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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모라중 직원연수 2일차- 육사문학관, 퇴계종택, 임청각, 조지훈문학관

by 황교장 2011. 10. 23.

모라중 직원연수 2일차- 육사문학관, 퇴계종택, 임청각, 조지훈문학관

 

다음날 아침 힘들게 기상을 했다. 그런데도 정신은 또렷하다. 몇 분들은 주님과 함께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그런데도 표정들은 밝았다. 종손님이 식사를 나와 같이 하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연락이 왔다. 본채 대청마루에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차려 놓았다.  비록 뷔페식이지만 식사 내용물은 안동 양반식 정식이다.

종손님과 식사를 같이 했다. 옆에서 여선생님들이 이것저것 반찬들을 챙겨주니 매우 부러워하면서 ‘황교장은 평소에 적선을 많이 한 것 같다’고 한다. 이에 모선생님이 대답하기를 ‘교장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좋은 농암종택에 왔기 때문에 기뻐서 챙겨 드린다’고 하자 종손님이 멋쩍어하면서 ‘지금까지 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다녀갔지만 모라중학교 선생님들처럼 잘 놀고 밝은 표정을 짓는 학교는 없었다’고 덕담을 하신다.

 

대화에 있어 칭찬과 덕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종손님은 나에게 잊지 않고 찾아주어 고맙다고 하고 나는 종손님이 건강하게 계셔주어 다시 올 수 있어 나 또한 고맙다고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종손님이 동네에 일이 생겨 지금 가보아야 하니 나중에 배웅을 못한다고 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일정도 만만치 않아서 서둘러 출발을 해야 되는데 우리 선생님들이 자꾸만 이곳에만 더 있다가 그냥 부산으로 가자고 한다. 남은 일정도 종택 못지않게 좋다고 하면서 겨우 설득을 하여 모두 차에 올랐다.

 

 

 

 

다음 코스는 이육사문학관이다. 이육사문학관은 어제 퇴계예던길 갈 때 지나쳤던 곳이다. 육사는 퇴계선생의 후손이다. 퇴계종택이 있는 곳이 상계이고,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1559-1637)가 터를 잡은 곳이 하계다. 퇴계가 상계를 개척했고, 손자 동암이 하계를 열었다. 그리고 동암의 증손자가 원촌을 개척했다. 상계는 16세기, 하계는 17세기, 원촌은 18세기로 대략 100년을 간격으로 열어 나갔다. 따라서 이 일대는 퇴계선생의 후손들이 땅을 개척하고 살아온 동네다.

 

원촌마을에서 육사가 태어났다. 원촌마을 풍광은 빼어나다. 낙동강이 청량산을 돌아 원촌에 와서야 제법 강의 자태를 나타낸다. 더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호연지기를 기를 만한 곳이다. 풍수상으로는 오지탄금형(五指彈琴型)이라고 한다. 이는 마을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의 조화는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다. 그러나 지금 원촌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법적으로는 수자원공사의 땅이다. 많은 집들이 헐리어 이사를 가고 지금은 몇 집 남지 않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이육사문학관으로 갔다. 문학관에는 짧은 기록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육사시인의 외동따님인 이옥비 여사께서 직접 강사로 나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찬찬히 이야기를 하자 우리 선생님들은 중간중간 눈시울을 적시면서 참 숙연해졌다.

 

육사시인의 어머니 허길은 독립운동가인 범산 허형의 딸이다. 허형은 의병장 왕산 허위의 사촌형이다. 그리고 임청각의 주인인 석주 이상룡선생의 손부 허은여사는 허형의 손녀다. 육사는 허형의 외손자다. 임청각은 육사의 외사촌 집이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나라 최고의 가문 중의 하나인 퇴계선생의 후손이자. 외가는 범산 허형의 외손자이다. 애국지사가 나오는 데에는 가문의 내력이 있어야 되는 것 같다.

 

 

 

 

 

 

육사문학관을 나와서 다음 코스는 퇴계종택이다. 퇴계종택은 ‘퇴계 종손은 경상감사보다도 더 좋다’는 퇴계 종손분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종택이 있는 곳의 지명 전체는 토계(土溪 혹은 兎溪)이나 이곳은 조금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상계(上溪)라 한다. 퇴계선생은 ‘토계’의 토를 물러날 퇴(退)로 고쳐 호를 퇴계(退溪)라 했다고 한다. 이 토계의 개울을 건너면 종택이 나온다.

 

종택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秋月寒水亭(추월한수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을 만난다. 우리 선생님들은 추월한수정에 올라 앉았다. 주변의 풍광들이 참 잘 어울린다. 이곳에서 선생님들에게 성리학의 기본과 이집 풍수의 기본적인 설명을 했다. 특히 추월한수정은 1715년에 도산서원 원장인 권두경이 이집 종손과 논의하여 영남사림의 모금으로 지었고, '秋月寒水亭'의 편액은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의 '先生之心 如秋月寒水 (선생지심 여추월한수. 선생의 마음은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 )'에서 취했다고 한다. 안동이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랑하는 것도 바로 이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도산서원에 들르려고 했지만 일정상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안동댐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안동의 전통음식인 간고등어와 헛제삿밥을 먹었다. 색다른 맛을 보았다고 다들 즐거워한다.

 

 

다음 코스는 임청각과 국보 16호 신세동칠층전탑이다. 먼저 전탑을 보았다. 다들 신기해하면서도 전탑이 철길에 막혀 답답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이 탑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탑의 높이는 16.8m, 기단 폭은 7.75m이며, 단층기단에 7층의 몸돌(塔身)을 차츰 크기를 줄여가며 쌓아 올려놓았다.

 

석가모니가 열반하여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왔다.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축조물이 탑의 기원이다. 탑은 탑파(塔婆)의 준말로 범어인 st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중국은 목탑과 팔각형의 전탑이 주류를 이루나,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이 많아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돌을 벽돌처럼 보이도록 다듬어서 만든 모전석탑이 있다.

 

모 사회선생님 왈 같은 전탑이지만 어제 본 조탑리오층전탑과는 확실히 국보와 보물의 차이는 있다고 하면서 지금까지는 책대로 아이들에게 설명은 했지만 실물을 보고나니 이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겠다고 한다.

 

 

탑을 보고는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으로 향했다. 이상룡(李相龍, 1858-1932)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격인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독립투사이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종택이지만 사당에는 조상들의 위패가 없다. 1911년 50여 명의 식솔들과 함께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묘가 무슨 소용이냐’하며 위폐를 전부 땅에 묻고 떠났기 때문이라 한다.

선생은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52세의 나이에 온 가족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다. 임청각은 석주선생이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석 재산을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까지 세 번이나 판 것을 고성 이씨 문중에서 매번 다시 구입했다고 한다.

 

일제가 이집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 철로(1936년 착공 1942년 개통)를 놓으면서 아예 집을 없애려는 것을 지역사회에서 결사적으로 반발하여 그나마 현재 반은 허물어지고 반만 남아 있다. 임청각 전체는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군자정 현판글씨와 군자정 안에 있는 이집 당호인 ‘臨淸閣’ 현판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그리고 군자정 안에는 농암 이현보 선생과 고경명 선생, 이상룡 선생의 글씨의 현판도 함께 있어 감상하려고 선생님들을 모시고 들어가는데 이집 관리인이 못 들어가게 한다. 이유인즉 청소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집은 농암종택과 같이 일반인들에게 빌려준다. 우리가 들어가면 다시 청소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다.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임청각에는 삼정승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정승이 태어날 방은 영실(靈室)이라 불린다. 영실 앞에는 진응수(眞應水)가 솟는 영천(靈泉)이라는 샘이 있어 우물방이라고도 한다. 우물방에서 태어난 인물은 이상룡선생을 포함한 9명의 독립유공자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피난 간 약봉 서성(1558-1631, 5도 관찰사, 3조 판서를 지내면서 달성서씨 가문의 기반을 구축하고, 서성의 네 아들을 비롯한 자손 중에서 3대 정승, 3대 대제학 배출), 흥선대원군 때 폐정개혁을 주창한 좌의정 매산 류후조(1798-1876)이다. 서성과 류후조는 모두 임청각의 외손들이다. 이들의 어머니는 임청각의 종녀로 친정집인 우물방에 와서 해산했다. 우물방 영천(靈泉)의 정기를 받은 셈이다. 처녀 선생님들에게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와서 우물방에 신방을 차리면 정승이 될 자식을 낳을 수 있으니 참고하라’고 설명을 마쳤다.

 

안동 양반문화의 특징은 벼슬보다는 학문을 높게 쳐 주고, 학문보다는 지조를 가장 높게 쳐준다. 안동에서는 안동유림의 최고 명예직인 유향좌수와 도산서원 전교에 뽑히는 것을 최고로 친다. 유향좌수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루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싱글벙글하며 선조 임금과 마주하자 이를 궁금하게 여긴 선조가 ‘왜 그리도 기분이 좋은가’ 라고 물었다. 서애 왈 ‘내가 안동 유향좌수로 천거되어 기뻐 그런다’고 대답하자, 선조 왈 ‘유향좌수가 일국의 영의정보다 더 지위가 높으냐’고 물었다. 서애가 대답하기를 ‘유향좌수는 양반들의 대표로 안동에서는 영의정보다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리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향좌수는 유향소의 수장이다. 유향소는 토착 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로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던 곳이다. 다른 군현에서는 진짜 양반은 유향좌수에 오르는 것을 기피했으나 안동의 선비들은 이를 가장 명예롭게 여겼다고 한다. 유향좌수에 오르는 데는 학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품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다, 이런 유향좌수와 도산서원의 원장격인 도산서원 전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이 바로 임청각이라고 한다.

 

 

 

 

임청각을 떠나 조지훈선생의 생가가 있는 영양으로 떠났다. 영양하면 영양고추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영양은 한국문학의 산실이다. 작가 조지훈, 이문열, 김주영의 고향이고, 우라나라 인문학의 대가인 조동일, 조동걸, 조동원 교수가 모두 주실마을 한양 조씨들이다.

주실마을은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 참 좋은 마을이다.’ 고 느낄 정도로 보는 사람에게 평안하고 아늑함을 준다. 양택풍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배산임수와 전저후고의 형태를 띠어 아늑함을 준다. 주실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호은 조전(1576-1632)으로 조광조선생과는 9촌이다. 조광조가 화를 당하자 이를 피해 이곳으로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호은종택은 조전의 아들 조정형이 1629년에 지은 집으로 조지훈 시인이 바로 이집에서 태어났다. 조지훈시인의 부친이 조헌영이고, 조헌영의 부친은 조인석이다. 조인석의 부친은 구한말 의병장 조승기다. 조승기(1836-1913))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대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단식으로 굶어죽었다고 한다. 건국 후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았다.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1879-1950)은 6.25. 당시 인민군에 항거하다가 장렬히 자결했다. 부친인 조헌영(1899-1988)은 초대 2대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납북되어 북에서 1988년 5월에 작고했다고 한다. 한민당 정치부장을 지냈고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입안자이며 한의학 학자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이러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다.

 

호은종택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다. 바로 삼불차(三不借)다. 삼불차란 세 가지는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셋째는 문불차(文不借)이다. 재불차란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호은종택 앞에는 논이 만 평이 있는데 370년 동안 그대로 종손들에게 전해져 왔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불차는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집안은 대가 끊기면 양자를 데려다가 종손으로 삼는데 이 집은 16대 동안 한 번도 양자를 들인 적이 없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생명력이다. 아마 이 집의 집터와 무관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문불차는 문장을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풍수가들이 주실마을에 오면 제일 많이 거론하는 것이 문필봉이다. 호은종택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앞에 산이 있다. 풍수에서 앞에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한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의 봉우리가 글을 쓸 때 붓끝을 닮았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 한다. 즉 정삼각형의 산이다. 삼각형의 산은 오행 중 목형의 산이다. 목은 성장 발달을 뜻하므로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문필봉이 좋은 마을에는 반드시 훌륭한 학자가 있다고 한다.

 

우리 선생님들은 조지훈문학관을 너무 열심히 관람을 한다. 또한 문화유산해설사분이 아주 해설을 잘해 주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주실마을을 답사하고 나오는 길에 모 국어선생님이 내 곁에 와서는 너무 고맙다고 한다. 이육사문학관과 조지훈 문학관을 너무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이룰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이 말 한 마디에 나도 덩달아 너무 행복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영남의 최고 정자로 평가 받고 있는 서석지로 갔다. 호남을 대표하는 정자가 소쇄원이라면 영남을 대표하는 정자는 서석지다. 서석지(瑞石池)는 글자를 풀이하면 상서로운 돌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연못 안에 울퉁불퉁 솟아난 60여 개의 서석들이 깔려 있다. 이 돌들은 석영사암이라서 물속에서도 돌빛이 희게 빛나 보여 기이함을 더해준다. 이 돌들은 다른 곳에서 갖고 와 조성한 것이 아니고 본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을 그대로 살리면서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석지는 광해군 5년(1613) 석문 정영방(1577-1650)선생이 조성한 민가의 연못이다. 서석지 경정에 걸려 있는 임천산수도(林泉山水圖)를 보면 이곳은 일월산에서 용맥이 뻗어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에서 혈이 맺힌 명당자리다. 연못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주일재(主一齋), 서쪽에 경정(敬亭), 뒤쪽에는 수직사(守直舍)가 있다. 연못은 자연스럽게 자연석으로 쌓았고 연못 북쪽에는 네모난 단을 만들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 심고 사우단서석지라고 이름을 붙인 데에는 자연석인 서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서석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석간수를 이용하여 연못에 물을 채운다. 이곳은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여 자연과 인간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멋으로 만들었다.

서석지에는 연꽃이 한창이다. 경정 마루에 앉으니 연못과 연꽃, 사우단, 서석 등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모두가 넋을 놓고 있다. 아무도 갈 생각을 않는다. 모 선생님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가면 안 되는지를 물었다. 혼자 주무시고 내일 오시라고 했다. 다들 한바탕 웃었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답사처인 봉감모전오층석탑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아직까지도 때가 묻지 않은 순수성을 갖고 있다. 강가에는 지금도 수달이 서식할 정도로 깨끗하다. 봉감모전오층석탑(국보 187호)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5층 모전석탑으로 봉감 마을에 있기 때문에 봉감탑이라고도 불린다. 모전석탑은 우리나라 문화가 만들어낸 특이한 탑으로 벽돌모양으로 돌을 잘라 쌓은 석탑이다. 모전석탑의 재료는 돌이나, 쌓는 방법은 전탑을 닮았다. 석탑과 모전석탑의 형식상 차이는 지붕돌의 낙수면 모습이다.

석탑은 처마선이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이지만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층층이 쌓았기 때문에 계단처럼 층급을 이룬다. 모전석탑은 일종의 과도기적인 형식이다. 모전석탑의 원조는 경주에 있는 분황사석탑이다.

탑도 사주팔자가 있는 모양이다. 봉감탑과 신세동칠층전탑을 한번 비교해 보면, 신세동칠층전탑은 기차철로에 막혀 답답함을 느끼는데 이곳은 강과 산이 조화를 이루고 너른 들판에서 당당하게 우뚝 서서 절경을 굽어보고 있다.

 

봉감모전오층석탑이 이번 연수의 마지막 코스였다. 내려가는 길에 포항 시장에 들러 맛집으로 소문난 영일만물곰횟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는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다.

 

 

직원연수를 다녀온 이후 많은 시간들이 지났지만 당시의 사진들을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늦게나마 여행기를 남겼다. 몇 분의 선생님들께서 여행기 쓰기를 부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가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는 안 될 내면의 욕구가 분출되었기 때문일 게다.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는 여행이 최고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사주팔자를 고칠 수 있는 개운(改運)법 중에서 여행이 으뜸이라고 여겨왔다. 이번 여행은 연수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인간은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이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 중 가까이에 있는 분들과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같이 하는 여행이 좋은 대안이 된다. 여행은 일상의 고민이나 고통에서 벗어나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으로의 여행은 더욱더 좋다. 문화유적은 나보다 먼저 살다가 간 선현들의 자취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선현들의 아름다운 삶은 시공을 떠나 공감을 형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수 백 년을 이어온 종택과 천 년 이상 버텨온 탑은 더 많은 사연을 전해준다.

 

늦었지만 여행에 동참해 준 여러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요즘 연구학교 성과보고회 준비로 많은 분들이 고생이 많으신데 이 여행기를 읽으면 지난 여름연수의 기억이 되살아나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여행의 기억은 되돌아보면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서 사람 사이의 정이 더 깊어져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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