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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녹우당과 고산 윤선도

by 황교장 2007. 9. 3.
 

녹우당과 고산 윤선도


대둔사에서 해남읍 쪽으로 약 4km 쯤 가다 보면 왼쪽에 범상치 않는 동네가 나온다. 고산 윤선도선생(1587-1671)의 유적지인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이다.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덕음산

  

고산은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였다. 봉림대군인 효종은 즉위 후 선생에게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효종이 죽자 수원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 온 것이 지금의 사랑채다.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이다. 그러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 부른다. 집 뒤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하여 녹우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녹우당

 

이 집은 형식과 규모면에서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유물전시관에는 4,6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고산과 그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와 관련된 것이다. 그 중에는  초상화 중에서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이 있다. 또한 지정14년 노비문서(보물 제483호)는 고려시대 개인의 노비문서로는 유일한 것이다. 이는 이 집의 내력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말해 준다.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보물 제482호) 등 가치 있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녹우당 은행나무

 

녹우당 입구에는 500여 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고, 녹우당 안마당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잠시 녹우당 마루에 누웠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회화나무에 만발한 꽃들이 떨어진다. 그 꽃들을 보니 25년 전 이 나무 밑에서 텐트 치고 일박을 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쌀이 다 떨어져 녹우당 안주인께 얻은 기억이 새삼스럽다.

회화나무는 일명 '학자수(學者樹)'라 불린다. 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공(三公)들이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각자 회화나무 그늘 아래 앉아 서로 마주보면서 정사를 의논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는 출세한 사람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 녹우당에 회화나무를 심은 연유도 이집안의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도 하고 큰 학자가 많이 배출되라는 염원일게다. 

 

녹우당 회화나무

 

녹우당 마루에서

  

지금 녹우당에는 고산의 14대  종손이  살고 있다. 지금도 설이면 2백 개가 넘는 놋그릇을 꺼내 닦고, 떡쌀만 한 가마를 씻는다고 한다. 이 집의 음식 중 유명한 것은 뒷산의 비자열매 속으로 만든 비자강정이다. 비자나무 열매는 피를 맑게 한다고 한다.

녹우당은 집터만 만평에 이르고 주변까지 다 합치면 백만 평은 될 정도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늑함과 호방함을 동시에 주는 곳이다.

이 집 풍수를 보자. 첫째, 뒷산인 덕음산(德陰山)이 북현무이다. 덕음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고 적당하다. 오행의 분류 상 토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산의 정상 부분이 한 일 자처럼 평평한 산을 풍수에서는 토체라고 한다. 사주에서 토는 믿음을 뜻한다. 또한 믿음은 덕으로도 표현된다. 덕음산은 덕의 그늘이 있는 산, 믿음의 그늘이 있는 산이 되는 셈이다. 풍수 상 이 덕음산은 산 가운데 바위가 많은 것이 결점이다.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가난해진다 하여 이 집의 시조인 어초언의 유언에 따라 바위가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비자나무를 심고 관리했다고 한다. 이 비자림의 수령이 오백년 전후고, 면적은 구천 평에 달한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 선조들의 예지와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둘째, 남주작을 살펴보자. 남주작은 집 앞에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안산(安山)이라고 한다. 안산은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 된다. 또한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중용지도다. 이 중용이야말로 덕이다. 녹우당의 안산이 바로 중용지도의 산이다. 생긴 모습도 볏단을 쌓아 올린 노적봉을 닮았다. 이는 재산이 풍족하다는 의미다.

 

유물관과 좌청룡

 

셋째, 좌청룡과 우백호을 살펴보자. 좌청룡은 집을 등지고 보았을 때 왼쪽 방향이고, 우백호는 오른쪽 방향이다. 풍수에서는 남향집을 최고로 친다. 따라서 왼쪽은 동쪽을 뜻하고, 오른쪽은 서쪽을 뜻한다. 동쪽은 오행에서 푸른색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쪽에 있는 산세가 좌청룡이다. 서쪽은 오행에서 흰색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쪽의 산세는 우백호이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 좌청룡은 청룡이 꿈틀거리는 형상이 좋고, 우백호는 백호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이 좋다고 한다. 녹우당의 좌청룡 우백호는 이 이론에 적합하다. 좌청룡과 우백호의 실질적인 기능은 바람을 막아주는 데 있다. 풍수가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을 감추고 물울 얻음)를 줄여서 풍수(風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녹우당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람을 잘 막아준다.


녹우당이 유명한 이유는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선생의 고택이기 때문이다. 선생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자.

호는 고산(孤山)이다.  30세인 1616년(광해군 8년)에 이이첨 일파의 죄를 탄하는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하며,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에 이배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그 후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년) 봉림(鳳林), 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지자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보길도에 들어가 그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으로 유배를 당했으나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보길도 부용동에 정자를 짓고,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고산은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를 올렸다가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년) 선생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었다. 1671년(현종 12년)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최초의 유배지인 경원에서는 1년을 보내고. 다음 해인1618년 겨울에 부산 기장군 죽성리로 이배되었다. 무려 6년 간이나 죽성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하지만 우리 고장 부산의 기장군 죽성리에서 고산이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선생은 마을 뒷산인 봉대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죽성사람들의 병을 보살펴 마을 사람들은 고산을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고 부르며 경애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황학대에 자주 올랐다. 황학대는 노란 학이 나래를 펴고 나르는 듯하다 하여 선생이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다. 이 부근 해안가에는 황색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점차 황폐해지고 있는 황학대의 모습이다. 이제라도 고산선생의 족적이 남아 있는 이곳을 아끼고 잘 가꾸어야 할 것이다.

선생이 이처럼 자주 유배를 당하는 데는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시비를 가림에 있어 조금도 불의와 타협이 없다는데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산은 태어날 때 '죽은 용'을 태몽으로 하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자 집안에서는 ‘일생이 복잡하겠구나’ 했다고 하는데 태몽처럼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한 삶을 살았다. 일생 동안 총 20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 생활을 하였다

또한 선생은 가무를 사랑하는 풍류인으로 거문고의 대가이기도 했다. 유물관에는 선생이 즐겨 애용한 거문고가 남아 있다. 특히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선생이 남긴 시조 75수다. 이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오늘날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널리 알려진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는〈산중신곡〉18수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어부사시사 40수 중에서 술에 관한 내용이 내 마음에 들어 한 수 소개하고자 한다.


-춘사 8-

취(醉)하야 누얻다가 여흘 아래 나리려다

배매여라 배매여라

락홍(落紅)이 흘러오니 도원(桃源)이 갓갑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세홍딘(人世紅 )이 언메나 가렷나니


술에 취해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니

(배를 매어라 배를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무릉도원이 가까이 있는 듯.

아아! 인간 세상 더러운 때가 얼마나 내 눈을 가렸던고.


시조시인 고산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고 있지만 고산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바로 풍수실력이다. 고산을 풍수의 최고 단계인 ‘신안’이라고 극찬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풍수학자이기도 한 정조대왕이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고산은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으로 왕릉 선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러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수원 땅을 최고의 길지로 추천하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송시열, 송준길 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훗날 정조는 고산이 추천한 곳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화성의 융릉(隆陵)이다.(주간동아 353호와 448호 참조)

선생의 풍수실력은 이처럼 대단했다. 또한 고산의 묘는 해남 윤씨의 부귀를 가져다주고 ,1만8천 가구의 후손으로 번창하게 한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이의신과 고산 사이의 ‘명당 빼앗기’ 전설은 이 고장뿐만 아니라 풍수가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고산의 묘 자리는 고모부라고 알려진 명풍(名風) 이의신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잡아놓은 자리였다고 한다. 고산과 이의신이 연동에서 같이 지낼 때 이의신이 밤중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가 한식경이 지나면 들어오기를 자주 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던 고산은 필시 이의신이 자기가 죽은 뒤 쓸 묘 자리를 구하러 나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술을 취하게 권한 뒤 곯아떨어지게 하였다. 이의신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고산은 이의신이 항상 타고 다니는 나귀를 타고 채찍을 휘둘렀다.

나귀는 밤이면 그 주인이 매일처럼 다녀오는 길을 따라 내달렸다. 나귀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더니만 어느 산중턱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고산이 주위를 살펴보니 나귀 똥이 많이 널려 있고 담배를 피운 흔적이 있어 이의신이 이곳에 온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천하의 명당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가묘를 해놓은 후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잠을 잤다.

다음날 이의신에게

"제가 신후지지를 하나 잡아 놓았는데 좀 보아 주십시오."

라고 능청을 떨며 말하였다. 이의신이 고산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보니 자기가 잡아 놓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역시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로구나!"

하면서 좌향을 바로 잡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산이 이의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기보다는  이의신에게 풍수를 배우는 과정에서 좋은 자리를 추천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인즉 선생의 묘소가 있는 금쇄동은 면적이 120여 만 평으로 지금까지도 종가 소유로 전해온  고산의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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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eart Belongs to You

Through the window of my soul

All the secrets that I hold

Will be yours to share for always, always

Like a whisper in the wind

The gentle breeze touches my skin

And I know you're with me always, always

I can feel it in the air

The fire that we share

Can only come from deep within

It's a light that burns so bright

It guides you through the night

And leads you to me

So find your way back

And hold me, touch me

Let the love come rushing through me

I'm yours with every breath I take

forever and ever

hold on, to love

cause deep down

That's what we're made of

Never let go for my heart's sake

cause my heart belongs to you

I lie awake to hear you breathe

Only you can feel the need

That builds and burns so deep inside me, inside me

As the moon lights up the sky

There's a thousand reasons why

My heart will only beat for you

You're the reason that I live

So now all I've got to give

I give it to you

Just don't fight the feeling

Hold me, touch me

Let the love come rushing through me

I'm yours with every breath I take

Forever and ever

Hold on, to love

cause deep down

That's what we're made of

Never let go for my heart's sake

cause my heart belongs to you

(Don't give up, but just give in) ah (I will always be here waiting for you) waiting for you

Love will see us through??br>

Hold me, touch me

Let the love come rushing through me

I'm yours with every breath I take

Forever and ever

Hold on, to love

Cause deep down

That's what we're made of

Never let go for my heart's sake

Cause my heart belongs to you

MY heart belongs to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