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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지리산 칠불사와 아자방

by 황교장 2007. 11. 12.

 

지리산 칠불사와 아자방


연곡사를 나와 하동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가수 조영남이 불러 히트한 화개장터가 나온다. 화개장터부터 쌍계사까지는 십리 벚꽃으로 유명한 벚꽃길이다. 길가의 가로수인 벚나무 단풍이 아름답다.

 

칠불사는 쌍계사 입구를 지나 8km쯤 더 올라가야한다. 칠불사를 오르는 길가엔 가을단풍이 절정이다. 피아골 단풍보다 더욱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길가의 다랑이논 또한 볼거리다.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오르다보면 엉덩이로 깔고 앉으면 뭉개져서 없어질 정도 작은 궁둥이배미논, 우산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우산배미논 등 작은 다랑이논들을 다 보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좁은 산비탈의 이런 땅조차도 버리지 않고 이렇게까지 잘 일구어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단풍과 층층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다랑이논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다.

 

칠불사 은행나무

 

다랑논들을 지나고 나면 칠불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칠불사의 위용이 나타난다. 잘 지어진 무협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의 절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물이 잘든 은행나무이다. 요즈음 노래방에 가면 맨 처음 부르는 노래가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이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라는 노랫말이 저절로 내 입에서 나오고 있다. 이 아름다운 가을단풍이 며칠만 더 지나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 저 밑이 저미어 온다.

 

은행나무 단풍이 아름다운 칠불사는 한 풍수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풍수사들에게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 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음택으로는 오대산 적멸보궁이 으뜸이고, 양택으로는 지리산 칠불암이 제일이다.’

그런데 내 느낌에는 산세에 비해 절을 너무 크게 지었다. 암자로서의 기능은 몰라도 절로서는 너무 자연 훼손을 많이 한 것이다.

 

또한 칠불암 풍수에 대해 전해져 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도선국사가 저술한 「옥룡자결」에 의하면 

"하동 땅에서 북쪽으로 1백리 가면 와우형(臥牛形)의 명지가 있는데 이곳에 집을 지으면 부(富)는 중국의 석숭 못지않고, 백자천손이 번창할 것이며, 기도처로 삼으면 무수인(無數人)이 득도할 것" 이란 내용이 있다. 와우형, 즉 소가 누워 있는 명당이 칠불암이라고 주장한다. 

 

칠불사 전경 

 

칠불사의 풍수는, 지리산 반야봉(해발 1,732m)을 종산으로 삼고, 토끼봉을 주산으로 삼아 그 혈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이곳 칠불사에 이르러 혈이 맺혀 있다. 동국제일선원이라고 적힌 현판 밑 입구에는 눈에 뛰는 전시물 세 점이 있다. 하나는 반석이라고 하는 불교 경전을 붙여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자방(亞字房)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건너편 산에서 찍은 칠불사 전경이다.

 

동국제일선원 현판

 

이 사진에서 보면 반야봉을 종산으로 하고, 토끼봉이 주산이 되어 칠불사에 이르러 혈이 맺혀 있는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마침 그때 창원에서 왔다는 답사객이 ‘아 진짜 명당이다’라고 제법 큰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길래

내가 ‘왜 명당인가?’ 하고 질문을 하니 ‘보면 모르느냐’라고 한다. 

다시 ‘주산은 어느 산이며 종산은 어느 산으로 볼 것인가?’ 하고 물으니

‘그런 용어는 몰라도 느낌이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책을 본 적이 있는가를 물어보니 풍수책은 보지 않아도 자기가 읽은 책들 속에는 풍수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 어느 정도 기본적인 풍수는 안다고 한다.

이처럼 풍수에 관한 책을 단 한 권도 읽어 보지 못한 사람이 봐도 칠불사가 있는 곳은 명당인 것이다.

 

칠불사 대웅전 

 

 칠불사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삼국유사 가락국기』와『동국여지승람 하동지』등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태어났다.

수로왕은 인도 갠지스강 상류지방에 기원전 5세기부터 있었던 태양왕조 아유다국(Ayodhya)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자식은 10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巨登)은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차남 석(錫)왕자와 삼남 명(明)왕자는 어머니 허황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왕자는 출가하여 허황후의 오빠인 인도스님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을 짓고 정진하였다. 그 결과 2년 후인 수로왕 62년(서기 103년) 일곱 왕자 모두 성불하였다.

 

수로왕은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칠불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최초로 전해졌다고 알려진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 보다 약 270여 년 앞선 기록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데 반해 가야는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수용했음을 칠불사 창건 설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창건 설화를 지닌 칠불사는 종래의 북방 불교 전래설과는 또 다른 남방불교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인도의 야요디아시에서는 김해에 있는 수로왕릉의 물고기 무늬를 아직도 그 지방의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칠불사 아자방 


또한 칠불사가 유명한 것은 아자방(亞字房)이다.

신라 효공왕(897-911) 때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을 아자(亞字) 모양으로 구들을 놓았다.

이 아자방에 삼 일 동안 불을 때면 100일 가량 따뜻했다고 한다.

아자방은 이중 온돌구조로 되어 있는데 방안 네 모퉁이와 앞뒤 가장자리 쪽의 높은 곳은 좌선처(坐禪處)이며, 십자형(十字形)으로 된 낮은 곳은 좌선하다가 다리도 아프고 힘이 들면 걷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는 경행처(輕行處)다.  

아자방은 중국 당나라에까지 널리 알려 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성인 초의선사가 1828년 이곳에서  다신전을 초록하고 동다송의 기초를 정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방 구조의 탁월한 과학성으로 인해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 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칠불사는 통일신라 이후부터 동국제일선원이라 하여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2대 참선도량으로 불려왔다.

 

대웅전과 부속 건물들


이러한 칠불사는 1800년 실화로 전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구되었다. 이 또한 1951년 지리산 공비토벌 때 우리 국군의 방화로 아자방을 비롯해 절 모두가 불타 버렸다.

너무나도 슬픈 역사다. 이때 불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은 1982년이다. 일명 구들박사로 통하는 김용달씨가 지금과 같이 새로 구들을 놓았다.

온기의 보존기간은 설화와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한 번 불을 때면 일주일 정도는 간다고 한다.

 

칠불사는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수보살에 대해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내용은 이러하다.

 

새로 하동고을로 부임한 사또가 쌍계사를 방문했다. 쌍계사의 말사가 칠불암인지라, 신관 사또는 유명한 칠불암 아자방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동안거 중이라 외인의 출입을 금했다. 하지만 사또는 권력으로 칠불암에 가서 선방문을 열도록 하였다.

사또는 스님들이 용맹 정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자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막상 아자방의 풍경을 본 사또는 실망했다.

계절적으로 늦봄인데다 마침 점심 공양을 마친 직후여서 스님들 모두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천장을 쳐다보고, 일부는 고개를 숙이고, 일부는 좌우로 몸을 흔들며, 일부는 방귀를 뀌면서 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사또는 스님들을 혼내 줄 심산으로 다음과 같이 요구 조건의 통문을 보냈다.

 

‘쌍계사에서 목마를 가지고 동헌이 있는 하동까지 와서 동헌 마당을 한 바퀴 돌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준다'

 

통문을 받은 쌍계사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묘안이 있을 리 없었다. 그 때 한 사미승이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며 다른 스님들에게 목마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정해진 날짜가 되어 스님들이 만들어 준 목마를 둘러메고 하동 관아로 들어간 사미승은 자신이 그것을 타고 동헌을 돌아보겠다고 사또에게 말했다.

사또는 사미승의 당당한 태도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 표정이 너무나 진지하기에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칠불암에 도인이 많다더니 내가 직접 보니 참선한다는 중들이 모두 졸기만 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미승은 답하기를 "수도승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요"라며 담담하게 말을 했다.

그러자 사또는 두 번째 질문을 한다.

그럼 도대체 "천장을 쳐다보며 졸고 있는 것이 무슨 공부란 말이냐?"하고 힐책하듯 질문을 했다.

사미승 왈 “그런 행동은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 즉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을 관찰하는 공부로 상통천문(上通天文) 하여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수행이라”고 하였다.

사미승의 설명에 말문이 막힌 사또는 다시 세 번째 질문을 한다.

"그럼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졸고 있는 자들은 어떤 수행을 하는 것이냐"하고 묻자,

사미승은 답하기를 "그런 행동은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을 수행하는 것으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사또가 질문을 하기를

 "그렇다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은 무엇이며 방귀는 무엇이란 말이냐?"라고 다그치듯 묻자

사미승이 답하기를,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은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라 하는 수행법인데, 이는 있음과 없음에 집착해도 안 되며 전후좌우 어느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달관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고, 방귀를 뀌는 것은 타파칠통관 (打破漆桶觀)이라고 하는 것으로 사또같이 우매한 관리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사미승은 보란 듯이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한 바퀴 빙 돌더니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사미승은 다름 아닌 문수동자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썩은 관리들이 문제다.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 타파칠통관 (打破漆桶觀)


누가 지어 만들었는지 몰라도 정말 잘 지은 내용이다.

조선조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스님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스님들의 한을 문수보살이 풀어 준 것일 게다.

 

그런데 요즘 새로 잘 지은 절들을 보면 뭔가 기분이 찝찝하다. 돈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 타파칠통관의 방귀냄새가 일부 잘못된 스님들의 방귀냄새로 여겨진다. 시주를 많이 해야만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혹세무민해서 긁어 모은 방귀 같은 돈 냄새가 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마지막으로 칠불암 벽에 붙어 있던 잡보장경 중 '반석'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반석(盤石)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기 어려움을 참는 것이 진실한 참음이고,

누구나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일상의 참음이다.

자기보다 약한 이의 허물을 용서하고,

부귀영화 속에서 겸손하고 절제하라.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것이 수행의 덕이니,

원망을 원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성내는 사람을 대하여도 마음을 고요희 하여,

남들이 모두 악행한다고 가담하지 말라.

강한 자 앞에서 참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고,

자기와 같은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싸우기 싫어서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이 진정한 참음이다.

욕설과 헐뜯음을 못 참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욕설과 비방을 잘 참음은 지혜로움이니,

욕설이나 칭찬으로 지혜로운 이를 어찌하지 못함은

큰 바위에 폭우가 쏟아져도 부서지지 않음과 같아

비방과 칭찬 괴로움과 즐거움을 만나도

지혜로운 어진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이 그러해서 욕을 먹으면

그것이 사실이니 성낼 것 없고

사실이 아닌데도 욕을 먹으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 되는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때나

화를 내지 않는다.

<잡보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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