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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녹우당 유물전시관과 윤두서-관상으로 본 자화상과 미인도-

by 황교장 2007. 9. 4.
 

녹우당 유물전시관과 윤두서

-관상으로 본 자화상과 미인도-


녹우당이 배출한 인재들 중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분은 윤두서(1668~1715) 선생이다.

선생의 호는 공재(恭齋)다. 공재선생은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이 심해져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경제·병법·천문·지리·산학·의학·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했다.

 

유물관에 전시된  고 천문학 서적(관규집요)

 

특히 화가로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자화상’, ‘노승도(老僧圖)’ 등 불멸의 명작을 많이 남겼다.

당시에 “일국의 재상이 되고도 남을 높은 지식과 도덕을 갖춘 인물”로 평가될 만큼 개인적인 자질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남인 계열이었던 집안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노론 세력이 집권하면서 벼슬에 대한 꿈은 접어야 했다. 또한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을 계속 겪으면서 괴로운 날의 연속이었다. 결국 해남 녹우당에 내려와서 48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통 유학의 관념적 태도를 극복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 및 경세치용(經世致用) 등을 구현하고자 한 실학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시작으로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거쳐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체계화되어 다산 정약용이 집대성하게 된다. 실학을 말할 때 공재를 제외하면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실학의 한 가운데에 공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공재는 당대 최고의 명문인 해남 윤씨의 종손이다. 고산 윤선도가 그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은 공재 친손녀의 아들인 외증손자다. 또한 공재의 첫째 부인은 지봉 이수광(1563~1628)의 증손녀다. 그리고 공재의 친한 벗은 녹우당 현판을 쓴 동국진체의 창시자 옥동 이서(1662~1723)와 그의 동생인 성호 이익(1681~1763)이다.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현판(동국진체)

 

반계 유형원(1622∼1673)과의 관계는 반계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 금쇄동에 대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금쇄동은 동국지리지에서 최초로 언급한 곳으로 반계가 공재와의 교유를 통해 정보를 얻었거나, 공재가 살고 있는 녹우당에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수광-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계보가 모두 공제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공재 윤두서의 삶과 학문과 예술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배경이다.

특히 공재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옥동 이서다. 옥동은 대사헌 이하진의 아들이며  이익의 셋째 형이다. 옥동과 공재는 학문과 예술의 평생 동반자였다. 옥동의 문집이 녹우당에 보관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공재와 옥동은 또 집안 형제끼리도 매우 가까웠다. 

 

 

성호 이익은 공재가 세상을 떠났을 때 통곡의 제문에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라고 회상하였다. 또 "공이 세상을 떠나니 모르는 것을 들을 곳이 없게 되었다"라고 아쉬워 했다.

천하의 이익선생도 공재를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아 공재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공재가 남겨 놓은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공재의 최고 작품으로 불리는 것은 국보 240호인 자화상이다.

 

자화상

 

이 자화상은 숱한 의문으로 이름 높다. 초상화에 목과 상체는 물론 귀도 없이 머리통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대부 지식인인 공재가 유교적 미의식을 정면으로 벗어나면서까지 엽기적인 자화상을 그린 까닭은 무엇일까? 왜 최고의 걸작인 자화상을 미완성 그림처럼 그린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논란거리인 공재의 ‘머리통 자화상’에 얽힌 비밀이 최근 상당 부분 풀렸다.  적외선 투시 분석 결과 눈으로 보기 힘든 상체의 옷깃과 도포의 옷 주름 선의 표현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현미경으로 자화상 얼굴을 확대해 본 결과 화가가 생략한 것으로 알려져 온 양쪽 귀 또한 왜소하지만 붉은 선으로 그린 사실도 밝혀져 정교한 인물상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공재의 벗이었던 이하곤(1677~1724)이 ‘자화상’에 부친 시를 소개하면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 길게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우인(羽人)이나 검객이 아닌가를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대개 또한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인(羽人)은  "전설에 나오는 날개가 있는 신선"은 우객(羽客)인데 아마 같이 의미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자화상에 대해 평론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 풍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풍만한 얼굴에 반듯한 눈썹, 정면을 응시하는 눈, 그리고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수염 등은 선비의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고, 마치 살아있는 얼굴을 보는 듯하다. 특히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고, 선비다운 기개에 충만해 있다. 이 자화상을 통해 학문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그 자신에게 다그쳤을 철저한 엄격성과 불운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꼿꼿하게 지켜 나간 선비의 옹골찬 지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평론가들은 각기 다양한 평가를 내렸지만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바로 눈이다. 관상학에서 관상을 볼 때 얼굴을 10이라 보면 그 중 눈이 9를 차지한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눈은 중요하다. 선생을 오래하면 학생들의 눈빛만 보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듯이, 관상가도 경지에 오르면 그 사람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자화상은 정말 강렬한 눈빛을 표현하고 있다.

관상에서 눈은 지혜, 의지력, 추진력, 선함과 사악함 등을 나타내는데 공재는 일국의 재상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눈과 법령을 가지고 있다. 공재의 눈은 지혜와 의지력 추진력이 있는 눈이다. 즉 사욕이 없고 국리민복을 위한 대의를 품은 눈이다. 법령은 관상용어로 콧방울에서 입 주위로 퍼져 나가는 주름을 말한다. 법령은 지도력과 의지와 신념 등을 나타내는데 공재는 훌륭한 재상의 법령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리더의 법령을 가졌다. 

 

그러나 자화상으로 공재의 관상을 볼 때 건강상의 결함이 보인다. 누당이다. 누당은 웃으면 눈 밑에 볼록하게 나오는 곳이다. 누에꼬치를 닮았다고 해서 누당이라고 부른다. 누당은 주로 자식복과 정력을 나타내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부분이 처지고 힘이 없어진다. 내가 볼 때 공제의 관상에는 누당에 문제가 있다. 자화상은 공재가 45세에 그린 것이다. 45세의 나이에 이 정도로 누당이 처져 있으면 에너지가 거의 고갈이 된 셈이다. 눈의 정기는 아직도 살아 있으나, 자신의 신체적인 에너지는 다해가는 안타까운 관상이다. 이럴 때는 세상사 모든 일에서 한 발 물러나 관조의 경지로 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을 서서히 다시 만들어야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체력이 바닥났는데도, 의욕과 이상이 너무 많은 눈빛이다. 그동안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면 에너지는 고갈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자신의 능력보다 벼슬이 높거나, 자신의 능력보다 역할이 많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생명이 단축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명심해야 한다. 이점은 나 자신도 자주 반성하는 대목이다.


녹우당 유물 전시관에는 잘 채색된 지도가 두 점이 있다.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와 일본여지도(日本與地圖, 보물 제481호)다.

 

일본여지도

 

공재가 숙종의 명에 의해 제작한 동국여지지도는 조선말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보다 150년 가량 앞선 지도로 각 도를 색깔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섬세함과 사실주의적인 면을 느낄 수 있다.

이와 함께 일본여지도(日本與地圖)는 숙종이 임진왜란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공재에게 명하여, 공재가 48인의 첩자(諜者)를 일본에 보내 3년간 지리를 조사케 하여 일본의 지형, 거리는 물론 각 지방의 부호들의 집까지 상세히 파악하여 그려 넣은 지도이다. 이로 보아 숙종은 개인적으로 공재의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신임했다고 느껴진다.

 

녹우당에 올 때마다 가장 보고 싶고, 오랫동안 감상하는 그림이 있다. 바로 미인도다. 공재의 손자인 청고 윤용(靑皐 尹溶, 1708~1740)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작품이다. 윤용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타고난 자질이 할아버지인 공재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욱 뛰어났다고 평가받은 손자지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미인도는 그 당시의 부녀자들의 신분과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미인도

미인도가 나를 사로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미인의 관상이다. 반달 같은 눈썹에 쌍꺼풀이 없는 보통 크기의 눈, 도톰한 볼과 순한 귀, 꼭 다문 아주 작은 입술, 통통한 손에 가는 손가락, 가는 허리에 부풀려진 엉덩이, 가슴은 천으로 바짝 조여 볼륨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저고리는 너무 짧아 겨드랑이 밑 살결은 살짝 보이도록 했다

관상학에서 볼 때 이 미인도의 첫 번째 특징은 입술이다. 실제보다도 아주 작게 그리고 입술 색은 아주 붉게 표현한 것이다. 동양 관상에서 입은 생식기와 동일시하여 입이 너무 크면 천하게 본다. 입이 큰 여자는 오히려 남자를 먹여 살린다고 한다. 따라서 이 당시의 미인은 입이 작아야 한다.

두 번째 특징은 눈에 쌍꺼풀이 없다는 것이다. 눈이 크고 쌍꺼풀이 있는 관상은 지조가 없다고 보았다. 눈이 크면 유혹에 약해 헤프게 보았다.

세 번째 특징은 가는 허리에 큰 엉덩이이다. 이것은 현대 미인의 조건과 마찬가지다. 건강미와 선정미를 동시에 나타내기 때문이다. 네 번째 특징은 손과 손가락이다. 손은 통통해야 남편복이 있고, 손가락은 가늘어야 섬세하고 여성다워 예로부터 귀한 상으로 여겼다. 다섯 번째로 가슴은 작아 보이도록 조아 매었다. 가슴이 너무 크면 무지해 보여 꺼렸다.

미인도의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면, 한복이 그러하듯이 다른 부분은 다 가렸는데,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겨드랑이 부분을 살짝 드러내어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만 하면 내가 거기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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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it be An evening star

Shines down Upon you

May it be When darkness falls

Your heart Will be true

You walk a lonely road

Oh how far you are from home

그대 앞길을 환히 밝히는

빛나는 저녁별이 되게 하소서

암흑이 드리워질때

그대 가슴에 진실이 녹아들게 하소서

외롭고도 외로운 길을 걸어서

그대 고향을 떠나 얼마나 먼길을 왔던가

Morrinie utulie(darkness has come)

Believe and you will find your way

Morrinie utulie(darkness has come)

A promise lives within you now

암흑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길을 얻을 것이오

암흑이 드리워져도

그 약속은 그대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리니

May it be The shadow's call

Will fly away

May it be You journey on

To light the day

When the night is overcome

You may rise To find the sun

어둠 속 망령들의 외침을

떨쳐버리게 하소서

낮같이 불밝히는 그런

여정이 되게 하소서

암흑이 압도할지라도

그대 태양을 찾아서

일어서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