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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일지암과 초의선사

by 황교장 2007. 8. 30.

                                   일지암과 초의선사


천년수에서 위쪽으로 조금만 가면 왼편에 조릿대로 둘러싸인 만일암지가 나온다.  독특하게 생긴 오층석탑이 폐사지에 신비롭게 서 있고, 석등 부재 등 많은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석탑 앞에 서니 정말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풍수 상 이런 곳은 명당인데 폐사지가 된 이유를 짧은 내 풍수실력으로는 잘 모르겠다.

 

만일암지 오층석탑

 

석탑은 현재의 상태로 본다면 단층기단의 5층 석탑이다. 그러나 지하에 묻힌 상태를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단층기단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또한 1층 탑신을 보면 한 번 해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륜부는 현재 남아있지 않고 석등의 부재가 올려져 있어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이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탑 정상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석등 하대에 해당되는 복련석이 그대로 남아 탑 주위에 흩어져 있다.

 

 상륜부에 올려진 석등의 부재

 

그러나 탑신부 전체는 유실된 것이 없다. 전체 높이는 5,4m이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성이 튼튼하고, 옥개석 윗면 네 귀퉁이의 우등마루를 도드라지게 한 기법이 옛 백제석탑의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중반기(12∼13세기)로 보고 있다.

 

옥개석 상면 네 귀퉁이의 우동마루를 도드라지게 한 기법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고 대둔사의 어느 안내문에도 없는 탑이라 직접 와서 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만일암지만의 아늑한 분위기가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 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간식을 먹기에 적당하도록 폐사지에 남은 석재로 둥글게 자연석 식탁과 돌방석이 만들어져 있어 정겨웠다.


정상까지 그다지 멀지 않아 가려다가 날이 너무 무더워 마음을 접고 일지암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일지암까지는 내리막길이라 쉽게 갈 수 있다. 내려오는 길에 서울에서 왔다는 등산객들이 잠깐 쉬고 있으면서 질문을 한다. 자기들은 어제 월출산을 등산하고 오늘은 두륜산에 왔다고 하면서 두륜산은 처음이라며 길 안내를 부탁한다.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라고, 내 병 중 하나가 도져서 잘난 체를 했다. 월출산 구정봉 밑에 있는 ‘월출산마애불좌상’을 보고 왔는지를 물으니, 보지 못했다고 한다. ‘월출산마애불좌상’을 보지 못했으면 월출산을 못 본 것과 같다. 두륜산도  ‘천년수’와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을 보지 않으면 두륜산을 못 본 것과 같으니 정상으로 바로 가지 말고 코스를 ‘천년수’와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을 보고 가도록 일러주었다. 이분들은 오늘 재수가 좋은 사람들이다.


일지암 앞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가 절을 새로 짓는 주지스님이다. 일지암 주지스님은 초의선사의 깊은 뜻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없어도 좋을 일지암 대웅전

 

일지암은 대선사 초의(草衣·1786∼1866)가 81세에 입적할 때까지 40년간을 사셨던 곳이다. 초의선사의 생애를 알아보자. 선사의 속성은 장씨고 이름은 의순(意恂), 자(字)는 중부(中孚)다. 초의(艸衣)는 법호(法號)다.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사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헌(申櫶)의 초의대선사탑비명(艸衣大禪師塔碑銘)에 의하면, 모친이 품에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다 한다. 5세 때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마침 부근을 지나던 어느 스님에 의해 구조되어 살아났다. 그 스님이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 되던 해 남평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대덕(大德) 벽봉민성(碧峰敏性) 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선사는 19세 때, 대둔사로 가던 중 월출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설과, 월출산에 혼자 올라갔다가 때마침 해가 지면서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일순간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경험하면서 깨달음〔開悟〕을 얻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공통점은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후 해남 대둔사 완호(玩虎)스님을 계사(戒師, 계를 주는 스님)로 구족계(具足戒,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 비구에게는 250계, 비구니에게는 348계가 있다)를 받고 법맥(法脈)을 이었으며 초의(艸衣)라는 법호를 받았다.

초의선사는 선(禪)과 교(敎)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 제반 학문에까지 조예가 깊었으며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또한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선사는 차츰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은거의 뜻을 갖고 대둔사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띠집을 짓고 “뱁새는 항상 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 가지에만 있어도 편하다”는 한산시(寒山詩)에서 일지(一枝)를 딴 일지암(一枝庵)을 지어 일생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이다. 선사는 이곳에서 1866년 81세의 연세로 입적했다. 법랍 65세다.

 

일지암

 

선사는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 친구인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김명희, 김상희 형제,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 형제, 해거도인 홍현주, 조선 최고 시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특히 동갑내기인 초의와 추사의 우정은 각별하여 평생 지속되었다.

추사가 보낸 편지 한 토막을 소개하면

 ‘편지를 보냈지만 한 번도 답을 보지 못하니 아마도 산중에는 반드시 바쁜 일이 없을 줄 상상되는데......달갑게 둘로 갈라진 사람이 되겠다는 건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스님이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요.’

차를 보내달라는 이 편지는 아이들의 투정 같은 느낌마저 들어 두 사람의 지극한 우정이 느껴진다. 추사가 초의선사의 차를 받고 답으로 써주었던 글씨 ‘茗禪’(명선, 차를 마시며 삼매에 든다, 간송미술관 소장)은 추사 예서체의 백미라고 한다.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 참조)

이런 우정으로 완당의 유배시절에는 초의가 제주도로 건너가 6개월간이나 벗을 해주기도 했다. 추사가 71세의 나이에 돌아가시자, 초의선사는 그의 영전에 ‘완당김공제문(玩堂金公祭文)’을 지어 바쳤다.

완당에게 바친 이 제문에서 이렇게 그를 회상했다.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도 오랜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별로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그대의 글을 받을 때마다 그대의 얼굴을 대한 듯했고, 그대와 만나 얘기할 때는 정녕 허물이 없었지요. 더구나 제주에서 반 년을 함께 지냈고 용호(蓉湖)에서 두 해를 같이 살았는데 때로 도에 대해 담론할 때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실로 봄바람이나 따사한 햇볕 같았다오.”

정말 대단한 우정이시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해도 내 마음을 다 알아주는 그런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잘 산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초의스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 있다는 것이다. 스님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畵〕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다. 따라서 초의스님의 사상은  法 , 禪, 茶,  詩,  畵는 같다는 것이다.

또한 초의선사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한 것이다. 동다송은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 만드는 법, 차를 끓이고 마시는 법, 차의 생산지와 품질 등을 노래한 것이다. 토산차가 중국 것에 못지않음을 찬양하고, 토산차를 따는 시기도 중국과 달라 중국책인 다경(茶經)에서 말한 곡우(穀雨, 양력 4월 20일 전후) 뒤가 아닌 입하(立夏, 양력 5월 6일 전후) 다음이 적당하다고 했다. 동다송은 1책, 필사본, 7언시로 총 31송이며 송마다 주를 붙여 본문을 보충했다.

다음은 동다송 제 16송이다.


一傾玉花風生腋(일경옥화풍생액)

옥화 한 잔 마시니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어

身輕己涉上淸境(신경기보상청경)

몸이 가벼워져 하늘을 거니는 것 같네

明月爲燭兼爲友(명월위촉겸위우)

 밝은 달은 촛불이 되고 또한 친구가 되며

白雲鋪席因作屛(백운포석인작병)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스님은 옥화 차 한 잔의 맛을 이렇게 멋지게 노래한 것이다.

예로부터 좋은 차는 바닷가 근처에 아침안개가 자주 끼고, 대나무가 많은 산에서 난다고 했다.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일지암 주변은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차밭을 일구어 차를 직접 만들고 차를 마시면서  인생의 108번뇌를 차 한 잔으로 하나의 도(道)로 승화시킨 셈이다.

 

유천

 

일지암에는 초의선사가 무척 자랑하고  즐겨 음용했다는 유천(乳泉, 어머니의 젓 같은 샘물)이 흐르고 있다. 소나무 둔덕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대나무 대롱을 타고 차례로 세 개의 돌확에 담기는데, 이 물이 우리나라에서 찻물로는 최고로 쳐 주고 있다고 한다.

 

 유천에서 물 뜨기


유천에 흐르는 물을 수통에 가득 채워 집에 가서 차를 타 마셔 보리라 생각하면서 일지암을 내려왔다. 무려 3시간 반이나 걸렸다. 배에서 이미 쪼로록 소리가 났다. 이쯤 되면 뭘 먹어도 맛이 있다. 대둔사 앞에는 맛집이 많다. 작년 겨울 직원연수 때 가장 칭찬 받은 것이 바로 맛좋은 전라도 음식집이다. 저녁은 전주식당 한정식, 아침은 유선관에서 식사를 했는데 모두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전에 왔을 때 먹었던 호남식당의 자연산 버섯탕 맛을 잊지 못해 호남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 점심식사 시간이 되려면 한참 전이라 식당 안은 한적했다. 우리가 첫손님이었다. 버섯탕이 나와서 시원한 국물을 한 숟갈 먹고 나니, 주인아주머니 왈 “버섯탕은 맛으로 먹지 말고 약으로 먹어라”고 한다. 자연산 버섯탕을 먹고 나니 몸에 있는 독소가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식당 안에는 직접 버섯을 따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고 있다. 버섯의 종류가 너무 많아 어떤 종의 버섯이 가장 귀한 버섯인지를 물었다. 주인아주머니 왈 능이버섯이 버섯의 왕자라면서 “송이버섯은 멋으로 먹고 능이버섯은 약으로 먹는다.” 라고 답한다. 기름기가 많은 느끼한 고기음식에 능이버섯 한 조각만 넣어도 기름기를 다 빨아들인다고 한다. 두달 동안 매일 버섯탕만 먹은 단골 고객 중 한 사람은 지방간이 완치되었다고 자랑을 하신다. 버섯을 직접 따러 다닌다는 아주머니는 자연산 버섯은 식용을 구별하기가 무척 어려워 30년 넘게 한 본인도 실수를 하니 초보자들은 함부로 버섯을 따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신다. 어둡고 컴컴한 숲속에서 딴 것이라 막상 집에 와서 고르면 독버섯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따 놓은 버섯이 동이 나 이제 버섯탕 메뉴는 당분간 내려야 하겠다고 하면서 아주머니는 산으로 버섯을 따러 가신다고 하셨다.

 

황토 건강 발맛사지길

 

버섯탕 먹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발맛사지를 하도록 만들어 둔 황토건강돌길을 걸었다.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걸어가는데 제법 아기자기하게 다양하게 잘 만들어 두었다. 잘 먹고 소화까지 잘 시켜 주는 코스였다. 대둔사에서 밥 드시고 난 뒤에는 꼭 한번 걸어 보시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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