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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

좋은 사주는 어떤 사주인가

by 황교장 2017. 8. 3.

  좋은 사주는 어떤 사주인가 

 

적천수징의(滴天髓徵義)에 가장 좋은 사주의 예로 나오는 사주를 한번 살펴보자. 사주만 나오고 사람 이름이 없어 이해를 돕기 위해 주인공의 특징에 따라 한 명은 과갑연등 과갑부절’, 한 명은 일처이첩 부유백만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과갑연등 과갑부절

시 일 월 년

辛 己 丙 甲

未 巳 寅 子

甲癸壬辛庚己戊丁

戌酉申未午巳辰卯

 

이 사주는 천간을 보면 갑목이 병화를 생하고, 병화는 기토를 생하고, 기토는 신금을 생한다. 지지를 보면 연지 자수는 인목을 생해주고, 인목은 사화를 생하여 주고, 사화는 미토를 생하여 주고, 미토는 신금을 생하여 준다. 그리고 지지가 모두 천간을 생하고 있다.


이 사주는 적천수 간지총론 마지막 구절인 始其所始. 終其所終. 福壽富貴. 永乎無窮(시기소시. 종기소종. 복수부귀. 영호무궁)과 딱 맞아떨어진다.

이는 사주 간지가 모두 상생으로 되어 있어 시작될 곳에서 시작하고 끝이 날 곳에서 끝이 나서 복과 수명과 부와 귀가 모두 영원하게 다함이 없다의 뜻이다.

 

이 사주를 분석해보자.

기토 일간이 인월에 태어나 인의 지장간이 무병갑이다. 인의 정기인 갑목과 중기인 정화가 천간에 있다. 따라서 정관격이다. 정관 갑목이 정인 병화를 돕고 있어 관인상생이다. 관인상생은 큰 벼슬을 한다.

일간 기토는 사화와 미토에 뿌리를 내리고, 병화도 인목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강하다. 그리고 시간 신금이 식신이다. 정관이 정인을 생하고 정인은 일간을 생하고 일간은 식신을 생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합이다. 어디 하나 막히는 곳이 없다.

 

적천수징의에서는 이 사주의 주인공을 科甲聯登 仕至極品 夫婦齊眉 子孫繁衍 科甲不絶 壽至九旬(과갑련등 사지극품 부부제미 자손번연 과갑부절 수지구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풀이하면, 과거 시험 갑과에 합격을 하여 벼슬이 계속 올라 지극히 귀한 곳까지 올라갔다. 부부의 정은 너무 좋았고, 자손들은 번창을 했다. 자손들은 과거 갑과에 합격자가 끊이지 않았다. 수명은 구십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과갑연등과 과갑부절이다. 이는 본인도 갑과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들도 계속해서 과거에, 그것도 갑과에 합격을 했다는 의미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수나라 문제가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이후 정착을 하여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12종의 유교경전 57만자에 달하는 내용을 암송해야만 된다. 보통 8세에 시작하여 25세에 모든 과정을 마친다.


과거시험 중 본적지의 주에서 치르는 시험인 초시의 성격을 지닌 해시의 합격률이 1001이었다. 두 번째 단계인 중앙 예부에서 치르는 성시는 1003 정도였다. 즉 성시 합격자는 3천 명 중 한 명꼴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성리학의 조종인 주자 즉 주희선생도 1148년에 치른 문과 성시에서 330명 중에서 278등을 했다. 주희선생은 병과 합격자다.


그런데 이 사주의 주인공은 갑과에 합격을 했다는 것이다. 갑과는 단 세 사람이다. 1등이 장원, 2등이 방안, 3등이 탐화이다. 본인도 3등 안에 들었고, 그 자손들도 줄줄이 3등 안에 들었다는 의미다.

이러하니 이 사주는 설명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최고의 사주라고 할 수 있다.

 

일처이첩 부유백만

시 일 월 년

乙 癸 庚 戊

卯 亥 申 戌

戊丁丙乙甲癸壬辛

辰卯寅丑子亥戌酉

 

이 사주는 연간 무토가 월간 경금을 생하고, 경금은 일간인 계수를 생하고, 계수는 시간 을목을 생하고 있다. 지지 또한 연지 술토가 월지 신금을 생하고, 신금은 일지 해수를 생하고, 해수는 시지 묘목을 생하고 있다.

그리고 천간과 지지가 모두 같은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으로 이어져 있다. 이 사주 또한 앞의 사주와 같이 始其所始. 終其所終. 福壽富貴. 永乎無窮(시기소시. 종기소종. 복수부귀. 영호무궁)이다.

 

이 사주도 분석해 보자.

계수 일간이 신월에 태어나 신의 지장간은 무임경이다. 이중 정기인 경금과 여기인 무토가 천간에 투출되었다. 따라서 정인격이다.

연간 정관 무토가 정인 경금을 생하고, 경금은 일간 계수를 생하고, 계수는 식식 을목을 생하고 있다. 지지 역시 연지 술토 정관은 월지 신금 정인을 생하고, 월지 신금은 일지 해수를 생하고, 일지 해수는 시지 식신 묘목을 생한다.


그런데 이 사주의 결함은 화가 없다는 점이다. 화는 연지 술토 중에 정화가 숨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운에서 도와주고 있다. 병인대운에 목화운이 같이 온다. 아마 이때부터 부유백만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주의 주인공은 鄕榜出身. 仕至黃堂. 一妻二妾. 子有十三. 科第連綿. 富有百萬. 壽過九旬(향방출신 사지황당. 일처이첩. 자유십삼. 과제연면. 부유백만. 수과구순)이다.

시골 관리 출신으로 시작하여 벼슬이 황당(태수)까지 이르렀고, 일처 이첩에 아들만 열세 명을 두었다. 아들들이 과거에 계속 합격을 하였고, 부는 백만금을 쌓았고, 수명은 구십 세를 넘게 살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과갑연등 과갑부절의 특징은 본인도 과거에 갑과로 급제를 했고, 벼슬이 정일품인 삼정승급이고, 자손들도 과거에 갑과로 급제를 하였다. 반면, ‘일처이첩 부유백만의 특징은 여자복과 재물복이다.


사주와 진로상담연수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두 사주 중에서 어느 사주를 택할지 질문을 해보면 남성들은 대부분 일처이첩 부유백만을 택하는 반면 여성들은 과갑연등 과갑부절님의 부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성별에 따라 뚜렷한 차이가 난다.


과갑연등은 정관격이고, ‘일처이첩은 정인격이다. 벼슬에서 차이가 난다. 자식도 과갑연등은 과갑을 했지만 일처이처의 자식들은 과제연면이다. ‘과제연면이면 지방 해시 합격자일 가능성이 크다.

처의 숫자를 보면 과갑연등은 오직 부인 한 사람하고만 알콩달콩 살았지만, 일처이첩은 다양한 여인들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더 오래 살았다. 이 차이는 사주의 구성에서 찾을 수 있다.


과갑은 기토 일간이 수가 연지에 자수 하나뿐이다. 운에서도 본격적인 수운은 말년에서야 들어온다. 반면에 일처이첩은 계해 일주가 경신월에 태어나 금수가 아주 강하다. 수는 정력을 상징한다. 수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차이가 가장 크게 보인다.

재산도 일종의 처복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일처이첩은 병인대운부터 원국 지장간에만 있던 화가 본격적으로 왔기 때문에 백만금을 벌 수 있었지만, 과갑은 재물인 수가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사주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좋은 사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섬겼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황제들이다. 위의 사주가 아무리 좋아도 황제의 신하일 따름이다. 그러면 이들을 마음대로 부렸던 황제의 사주는 어떨까?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세 명의 황제 사주를 살펴보자.

 

강희제

시 일 월 년

戊 戊 戊 甲

午 申 辰 午

乙甲癸壬辛庚己

亥戌酉申未午巳

 

강희제에 대한 사주 풀이는 이석영 선생이 지은 사주첩경 6권에 두 번이나 나온다. 첫 번째는 암요제궐(暗邀帝闕)을 설명하면서 나오고, 두 번째는 원원류장(源遠流長)을 설명하면서 나온다.

 

사주풀이 1. 암요제궐(暗邀帝闕)

이 사주는 연월 辰午가 그 중간에 자를 협공(挾拱)하여 무일주의 녹원을 이루었고 또 일시 申午가 그 중간에 를 협공하여 무일주의 옥당(玉堂) 천을귀인을 얻어냈으니, 午辰 申午는 그 귀중한 협공녹귀를 암암리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귀한 것은 午生제좌(帝座)의 제궐(帝闕)인데 사주에 申辰이 있어 申子辰으로 그 없는 를 암암리에 맞이하여 암요제궐을 이루고 있어 일국의 왕이 되었던 강희제의 사주이다.


그런데 그 제궐 戊申일 생으로써 甲辰旬中에 속하여 공망(인묘)이 아니고 년상 甲木辰中 乙木 습토에 근하고 申辰이 반회성 水局하여 일위 귀를 이루어 잘 돕고 있어 단연 귀격으로서 제위(帝位)를 육십 년간이나 길게 보전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암요제궐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암요제궐은 암암리에 제궐을 맞이하였다는 뜻이다. 제궐은 궁궐의 정문을 뜻한다. 이는 제좌와 대칭되는 말이다. 제좌(帝座)는 임금이 앉아 있는 자리로 용상(龍床)을 뜻한다.

 여기서 제좌는 태어난 생년의 지지(地支)를 말한다. 강희제는 무오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제좌는 이다. 제좌와 대칭되는 곳에 대궐문이 있기 때문에 제궐은 제좌와 충되는 글자다. 태어난 해가 년이기 때문에 의 충은 이다. 따라서 제궐은 이다.


또 다른 특이한 점은 공협(拱挾) 또는 협공(挾拱)으로 불리는 것인데, 연지 와 월지 사이에 가 끼이고, 일지 과 시지 사이에 가 끼인다. 그래서 일주 에서 볼 때 는 건록이고, 는 천을귀인인 옥당이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암요제궐인 가 일지 과 월지 사이에 끼어 완벽한 申子辰 삼합이 된다는 논리다.

 

즉 일반 사람들은 사주팔자이지만 강희제는 사주가 공협인 그리고 제궐인 까지 합쳐 총 사주십일자라는 뜻이다.

시 일 월 년

戊 戊 戊 甲

午未申子辰巳午

그러니 61년간 황제를 했고, 후세 사람들에게도 천고일제(千古一帝)의 칭송을 받고 있다.

 

사주풀이 2 원원류장(源遠流長)

원원류장에서는 戊午시가 아닌 丁巳시로 되어 있다.

丁 戊 戊 甲

巳 申 辰 午

乙甲癸壬辛庚己

亥戌酉申未午巳

 

이 사주는 진월 무토로 원신이 월간에 투출되고, 진사오로 화토가 왕하여 득령, 득지, 득세하였으므로 이 매우 하다.

그러므로 갑목 관을 용해야 의당 옳겠는데, 그만 그 갑목이 오화를 생하고, 오화는 진토를 생하고, 진토는 다시 신금을 생하고 있으니, 신왕호설정(身旺好泄精)에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하여 원원유장(源遠流長)으로 과연 귀격인 것이다.


순환상생(循環相生)에 그만 수가 빠져 있는데 다행히도 申辰이 반회수국(半會水局)하여 수를 인용하게 되는 까닭에 이제 주류불체(周流不滯)하여 완전히 순환상생을 이루어서 오행 중에 마땅치 않은 것이 없다. 일세에 기운하야 구세에 등극한 뒤로 육십일 년 간 제위에서 늙어 운에서 끝마치게 되었으니, 이는 가상관격에 용신으로써 금임어병사궁(金臨於病死宮)하여 금침수저(金沈水低)하게 된 까닭이다.


이 사주는 얼른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신왕가상관이다. 또는 일록거시(日錄居時). 이렇게만 보기 쉬우나 위와 같이 원원유장이 순환상생(循環相生)으로 좋은 격이 이루어져 국왕이 되었던 청나라 강희황제의 사주다.”

 

이 두 사주의 차이에 대하여 이석영 선생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자세히 설명을 하는 선생의 성품으로 보면 빠뜨리면 안 되는 부분이다. 암요제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원원류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연간의 갑목은 월간의 무토를 극하고, 시지의 사화는 일지의 신금과는 합형파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실제 강희제의 사주는 암요제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강희제(康熙帝, 1654-1722)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이다.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복속시켰으며,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한편 몽골 오이라트로 원정하여 중가르의 칸 가르단을 물리쳤다. 가르단을 지원했던 티베트를 청나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 손자인 건륭제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으로 천고일제(千古一帝)로 칭송받고 있다. 천고일제는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라는 뜻이다.


황후 4명을 포함하여 총 64명의 비첩을 두었다.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다. 아들 35명과 딸 20명 총55명의 자식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앞의 일처이첩과 비교 불가의 풍류다.

 

좌우명(座右銘)으로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후출사표의 한 구절인 국궁진력(鞠窮盡力)과 안거낙업(安居樂業)’을 삼았다. 즉 백성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낮춰 온힘을 다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즐겁게 일에 종사하게 해준다는 의미다.

 

강희제를 이어 아들인 옹정제가 그 뒤를 이었다. 옹정제 사주 역시 이석영 선생이 지은 사주첩경 6권에 관로살장(官露殺藏)이라는 항목에 소개된 내용이다.

 

옹정제

壬 丁 甲 戊

寅 酉 子 午

庚己戊丁丙乙

午巳辰卯寅丑

 

이 사주는 정일생이 오화 연지에 근하고 인오로 화국을 이루고 있으니 일주는 약화위강이 된다. 사주에 임수는 투출하여 관로가 되고 동지 계수 살은 자중 깊숙이 간직되어 살장이 되니 왈 관로살장(官露殺藏)이라고 한다.

그리고 생일에 일귀, 시간에 월덕을 놓아 크게 귀하게 되는 사주로 태어났다. 그래서 46세에 제위에 올라서 13년간 잘 있다가 경금대운에 갑목을 충극하여 불록지객이 되고 말았다.”

 

옹정제 사주는 정화 일주가 자월에 태어나 임수가 시간에 투출하여 정관격이다. 비록 정화가 자월에 태어나 실령을 했지만 연지 오화와 시지 인목이 합을 하여 화가 강하다. 일주 정유는 천을귀인인 옥당이다. 태어난 날에 천을귀인은 정유, 정해, 계묘, 계사일밖에 없다.


그런데 이 사주가 안 좋은 부분은 연지 오와 월지 자가 자오 충이다. 또한 일지 유와 월지 자는 자유 귀문관살이 있다. 그리고 시지 인목과 일지 유는 원진살이다. 실제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에 비하여 한 격이 떨어지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뛰어난 면도 있다. 특히 국고를 늘리는 재정적인 면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옹정제(雍正帝,(1678 -1735)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이다. 어릴 때부터 유교의 경전과 불경을 고루 암송하였고, 무예와 사냥을 학문보다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활솜씨는 가히 황자들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여 80근의 강궁을 능히 다루어 백발백중이었다.


옹정제는 아버지의 정책을 잘 이어갔으며 세금을 단일화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고, 강희제 말기부터 시작되어 온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1721(강희 60) 700만 냥밖에 없던 국고가 1735(옹정 13)에는 6천만 냥이나 있었다.

그는 재위 초년에 권력 강화에 힘써 자기 형제들 중 일부와 그들의 지지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황권 강화를 위해 핵심적인 군사조직인 팔기군에 대한 지휘권 자격에서 황족들을 제외시키고 황실 직속으로 바꾸었다.


옹정제는 성실함에 극치를 이룬다. 하루 4시간에서 5시간밖에 자지 않고 정무에 몰두하고 1년 내내 쉬는 날이 없이 바쁘게 지냈다. 특히 식사를 하면서도 결재 서류를 보았다고 한다.

옹정제는 자신이 거처하던 양심전(養心殿)의 대청에 좌우명인 愿以一人治天下 不以天下奉一人’(원이일인치천하 부이천하봉일인), 천하가 다스려지는 데에는 한 사람의 책임에 달린 것이며 자신의 한 몸을 위해 천하를 희생시키지는 않으리라라는 글귀를 걸어놓았다.


옹정제는 양심전 대청 중앙에 중정인화’(中正仁和)라는 편액도 걸어 놓았다. 이는 중립적이고, 정직하며, 인자하고, 화애로움으로 통치하고자 하는 통치철학을 밝힌 것이다.

 

중국역사상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인 건륭제에 대한 사주는 임철초 선생이 적천수 천미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건륭제

시 일 월 년

丙 庚 丁 辛

子 午 酉 卯

 

96 86 76 66 56 46 36 26 16 6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천간에 경신병정이 있으니 화련추금(불이 가을의 금을 제련함)의 올바른 배합이 이루어졌고, 지지에 자오묘유가 있으니 이 또한 감리 진태가 배합을 이루었다. 지지에 사정(四正)이 있으니 기가 팔방으로 통하고 있다.

그런데 오행 가운데 토가 없으니 비록 추령에 출생했으나 왕하다고 논할 수 없다. 가장 기쁜 것은 자오가 충하여 수가 화를 극하여 오화가 유금을 파하지 못하니 충분히 일주를 보한 것이다. 더욱 묘하게도 묘유가 충하여 금이 목을 극하니 묘목이 오화를 생하지 못하여 제복(칠살을 제압함)이 잘되었다.


 묘유는 진태로서 목금이고 인의는 진기를 주관하는 진정한 기틀이 되고, 자오는 감리로서 수화이고 천지의 중기를 관장하며 또한 감리가 일월의 정체를 얻으니 소멸하지 않고 한편으로 윤택하고 한편으로 화창하여 좌하에 단문()이 있고 수화기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팔방의 모든 무리가 복종하여 조공하러오고 사해가 하나가 되었으며 금마와 주연처럼 용맹을 떨치니 예의 지역에 있는 이리같고 토끼같은 무리들이 모두 장막안에 귀의하고 복종하여 천하가 화평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건륭제 사주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한 글자라도 옆으로 옮기거나 바꾸어 도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경오일주가 유월에 태어나 월령을 얻었다. 그러나 토가 없어 인성이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연간에 신금이 있다.


 이 신금은 시간의 병화와 합이 되어 거살 유관 즉 편관인 병화를 신금이 병신 합으로 묶어 놓고는 정관 정화가 돋보이게 앉아 있다.

그리고도 묘하게 연간의 신금은 유금에 뿌리를 내리고, 월간의 정화는 일지 오화에 뿌리를 내리고, 일간 경금은 월지 유금에 뿌리를 내리고 또한 연간의 신금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지지 또한 수의 중심인 자수와 화의 중심인 오화와 금의 중심인 유금과 목의 중심인 묘목이 각각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 현묘한 중용지도를 이루고 있다.

 

건륭제(乾隆帝,1711-1799)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735-1796)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옹정 13) 옹정제가 급사하자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했다.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10년 동안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완성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중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미얀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사치, 반란,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났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건륭제 사후 아들인 가경제가 화신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화신의 재산은 국가 총 수입액의 20년치에 다다를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1795(건륭 60)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 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4년까지 합쳐 총 64년 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했다.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세 황제들의 사주와 업적을 볼 때 관심이 가는 부분은 수명이다. 오복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수()이다. 오래 사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우리 나이로 강희제 69, 옹정제 59, 건륭제는 90세까지 살았다.


강희제는 하루에 무려 300개에서 400개의 문서들을 모두 보고 그것을 결재하고 일일이 그 상소에 대한 비답도 적어주었다. 때로는 밤을 새울 때도 많았다. 그러나 강희제는 엄청난 양의 정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주 사냥을 갔다. 강희제는 강궁을 자유자재로 다룰 만큼 활의 명수였다. ()과 무()를 모두 중시하여 힘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옹정제는 돌연사를 했는데 암살설과 수은 중독설, 과로설이 있다. 암살설은 옹정제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기고하여 문자의 옥으로 멸문을 당한 산동성 출신의 학자 여유량의 손녀 여사랑이 궁녀로 잠입하여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는 설이다. 수은 중독설은 도교에 심취해 진시황제처럼 불로장생을 꿈꾸다가 수은이 들어간 단약에 중독되어 사망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하루에 잠을 4시간 가량만 자고 결재서류를 읽으면서 밥을 먹었을 정도여서 과로사를 했다는 설이다. 이 중 과로사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건륭제는 아침 6시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나면 혼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정무를 시작했다. 신하를 접견하거나 결재, 지시사항 등을 오후 2시까지만 했다. 오후 2시부터 15분 정도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는 쉬면서 독서, 그림, 서예, 학자들과 토론 등 취미활동 만으로만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건륭제는 이렇게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기에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건륭제가 실제 나이보다 10년이 젊게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연암은 건륭제를 황제의 네모난 얼굴은 하얗고 조금 누런 빚을 띠었으며, 수염은 절반쯤 하얗게 세었고 나이는 60세 가량으로 봄날의 화창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건륭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1780년 진하사절인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경(북경), 열하 등지를 여행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세 황제를 보면 장수에는 사주도 중요하지만 생활습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강희제의 사주는 장수의 상징인 원원류장과 사주 11자인 암요제궐 이다. 이러한 사주는 90세는 넘겨야 하는데도 자주 밤을 세워가면서 정무에 너무 전념하여 몸을 혹사하여 69세에서 멈추었다.


옹정제 사주는 오행주류격이면서 관로살장이다. 이는 70세는 넘겨야 하지만 59세에서 멈추었다. 옹정제는 4시간만 자고 식사를 하면서도 결재서류를 보았다. 단 하루도 편히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륭제 사주는 천간에서 병경 충, 정신 충, 지지에서 자오 충, 묘유 충이다. 즉 천간과지지 모두가 다 충이다. 이는 일반적인 사주 이론에서는 단명의 대명사다. 그런데도 섭생과 고상한 취미생활로 90세의 장수를 누렸다.


건륭제는 오후 2시 이후에는 일절 정무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하면서 즐거움을 누리고 살았다. 즉 균형 있는 삶을 산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여유 있게 즐기는 삶이야말로 가장 좋은 삶이다.

이는 요즈음 신조어인 워라밸(Work-And-Life Balance)을 일찍이 보여준 삶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은 사주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사주를 어떻게 취장보단(取長補短)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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