다. 대부분이 퇴계예던길로 가는 코스를 택하였다.

뜨거운 7월 염천이었지만 다들 표정이 좋다. 사전 답사 때에는 강물의 수량이 거의 없어서 강 한가운데로 걸어서 갔지만 지금은 수량이 너무 많고 물살도 너무 쌔다. 아침까지 안동에는 장마비에다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히 지금은 날씨가 너무 좋다. 왕당터에 자리 잡은 우리 모라인들은 연수에서도 하늘이 도운 것이다.

‘예던’ 혹은 ‘녀던’은 ‘걷던’의 고어(古語)이다. 퇴계예던길은 퇴계선생이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걸어갔던 옛길이란 뜻이다. 한 달 전보다 풀이 더욱더 많이 우거져 걷기가 몹시 불편하다. 다른 사람들에는 반드시 긴팔 티에 긴바지를 입어야 된다고 해놓고 정작 나는 반팔티를 입고 맨 앞에서 풀을 헤치면서 선도하여 걷다가 팔에 풀쐐기에 쏘여 버렸다. 쏘인 자리는 금세 벌개지고 가려워서 여행 후에도 고생을 많이 했다. 역시 여름철 인적이 드물고 풀이 우거진 곳을 답사할 때는 긴팔티가 필수다.

 

 

 

더운 날씨로 땀이 무척 많이 났지만 홍수로 인해 물살이 거칠어 씻을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겨우 찾은 곳이 미천장담(彌川長潭)이다. 답사 땐 수백 평 되는 너럭바위와 공룡발자국이 있었지만 장마비에 물에 다 잠겨 볼 수가 없고 불과 10여 평만 물속에 잠기지 않고 남아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원하게 강물에 몸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모부장이 뒤에서 나를 떠밀었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나는 순식간에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물살이 보기보다 너무 세다. 헤엄을 쳐도 더 멀리 떠내려간다. 젖 먹던 힘까지 다 발휘하였다. 그러자 점차 강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낙동강변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몇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런데 그 고비마다 살아 남은 것은 개헤엄 덕분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개헤엄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양반이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안 치고, 얼어 죽을 망정 짚불에 불을 쬐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처럼 개헤엄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헤엄이다. 그런데 물살이 센 강에서는 개구리헤엄으로 불리는 평형보다 개헤엄을 쳐야 한다. 어린 시절 저수지가 있는 동네에서 자란 아이는 개구리헤엄을 하고 낙동강변에서 자란아이는 개헤엄을 한다. 이는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함이다. 저수지는 고여 있는 물이여서 평형이 힘이 적게 들면서 속도도 빠르다. 반면에 강물은 세차게 흘러서 개헤엄을 쳐야만 힘이 응집되어 물살을 헤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에 내가 아니고 개헤엄을 치지 못하는 다른 선생님이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장면이었다.

힘들게 겨우 바위를 잡고 물밖으로 나오니 우리 선생님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사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이번 연수에 액땜 을 이미 다하여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여름철 물놀이 가서 섣부른 장난은 금물이다.

 

 

미천장담에서 다시 출발하자 곧 학소대가 나온다. 학소대는 바위 절벽과 강이 어우러진 멋이 있다. 학소대에는 천연기념물인 먹황새가 살았지만 지금은 멸종되었다고 한다. 학소대를 지나자 바로 농암종택이 나타났다. 차로 먼저 온 선생님들은 농암종택 앞 강변을 거닐고 있다가 우리 일행을 보자 손을 흔들면서 반긴다. 드디어 2시간 반의 트래킹 끝에 농암종택에 도착하였다.

 

 

종택에 들어서자 종손님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동안 몇 번을 종손님과 만나 많은 담소를 나누었다. 종손님과 인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몇 분과 강가로 달려갔다. 발자국 흔적이 없는 흰 모래와 맑고 푸른 강물의 풍광은 이곳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 풍경이다.

 

 

이 중 한 선생님이 질문을 한다. 교장선생님 글에서 보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집에 두고 온 남편이 아닌 아들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고 고백을 한다.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대답을 했다. 자식은 내 자식이지만 남편은 ‘남의 편’이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해 한 바탕 웃었다.

강가 백사장에 몸을 누이고 앞산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무념무상으로 잠이 스르르 들려는데 전화가 왔다.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고 한다. 아쉬움을 남기고 농암종택에 들어서니 예쁜 아가씨 선생님들이 긍구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숙소가 긍구당인지를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연세 많으신 여선생님들은 본체에 방을 잡고 젊은 아가씨들은 끗발에 밀려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면 명하고 복은 남이 못 뺏어가는 것이다. 종택 건물들 중 대부분이 새롭게 지은 집이지만 이 긍구당만은 농암선생이 살아계실 때에도 있었던 건물로 최소한 600년 이상된 집이다. 사실은 오늘 내가 이 방에서 자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예쁜이들이 짐도 다 두고 방 배정이 끝난 상태였다. 오늘 긍구당은 이분들의 복인 것이다. 남의 복을 가로채면 더 많은 재앙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쉽지만 마음을 접었다.

 

 

긍구당(肯構堂)이란 서경(書經) 대고편(大誥篇)에 나오는 구절로, ‘조상의 업적을 길이길이 이어받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긍구당 현판 글씨는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는 신잠(申潛, 1491-1554, 신숙주의 증손자)선생이 쓴 전서체이다. 이곳에 올 때면 늘 긍구당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싶었다. 그런데 올 때마다 다른 곳은 다 비어 있어도 이 방만은 이미 예약이 된 상태여서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쉬웠는데 오늘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다음에 다시 오라는 계시일 게다.

저녁식사는 앞강에서 잡은 자연산 고기로 끓인 매운탕이었다. 농암종택에서 식당이 있는 대자연가든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정도 가야 한다. 이 길도 전혀 개발되지 않는 순수 자연 그대로여서 참 아름답다. 도착하니 미리 식사가 차려져 있고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오늘 많이 걸었고 경치 또한 좋으니 밥맛이 저절로 좋다고 한다. 저녁 식사를 하고서는 다시 농암종택으로 돌아왔다. 갈 때의 길과 올 때의 길은 같은 길이지만 항상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길에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낙동강변에서 놀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농암 종택은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이현보 선생은 가사문학의 효시인 어부가를 지은 분으로 퇴계선생의 도산12곡과 고산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끼친 분이다.

농암종택은 원래 지금의 도산서원 근처인 분강촌에 있었다. 분강촌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다시 이곳으로 옮겨온 곳이다. 이곳의 농암종택은 현재 17대 종손인 이성원님이 수몰된 이후 30년 만에 터전을 잡은 곳이다. 농암종택은 1370년경에 지어졌고, 1526년에 그린 ‘분천헌연도’에도 그 모습이 뚜렷하다고 한다. 종택 가까이에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의 명소가 감싸고 있어 그 자체가 아름다움인 곳이다. 종택의 면적은 만 오천 평이다. 아마 내가 아는 종택 중에서는 가장 넓은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 풍수 또한 일품이다. 지금까지 이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풍수를 자랑하고 있다. 사신사(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뚜렷하다. 내 눈에는 새로운 천년불패지지로 보인다.

 

 

 

마침 오늘은 양력 7월 15일이자 음력 6월 15일 보름날이다. 이곳 종택의 산 위에서 보름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큰 마당에 모였다. 미리 갖고 온 장구 반주에 다 함께 흥겹게 창가를 한다. 분위기가 점점 더 고조되자 관광버스의 노래방 기기를 이용하여 분위기를 한 번 더 띄우자고 하면서 이미 기사님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제법 많은 인원이 동참을 하여 여흥을 즐겼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내가 통제를 했다. 그냥 두었다가는 언제 끝이 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놀이에는 반드시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노래방을 파하고 차에서 내리자 보름달이 두둥실 하늘 한가운데에 떠있다. 달빛은 더욱 밝아지고 맑아져서 주변의 사물이 또렷하게 보인다. 형설지공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다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한다. 앞 강물에 비친 달빛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황홀경 자체다. 밤이 점점 더 무르익어 가자 삼삼오오로 헤쳐모여 오순도순 도란도란 여기저기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이태백이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주님과 보름달, 산과 강, 달빛과 풀벌레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대자연의 숨결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적벽부를 되뇌이며 꿈속을 거닐었다.

 

소식의 적벽부 중 한 구절

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술잔을 들어 지인에게 권하며 명월의 시를 외고 요조의 장을 노래하자, 이윽고 달이 동쪽 산 위에 솟아올라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서성이더라)

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藉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지인이 기뻐하며 웃고, 술잔을 씻어 다시 술을 마시니 안주가 다하고 잔과 쟁반이 어지럽더라.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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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소녀 (김정호) - 조관우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

밤은 깊어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속에

달빛 젖은 금빛물결 바람에 이루나
출렁이는 물결 속에 마음을 달래려고

말없이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서
안개 속에 떠나가는 이름 모를 소녀

밤은 깊어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조그만 연못 속에

달빛 젖은 은빛물결 바람에 이루나
출렁이는 물결 속에 마음을 달래려고

(반복)
말없이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서
안개 속에 떠나가는 이름 모를 소녀

가사 출처 : Daum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