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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쌍계사(1)- 진감선사대공탑비와 범패

by 황교장 2007. 11. 16.
 

쌍계사(1)- 진감선사대공탑비와 범패


쌍계사를 지나쳐 칠불사를 먼저 답사를 하고 역(逆)으로 내려와 쌍계사에 도착했다. 휴일이라 답사객들이 많이 붐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쌍계사는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온 곳이다. 그런데도 매번 올 때마다 새롭다. 주차료를 내지 않는 주차공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불법주차로 벌금을 내거나 차가 훼손되면 몇 천 원 아끼려다가 더 큰 것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차장에 주차료가 있는 답사처는 매번 갈등을 느끼게 한다. 많아야 몇 천 원인데도 아깝다. 술값 몇 천 원은 안 아까운데 말이다.

쌍계사 주변에는 음식점과 토산품을 파는 가게가 지리산 일대에서는 가장 많다. 그만큼 이곳은 관광객이 많다는 증거이다. 다리를 건너자 길가에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노점상에서 은행을 구워서 팔고 있었다. 한 봉지를 사들고 먹었는데 아직 덜 굽혀진 것도 있고 해서 그런지 영 고소한 맛이 나질 않았다. 내 어린 시절 먹던 은행 맛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중국산 은행이라고 귀띔을 해준다. 요즘 입는 옷가지도 국산 옷 입기가 힘이 들고 음식도 국산 음식 먹기가 힘이 드는 세상이 되었다. 단군 이래로 가장 잘 사는 시절을 살아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복이고 한편으로는 불행인 것이다. 내 땅에서 자란 것을 먹어야 될 터인데 기후와 풍토가 다른 남의 땅에서 자란 것을 먹고 살아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쌍계사 길은 언제 와도 아름답다. 주변의 나무들은 단풍이 절정이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올라가면 큰 바위 두 개가 양쪽으로 버티고 있다. 하나는 쌍계(雙磎), 건너편 바위는 석문(石文)이라고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대단한 필력이시다. 조금 더 올라가면 ‘三神山 雙磎寺’라는 현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이 나온다.

 쌍계사 일주문

 

현액의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다.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곳을 유람하면서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삼신산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뜻한다. 중국의 전설에서는 삼신산을 발해만(渤海灣)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3산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삼신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하여, 시황제(始皇帝)와 한(漢) 무제(武帝)가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쌍계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3년(723)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한 절이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의 칡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설리갈화처, 雪裏葛花處)”는 꿈을 꾸었다. 귀국 후 눈 위에 꽃이 피는 땅을 두루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지리산에 이르렀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 자리에 도착하였다. 그곳이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옥천사라는 절을 세웠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에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온 진감(眞鑑)선사가 중창했다. 진감선사는 선(禪)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대사가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다.

  

쌍계사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있고 다시 천왕문이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팔영루가 있고 팔영루를 돌아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이 나온다.

 

 쌍계사 대웅전과 진감선사대공탑비

 

대웅전 앞에 쌍계사가 자랑하는 국보 47호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가 있다.

쌍계사는 지리산 자락에서 화엄사, 실상사 다음으로 국보와 보물이 많은 절이다. 국보 1점과 보물 5점이 쌍계사에 있다.

보물로는 쌍계사부도(보물 380호), 쌍계사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팔상전영산회상도(보물 925호), 쌍계사대웅전삼세불탱(보물 1365호), 쌍계사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1378호) 등이다.

여기서 국보 47호인 진감국사 대공탑비에 대해 문화재청의 설명을 들어보자.

 

 진감선사대공탑비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 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 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 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다.

부연 설명을 하면 이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선생의 사산비명(四山碑銘)가운데 하나이다.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최치원 선생이 4군데의 산(山)에 세운 비석에 새긴 글을 말함인데 이는 선생이 찬술한 비문을 통칭한다.

네 비명은 지리산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만수산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대숭복사비, 회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를 말한다.

진감선사대공탑비의 비문에는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이유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 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 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또한 비문에는 진감선사의 시호를 내린 분이 헌강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이 부분의 문장을 보면 당시에는 전서로 탑비를 새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왕명이 있어야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머릿돌에 새겨진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전서


여기서 잠시 당시의 신라 역사를 더듬어 보자. 장보고를 죽인 왕이 46대 문성왕(839-857)이다. 문성왕의 태자가 먼저 죽어서 왕위는 47대 헌안왕(857-861)에게 돌아갔다. 헌안왕은 문성왕의 아버지인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다.  따라서 헌안왕은 문성왕의 숙부이다. 헌안왕도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서 48대 왕위는 사위인 경문왕(861-875)에게 돌아갔다. 경문왕은  43대 희강왕(836-838)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 경문왕이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이다. 경문왕의 아들이 49대 헌강왕(875-886)이다. 헌강왕은  태평성대의 시절에 풍류를 즐긴 왕이다. 향가인 ‘처용가’에서 처용의 아내를 역병귀신이 취한것이 아니라 헌강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진감국사 대공탑비의 비문에 있는 내용 일부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或有以胡香 爲贈者則 以瓦載煻灰 不爲丸而焫之曰 吾不識是何臭 虔心而己 復有以漢茗爲供者則 以薪爨石釜 不爲屑而煮之曰 吾不識是何味 濡腹而己)

“혹유이호향 위증자즉 이와재당회 불위환이설지왈 오불식시하취 건심이기 복유이한명위공자즉 이신찬석부 불위설이자지왈 오불식시하미 유복이기”

焫(불사를 설), 虔(정성, 공경할 건), 爨(불땔 찬), 屑(가루설), 煮(삶을자), 濡(젖을유)

(어쩌다 호향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곧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만들지 않고 태우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지 못하겠다. 다만 마음을 정성스럽게 할 뿐이다. 고 하였다. 또한 한다(漢茶, 중국차)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


당시에 호향과 한다는 고급품이다. 호향과 한다를 선물로 받아도 별로 반가와 하지 않고 일반 향이나 보통의 차와 같이 취급한 것이다. 요즘 명품을 뇌물로 한다고 야단이다. 한다와 호향이 당시의 명품인 셈이다. 선사는 오직 마음의 정성을 다할 뿐이지 명품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비문에는 선사가 범패를 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평소에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을 환희하게 하였다.”

 

선사는 우리나라 범패의 시조로 알려졌다. 범패는 절에서 재(齋)를 지낼 때 부르는 노래이다. 범음(梵音), 인도(印度) 소리,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한국 전통 3대 성악곡 중 하나이다. 현재는 전하는 불교음악을 총칭해 범패라고 하는데, 반드시 범패승들만이 부르는 전문적인 음악이다.

범패의 기원에 대해서는 영산회상 기원설,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음악공양설, 중국 조식(曺植)창작설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감선사(眞鑑禪師)가 당나라에 가서 중국의 범패를 배운 뒤 귀국해 수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의해 사찰령이 반포되고 1912년 각본말사법(各本末寺法)이 제정되어 범패와 작법(作法) 등이 금지되었다. 지금은 일부 몇 분의 스님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범패가 절에서 재를 지낼 때 부르는 노래인만큼 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알아보자.

재는 목적에 따라서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상주권공재(常住權供齋) : 가장 많이 행해지는 재로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해 드린다. 보통 하루가 걸리는데 규모가 가장 작은 재이다. 무속(巫俗)의 지노귀굿에 해당한다.

둘째, 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 : 상주권공재보다 규모가 큰 재이다. 재수를 위해 저승에 있다는 10명의 대왕에게 행운을 비는 재로 무속의 재수굿에 해당한다.

셋째,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 죽어서 극락세계에 갈 수 있도록 생전에 올리는 재이다. 무속의 생오구굿에 해당한다.

넷째, 수륙재(水陸齋) :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나 수중고혼을 위한 재이다. 강이나 바다에 배를 띄워놓고 재를 올리며 방생(放生)을 하기도 한다. 무속의 용왕굿에 해당한다.

다섯째, 영산재(靈山齋) : 가장 규모가 큰 재로서 3일 동안 진행된다. 국가의 안녕과 군인들의 무운장구와 죽은 자를 위해 올린다.


그럼 범패에 대하여 알아보자.

범패는 음악 양식에 따라 안채비소리, 겉채비소리인 홋소리, 짓소리가 있고 축원하는 화청(和請)을 포함해 4종류로 나눌 수 있다.

안채비소리는 흔히 염불이라고도 하며, 겉채비란 범패를 전문으로 하는 승으로 보통 다른 절에 초청을 받고 가서 소리를 한다. 범패는 주로 겉채비들의 노래이다.


첫째, 안채비소리 : 사설이 주로 한문으로 된 산문이며 내용은 재주(齋主)를 축원하는 것이다. 놋쇠로 만든 방울종인 요령을 흔들며 낭송한다.

둘째, 홋소리 : 재에서 사용되는 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비교적 간단한 노래이다. 사설은 7언4구 또는 5언4구이다.

셋째, 짓소리 : 홋소리를 모두 익힌 범패승이 배우는 것으로 사설은 대부분 한문으로 된 산문 또는 산스크리트이다. 연주시간은 30-40분 이상 걸리는 긴 음악이다. 짓소리는 반드시 합창으로 부르게 되어 있고, 리더격인 장부(丈夫)가 입모양을 과장하거나 손가락으로 지휘한다.

넷째, 화청 : 포교의 한 방편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민속적 음악에 우리말 사설을 얹어 부르는 음악이다. 재의 끝과 중요단락의 끝에서 태징을 두드리면서 엇모리장단에 맞춰 부른다.

 이상으로 범패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은 마치고자한다.


몇 달 전에 TV에서 대둔사 스님들이 행하는 범패를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아직 수준 미달이라서 그런지 이해가 잘 안되고 지겨웠다. 다음에 이러한 행사가 있으면 직접 관람을 한 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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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RY FOR ME ARGENTINA 

It won't be easy, you'll think it strange

When I try to explain how I feel

But I still need your love after all that I've done

You won't believe me

All you will see is a girl you once knew

Although she's dressed up to the nines

At sixes and sevens with you

I had to let it happen, I had to change

Couldn't stay all my life down at heel

Looking out of the window, staying out of the sun

So I chose freedom

Running around, trying everything new

But nothing impressed me at all

I never expected it to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And as for fortune, and as for fame

I never invited them in

Though it seems to the world they were all I desired

They are illusions

They are not the solutions they promised to be

The answer was here all the time

I love you and hope you love me

Don't cry for me Argentina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Have I said too much?

There's nothing more I can think of to say to you.

But all you have to do is look at me to know

That every word is true

 

It won't be easy, you'll think it strange

여러분들에게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그렇게 쉽지 않아요

When I try to explain how I feel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That I still need your love after all that I've done

이 모든 것을 이룬 이후에도 여전히 당신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죠

(주:페론이 대통령이 된 직후 부르는 노래이므로, 대통령 선거의 성공이 있었지만 여전히 당신들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You won't believe me

당신들은 날 믿지 않을 거예요(믿기 힘들 거예요)

All you will see is a girl you once knew

당신 앞에 서있는 이 소녀가 당신이 알던 그 아이라는 것을

Although she dressed up to the nines

비록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있기는 하지만

At sixes and sevens with you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서있는 것이랍니다.

I had to let it happen; I had to change

난 이렇게 해야만 했어요; 난 변화를 가져와야 했어요

Couldn't stay all my life down at heel

내 삶을 저 밑바닥 인생으로 팽개쳐둘 수 없었어요

Looking out of the window, staying out of the sun

저 태양 빛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창 밖만 바라볼 수 없었어요

So I chose freedom

그래서 난 자유를 선택했어요

Running around trying everything new

이곳 저곳 뛰어다니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던 거죠

But nothing impressed me at all

하지만 아무 것도 내게 감동을 줄 수는 없었어요

I never expected to

물론 나도 무언가가 스스로 내게 그래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진실로 난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All though my wild day

지금까지 이 힘든 나날 속에서도

My mad existence

이 미칠 것 같은 삶 속에서도

I kept my promise

난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왔어요

Don't keep your distance

그러니 나에게서 멀리 떠나지 말아요

And as for fortune, and as for fame

재산이나 명예나

I never invited them in

난 그런 것들을 초대한 적이 없어요(욕심을 낸 적이 없어요)

Though it seemed to the world they were all desired

비록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열망할 지 모르지만

They are illusion

그것들은 환상에 불과하죠

They're not the solutions they promised to be

비록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랍니다.

The answer was here all the time

진정한 해답은 여기 이곳에 항상 있어요

I love you and hope you love me

난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날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이제 더 이상 울지 말아요

(에바가 흐느낀다; 군중들도 그녀의 노래에 따라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진실로 난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All though my wild day

지금까지 이 힘든 나날 속에서도

My mad existence

이 미칠 것 같은 삶 속에서도

I kept my promise

난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왔어요

Don't keep your distance

그러니 나에게서 멀리 떠나지 말아요

Have I said too much? There's nothing more I can think of to say to you

제가 말이 너무 많나요? 이제 당신들에게 할 말이 더 생각나지 않네요.

But all you have to do is look at me to know that every world is true

하지만 이제 절 지켜보면 이 모든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