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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1)-동부도

by 황교장 2007. 11. 8.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1)-동부도


겨울방학 직원연수를 지리산 일원으로 생각하고 가을의 정취도 맛보고자 사전 답사를 겸해 떠났다.

 

이정표는 부산-남해고속도로-하동IC-피아골 연곡사-칠불사-쌍계사-화엄사-지리산 온천(1박)-남원 운봉 황산대첩비와 동편제 발상지-실상사로 정하고 떠났다. 제일 먼저 피아골 연곡사로 정한 이유는 지금 단풍이 한창이라 이른 아침에 가지 않으면 사람들에 치여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연곡사는 화개 장터를 조금 지나면 입구가 나오는데 이 입구에서 산 쪽으로 약 8.5㎞를 더 들어가야 연곡사에 닿는다. 연곡사 가는 길은 정취가 있다. 길 양편의 가로수가 모두 단풍나무다. 단풍나무는 햇빛을 받아야만 제 색깔이 나타난다. 오늘처럼 맑은 아침햇살에 비친 단풍잎은 정말 아름답다. 예년의 이맘 때면 단풍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있어야 할 11월 초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운 해여서 이 길가의 단풍은 11월 중순이나 되어야 절정이 될 것 같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단식 논밭을 만난다. 산비탈을 따라 층층이 쌓아 만든 논두렁의 다랑논은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랑논의 대명사는 남해 가천마을이지만 이곳의 다랑논과 논두렁의 운치도 가천마을보다 뒤지지 않다는 느낌이다.

 

 피아골 단풍


단풍과 논두렁을 감상하다보면 어느새 연곡사(鷰谷寺)에 다다른다. 연곡사가 있는 이곳 전체를 피아골이라고 하는데,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에 자리 잡은 계곡 전체를 말한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피아골로 하산하다 보면 가을에는 단풍, 한여름은 녹음과 청청한 계류, 봄에는 각종의 야생화들이 가득 찬 아름다운 계곡이다. 또한 전남, 경남, 전북의 삼도가 만나는 삼도봉에서 전남과 경남의 경계를 넘나드는 불무장등(1,446m) 능선을 따라 내려서는 원시림 산길도 피아골이 주는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피아골에는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우선 피아골이란 이름부터 심상치가 않다. 나는 이 나이에도 피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이 으스스하다. 이름은 미래를 예측하는 하나의 어휘일 수도 있다. 피아골의 어원은 오곡 중 하나인 피가 많이 난다고 해서 피밭골에서 피아골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뒷밭침할 수 있는 것이 직전리(稷田里)라는 피아골 입구 마을의 지명이다. 직(稷)은 피(기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피아골 단풍은 직전단풍이라 하여 지리 10경 중의 하나이다.

가을이면 피아골은 산도 붉고, 산에 비친 물도 붉고, 그 물에 비친 사람의 얼굴도 붉다고 하여 삼홍(三紅)이라고도 불린다.

 

 연곡사 전경


피아골 입구에 연곡사가 있다. 연곡사는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화엄사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하는 설, 백제 성왕 무렵이라는 설과 통일신라 경덕왕 때라는 설이 있다.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연못을 메워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 때문에 제비 연(燕)자가 들어간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로 보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절로 추정된다.

 

연곡사의 역사는 피 튀기는 피의 역사다. 연곡사의 스님들은 임진왜란 때 700명의 승병을 일으켜 섬진강변의 천연 요새인 석주관(石柱關)에 나가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석주관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산등성을 따라 축성한 성으로 축조 당시 성문이 거대한 돌기둥으로 되어 있어 석주관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는 또 다시 150여 명의 승병을 일으켜 일반 의병 3500명과 합세해 석주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의병들과 함께 모두 순국했다.

 

이처럼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절이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인조 때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대사가 복구했다. 소요대사가 바로 서부도의 주인이다. 그 이후 연곡사가 역사 속에 다시 나타난 것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이다. 대유스님과 승려 출신 술사인 송하가 쌍계사와 연곡사를 거점으로 명화적들과 연합하여 이 반란에 가담했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하자 그들은 지리산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1745년 영조 21년에 연곡사는 율목봉산지소로 지정되었다. 왕가의 신주목을 봉납하는 곳으로 지정되어 연곡사 주지가 밤나무 단지를 경영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지방향리들의 경제적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연곡사의 밤나무가 너무 남벌되어 율목봉산지소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에 책임이 돌아올까 두려워 스님들이 절을 버리고 도망가게 된다. 그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주목(神主木)이란 제사상 위에 조상의 신체로 여기는 신주를 모시는데 쓰는, 신주를 만드는 나무다. 신주는 왕실이나 명문가에서 볼 수 있고, 일반 가정에서는 지방을 사용한다. 신주의 높이는 약 20cm 정도이며 닭소리나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의 밤나무로 만든다. 신주나무는 옹이(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가 없고 결이 좋은 것으로 써야 한다. 조선왕실의 신주목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된 밤나무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자라는 밤나무는 그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연곡사가 또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을사조약으로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날 때 고광순이 1907년 연곡사에 본영을 설치하고 항일투쟁을 벌이면서이다. 고광순은 봉기와 동시에 화개장터로 내려가 일본군 10여 명을 죽이고 연일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의병의 소재를 찾으러 들어온 일본군 10여 명을 또 죽이는 전공을 거둔다. 그러나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이 오직 의지와 신념으로만 싸워온 고광순의병대는 총을 가진 일본군의 야간 기습에 피아골 계곡에서 전멸하고 연곡사는 일본군의 방화로 잿더미가 된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고경명선생의 11대 후손으로, 지금 연곡사 소요대사 부도 아래쪽 수백 년은 됨 직한 동백나무 아래 그의 순절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어 연곡사는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다. 따라서 빨치산을 토벌하려는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었기에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이때 죽은 이들의 넋이 나무에 스며들어 가을철 피아골 단풍은 유난스럽게 붉다고 한다. 그러나 이젠 구천을 떠돌아다니던 혼령들이 연곡사 지장보살의 천도로 원한이 사라져 극락왕생했는지 지리산 자락의 다른 곳보다 단풍이 오히려 붉지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는 선(禪)을 닦는 절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선과 관련된 부도국보가 2개나 있다. 이외에도 보물 4점이 있다.

국보로는 동부도(국보53호)와 북부도(국보54호)가 있고,

보물로는 연곡사삼층석탑(보물151호), 현각선사탑비(보물152호), 동부도비(보물153호), 서부도(보물164호)가 있다.

 

연곡사 대적광전

 


대적광전 뒤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인 동부도가 있다. 동부도는 쌍봉사의 철감선사의 부도인 철감선사탑(국보 57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부도 문화의 쌍벽을 이룬다. 그런데 내 눈에는 동부도가 한수 위인 것 같다.

근 십여 년 만에 동부도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십여 년 전 점심 반주로 먹은 동동주가 너무 독해 연곡사에 오니 취기가 한창 올라왔다. 그때 답사객들을 상대로 너무 많이 아는 체를 했다. 지금 동부도를 바라보니 그때의 생각이 불현듯이 떠오른다. 부끄러웠다. 한번 더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 동부도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을 들어보자.

 

 연곡사동부도


“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면, 부도는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이다. 부도의 구성은 석탑과 같아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이 부도는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부도 외에도 서부도(보물 제154호), 북부도(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부도는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 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보주 부분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탑신에 새겨진 황제가 타는 수레인 보여


설명이 좀 복잡하지만 이해가 된다.

  문화재청 설명에서 빠진것은 탑신에 자물쇠모양의 문비형(門扉形)과 천자의 수레인 보여(寶輿)가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곳에서 스님의 안내를 받는 십여 명의 답사팀을 만났다. 이들 답사객 중에는 절복을 입은 노랑머리의 아름다운 외국인 여인 두 명이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안내하는 스님의 설명 중에 동부도에 쓰인 석재의 재질로 보아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내가 봐도 그렇다. 북부도와는 석질이 다르다. 같은 화강암이지만 동부도의 석질이 더욱더 단단하게 보인다. 신라 석공이 존경받는 이유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은 단단한 화강암을 나무에 조각하듯이 우아하면서도 정교하게 다듬었다는 점이라는 것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리스 로마 문화는 석질이 무른 대리석에다 조각을 한 것이지만 신라의 석탑은 화강암을 조각한 데에서 그 차이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 우리나라 부도에 대한 평을 보면 재미난 부분이 있다.

 

쌍봉사 철감국사 부도는 큰 영광을 얻은 분의 모든 것 같고,

실상사 증각국사 부도는 듬직한 큰아들 같고,

태안사 적인선사 부도는 정숙한 며느리 같고,

보림사 보조선사 부도는 능력 있는 사윗감 같은데

연곡사 동부도는 귀엽게 자란 막내딸 같다.

쌍봉사 철감국사 부도는 비단마고자를 입은 중년 남자 같고

실상사 증각국사 부도는 양복에 코트까지 입은 젊은 남자 같고

태안사 적인선사 부도는 검정색 투피스로 정장한 중년 여인 같고

보림사 보조선사 부도는 멋쟁이 콤비를 입은 총각 같고

연곡사 동부도는 미니스커트 아니면 청바지에 빨간 하이힐을 신은 것 같다.

이처럼 연곡사의 동부도는 귀엽게 자란 막내딸이 예쁜 미니스커트나 청바지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앙증맞게 앉아 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연곡사동부도비

 

동부도 옆에는 보물 제153호인 연곡사동부도비가 있다. 이 비석은 비문을 새긴 비석의 비신은 없고,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인 귀부와 뿔 없는 용 모양을 새긴 형상인 이수 부분만 있다. 따라서 이 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부도비의 조각에서 독특한 것은 거북등에 표현된 날개이다. 귀갑문을 얕게 조각한 거북등 위에 전체를 덮을 정도로 양쪽에 날개가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드문 장식이다. 거북에서 신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 전진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귀부와 이수는 색깔이 달라 제 짝인가 싶지만 돌의 재질이 달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화재와 풍화로 색이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곡사동부도비의 건립연대는 동부도와 비슷한 시기인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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