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3) - 달마에서 혜능까지
범종루룰 지나 불일폭포 방향으로 가면 제법 가파른 계단이 나오고 그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한다.
은행나무
삼법화상이 눈 내린 겨울에도 칡꽃이 피어 있어 육조 혜능대사의 정골을 모셨다는 금당이 바로 이곳에 있다. 쌍계사에서는 가장 유서가 깊은 곳이다. 금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꽃무릇의 새 잎이 새파랗게 돋아 나와 있다. 10월 초에만 해도 화려하게 피었을 꽃무릇이다.
꽃무릇 잎
꽃무릇
꽃무릇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다년생초이다. 돌밭 모래땅을 좋아한다고 하여 석산(石蒜, 돌마늘)이라고도 불린다. 상사화처럼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하여 상사화라고 잘못 불리는 경우도 있다. 우선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 색갈이 다르다. 상사화는 붉노랑상사화, 진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제주도상사화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꽃 색깔과 꽃피는 시기가 약간씩 다르다. 그리고 상사화는 봄에 잎이 돋았다가 진 후 여름에 꽃이 핀다. 꽃무릇은 9월 중순께 꽃이 먼저 피었다가 시든 후 지금처럼 잎이 돋는다. 꽃무릇은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장성 백양사와 이곳 쌍계사가 유명하다. 꽃무릇이 절집에 많은 이유는 알뿌리에 독성이 많아서라고 한다. 탱화를 그릴때나 불경책을 만들어 묶을 때 풀에다가 독성이 강한 뿌리를 넣어서 만들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즉 천연방부제다.
꽃무릇이 난 언덕길을 오르면 팔상전을 만난다.
팔상전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8개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와 불상을 봉안한 전각이다. 법주사의 팔상전과 이곳 쌍계사의 팔상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팔상전이다.
팔상전 안에는 보물 제925호인 쌍계사팔상전영산회상도가 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팔상전영산회상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사천왕상, 여러 보살, 제자 등이 석가모니불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 숙종 7년(1681)에 그려진 이 불화는 비교적 큰 편이지만 짜임새 있는 구도를 보여주고 공간의 처리방법과 회화기법이 매우 뛰어나며 17세기 중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육조정상탑
팔상전 뒤에 금당이 있다. 금당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두 점 있다. 六祖頂相塔(육조정상탑)과 世界一花祖宗六葉(세계일화조종육엽)이다. 참 멋진 글씨다.
세계일화조종육엽
금당 안에 있는 정골탑은 육조 혜능대사의 정골을 모셨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지금도 육조 혜능선사는 중국의 조계산 남화선사에 등신불로 모셔져 있다.
금당
우리나라의 조계종이 바로 이곳의 조계산의 지명을 따서 조계종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초조 달마대사부터 육조 혜능대사까지 중국 선종의 계보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초조 달마(達磨)에서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 이다.
달마대사는 인도출신의 승려로 중국 선종의 개조(開祖)다. 달마는 석가의 법맥을 이은 28대 존자인 보리달마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달마대사가 선(禪)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선종이라 한다. 선종의 계보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선문답들이 많다. 초조 달마에서 6조 혜능까지 이어지는 선문답을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달마대사가 소림사(少林寺) 동굴에서 9년 동안 벽을 향해 좌선을 하고 있는데 한사나이가 한쪽 팔을 자르고 피를 흘리면서 달마대사에게 법을 구한다.
“제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님, 이 불안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달마 대사 왈
“너의 그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내가 편안케 해주겠다.”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됐다. 이제 마음이 편안하냐?”
달마가 빙그레 웃었다. 그때서야 사내는 달마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넙죽 절을 했다.
달마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혜가(慧可), 즉 지혜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뜻의 이름을 주고 2조가 되었다.
2조 혜가스님이 방안에 있는데 웬 중풍환자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다.
“스님, 저의 죄를 씻어주십시오.”
그러자 혜가스님 왈
“너의 죄가 어디 있느냐. 그 죄를 가져와 보아라. 씻어주마.”
“찾을 수가 없어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없어졌나보군. 이젠 됐나?”
이 말에 중풍환자는 퍼뜩 깨우쳤다. 이 중풍환자가 3조인 승찬스님이다.
어린 사미승이 3조 승찬스님의 방으로 찾아와 겁도 없이 물었다.
“스님 부처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승찬 왈 “네 마음은 어떤 거냐?”
사미승 왈 “모르겠습니다.”
사미승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승찬 왈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더 남은 게냐?”
사미승 왈 “해탈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승찬 왈 “이놈아 누가 널 붙잡더냐?”
사미승 왈 “아뇨”
승찬 왈 ‘그러면 왜 해탈을 하려는 거냐?“
사미승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승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큰절을 하고 환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사미승은 누가 자신을 구속했는가 들여다보니 아무도 구속한 자도 없고 구속된 바도 없음을 깨달아 구속으로부터 해탈된다. 이 사미승이 바로 4조인 도신 스님이다.
4조 도신 스님이 황매현의 한 동네에서 관상이 범상치 않은 한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신은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서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네 성이 무엇이냐?”
“성이 있긴 한데,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귀한 성입니다.”
“그래 그 귀한 성이 무엇이냐?”
“불성(佛性)입니다.”
도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신은 다시 물었다. “성이 없다는 말이냐?”
아이는 답을 한다.
“성이란 원래 공(空)한 것이죠.”
아뿔사! 도신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신은 성씨를 물었는데 아이는 사물의 본성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신은 다시 질문을 한다.
“너는 그런 말을 누구에게 들었느냐?”
아이는 답한다.
“저절로 아는 것이 불성이죠”
도신은 기가 막혔다.
바로 이 아이가 5조 홍인대사다.
이때 대사의 나이는 7살이었다고 한다.
4조 도신스님의 법은 5조 홍인 스님에게로 전해졌고 홍인스님의 법은 다시 6조 혜능스님에게로 전해진다.
이곳 금당에 육조 혜능의 머리를 모셨다는 육조정상탑은 좀 특이한 형태다. 금당건물 안에 탑이 들어 있다. 그럼 육조 혜능스님은 어떤 분인가?
혜능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나무를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땔나무꾼이다. 따라서 글자를 모른다. 어느 날 나무를 사러온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그 손님께 지금 읽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손님 왈 "홍인대사께서 승려와 속인들에게 이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혜능은 홍인을 찾아 갔다. 홍인이 머물고 있던 조사당 앞에서 누군가 소란을 피우고 있어 홍인은 시중들고 있는 제자에게 물었다.
제자 왈 “웬 땔나무꾼이 찾아와 스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땔나무꾼을 데려오자 홍인이 대뜸 물었다.
“어디에 사는 누군고?”
"영남에서 온 땔나무꾼이온데 노가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나를 보자고 했는고?”
“부처가 되는 법을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이 말에 홍인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너는 영남사람인 남쪽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땔나무꾼 왈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재목감이 하나 굴러 들어온 것이다. 그렇지만 속단하기는 일렀다.
“이놈아 누가 너더러 말장난을 하라고 했더냐? 시건방 떨지 말고 가서 나무나 베어라.”
“지금 나무를 베고 있는데 또 무슨 나무를 베라고 하십니까?”
홍인은 기뻤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 놈을 후원 방앗간에 데려가 방아나 찧게 해라!”
그러자 땔나무꾼은 절을 넙죽하고 순순히 방앗간으로 향했다.
어느 날 홍인이 문하생들을 다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자 반야의 지혜를 써서 게송 한 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 오거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주어 육대 조사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물러나와 의논했다.
"신수화상은 우리들 중 대사형이다. 당연히 법을 신수화상이 받아 6조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이 났다. 따라서 굳이 나머지 사람들은 게송을 지어 큰 스님에게 바칠 필요가 없었다.
신수는 오조 홍인대사의 문하에서는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수는 심한 부담감을 느껴 번민을 하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야밤삼경에 몰래 조사당 담벼락에 게송을 적었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시시근불식, 막사유진애)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네
부지런히 갈고 닦아 먼지로 더렵혀지지 않게 하라."
오조 홍인이 아침에 그것을 보고 신수가 쓴 것임을 즉각 알아보고 신수에게 말했다.
"네가 지은 이 게송은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범부들이 이 게송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비록 타락하지는 않겠으나 진리는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너는 며칠 동안 더 생각하여 다시 한 게송을 지어 나에게 보여라."
신수는 돌아가 며칠을 지냈으나 게송을 짓지 못했다.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땔나무꾼이 그것을 들었다. 땔나무꾼은 한 번만 듣고도 단번에 이 게송이 큰 뜻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땔나무꾼은 본래 글을 쓰지 못하는지라 그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읊는 게송을 담벼락에 쓰게 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本來無一物, 何處有塵埃
(보리본무수, 명경역무대, 본래무일물, 하처유진애)
"보리는 나무가 아니요 거울 또한 틀이 없노니
불성은 항상 깨끗하니 어느곳에 먼지가 않으리오.”
그리고 또 하나의 게송을 읊었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오조 홍인대사는 이 게송을 보고 즉각 그가 큰 뜻을 알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그를 시기할까 두려워 밤에 몰래 그를 불러서 마지막 시험을 치른다.
“벼는 잘 익었느냐?”
땔나무꾼 왈 “벼는 익었습니다만, 아직 타작을 못했습니다.”
홍인은 웃음 띤 얼굴로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타작마당에 가지도 않고 어떻게 타작을 하겠는가, 타작에는 밤낮이 없는 법이지”하고 중얼거렸다.
홍인의 마지막 시험에 땔나무꾼이 통과를 한 것이다.
이어 홍인은 금강경을 펼쳐 그 핵심 내용들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땔나무꾼은 한 번 듣고 모두 깨우쳤다. 홍인의 강론이 끝났을 때는 어느덧 새벽이었다.
“네가 지혜에 능하니 지금부터 이름을 혜능(慧能)이라 하여라.”
홍인은 그에게 법명을 내렸다. 그리고 법과 옷을 전하면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홍인은 땔나무꾼을 6대 조사로 삼은 것이다.
혜능은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남쪽으로 떠났다.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그때 가사와 법을 빼앗으려고 그의 뒤를 추적하던 진혜명이란 승려에게 붙잡혔다. 하나 진혜명은 오히려 혜능의 설법에 감화되어 그의 명에 따라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
이후 혜능은 남쪽지방을 순례하면서 불법을 전파했고, 소주 동남쪽 삼십오 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물러 수행법의 혁신을 주장했다. 또한 신수는 형남 당양현 옥천사에 머물러 혜능과는 다른 자기의 사상을 전파했다. 혜능이 남쪽, 신수가 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들을 각기 남종과 북종이라고 불렀다.
혜능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혜능은 홍인의 법을 받고 15년 동안 저잣거리에 떠돌며 몸을 숨겼다. 하루는 광주 법성사 옆을 지나가는데 한 무리의 승려들이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저건 깃발이 펄럭이는 것일세”
“아닐세. 저건 바람이 깃발을 움직이는 것이니 바람이 펄럭이는 것일세”
무리는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들의 논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혜능이 나섯다.
“그건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이 펄럭인다고 생각하는가? 깃발도, 바람도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가?”
건장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혜능을 다그쳤다.
“펄럭이는 것은 바로 당신들의 마음이다.”
무리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오?”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이다.”
이 말에 무리들은 혜능을 법성사로 모시고 가서 머리를 깎아 주고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여승 무진장이 혜능에게 물었다.
"열반경을 여러 해 봤으나 아직 이해를 못하겠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혜능은 말했다.
"나는 글을 모른다. 그대가 경문을 소리 내어 읽으면 내가 혹시 그 가운데의 진리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자 무진장이 말하기를
"글도 모르면서 어찌 그 가운데의 진리를 안단 말이오?"
이에 혜능이 답하기를
"진리란 문자와 무관한 것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다. 반면에 문자란 달을 가리키는 그대와 내 손가락이나 다름없다. 손가락은 달의 위치를 가리킬 수 있어도 달 자체는 아니다. 달을 보는 데는 반드시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이 일화가 나타내는 것은 언어나 문자는 단지 진리로 향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문자가 곧 진리 자체는 아니다. 이것이 바로 선종의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의미다.
혜능이 강조한 불립문자의 뜻은 다음과 같다.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고 주장한다.
육조 혜능(638-713)은 선종의 법통을 단순히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는 중국 선종의 진정한 창립자로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서야 중국불교는 인도적인 것에서 벗어나 중국의 성격에 맞게 독자적인 영역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조인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은 더욱더 발전된 것을 주장한다. 즉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 자심즉불)”다.
여기서 7조인 회양과 8조인 마조와의 선문답은 알아보자.
어린 제자 마조가 좌선을 열심히 하자. 회양이 다가가서 넌지시 물었다.
“왜 매일같이 좌선을 하느냐?”
마조 왈 “부처가 되려고 그럽니다.”
회양이 갑자기 벽돌을 하나 들고 와서 제자 옆에 앉아 돌에다 갈기 시작했다. 벽돌을 가는 소리를 듣고 마조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지금 뭘 하십니까?”
회양 왈 “거울을 만드는 중이다.”
마조가 피식 웃으면서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때를 놓칠세라 회양이 일격을 가했다.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느냐?”
이 말에 마조가 깨우쳤다.
마조선사의 활동 무대는 홍주의 개원사였다. 이 지명을 따서 홍주종(洪州宗)이라 한다.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가 서당 지장이다. 이 지장의 제자가 우리나라에서 선종을 최초로 전파한 도의선사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인 강원도 양양에 있는 진전사지 부도(보물 제439호)가 도의선사부도라고 추증되고 있다.
도의선사는 중국으로 치면 10조와 동급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초조인 셈이다.
도의선사의 제자가 염거화상이고, 염거화상의 제자가 보조선사 체징이다. 보조선사 체징은 장흥 가지산 보림사를 창건하여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가지산파를 개창했다.
보조선사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달마가 중국의 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보조선사가 3조 이다.”
쌍계사 금당에 육조 혜능의 정골을 모셨다는 정골탑은 육조선사가 워낙 유명하시어 모시고 싶은 바람이 너무 커서 금당에 혜능선사의 정골을 모셨다고 잘못 알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금당 역시 명당이다. 이곳의 좌향은 남향이다. 쌍계사에서 가장 먼저 지은 절이 바로 금당인데 한 겨울에도 눈이 녹아 칡꽃이 필 정도로 따뜻한 곳이다. 금당에서 바라보는 앞산인 남주작은 잘 생겼다. 안산이 아주 특별하다. 문필봉으로도 손색이 없고 안대도 이중 안대다. 금당이 대단한 명당인 것이 느껴진다.
금당에서 바라본 안산
이젠 쌍계사의 중요한 부분은 거의 다 보았다. 다시 내려가서 박물관을 보고, 진감선사의 부도만 보면 중요 문화재는 다 보는 셈이다. 전에도 박물관에 몇 번 왔지만 늘 새로운 것을 한 수 배우고 간다.
박물관
금당에 걸어두었던 추사 현판의 진본이 여기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진열되어 있다. 어느 정도까지 믿어야 할지를 모를 일이다.
부처님 진신사리
박물관을 나와 진감선사의 부도를 보러 부도밭으로 갔는데 아무리 봐도 진감선사부도로 보이는 것이 없다. 옆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주인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모른다고 한다.
쌍계사 부도밭
아쉬움을 남기고 쌍계사를 나오는데 계곡을 건너는 아름다운 길이 숲속으로 나 있다. 저곳으로 가면 혹시나 진감선사부도가 나오는가 싶어 따라가 보니 다른 길로 이어져 마을이 나오는 것이다. 마침 그곳에는 주인이 없을 법한 감나무에 홍시가 많이도 달려 있다. 한 개를 따서 먹어 보니 어릴 적 먹던 바로 그 맛이다. 몇 개를 더 따서 가지고 왔다. 요즘 농촌에는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도 일손이 없어 그냥 놓아두는 곳이 많다고 한다. 특히 올해는 감은 풍작이라 값이 없다고 한다. 인건비는 비싸서 수지 타산이 맞지를 않아 주인이 직접 딸 수 없을 때는 그냥 두어 까치밥이 된다고 한다.
홍시
쌍계사를 나와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를 찾아 나섰다. 주차장에서 길을 물어 출발을 했다.
차의 유래는 신농씨로부터라고 한다. 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어느날 신농씨가 시냇가에서 물을 끓이는데 머리 위에 있는 나뭇잎이 끓는 물속에 떨어졌다. 조금 있으니 물에서 그윽한 향기가 났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신농씨가 물을 마셔보니 맛이 일품이다. 또한 몸도 상쾌하고 한결 가벼워졌다. 녹차 속에 몸을 상쾌하게 하는 성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농씨는 약초를 찾기 위해 온갖 풀을 다 먹어 보는데 독초를 먹어 중독되었을 경우에는 녹차 잎을 씹어 그 독을 해소했다고 한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차의 역사가 깊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 시배지는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차를 처음으로 심은 곳이 화개라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화개차에 대해 추사 김정희 선생은 "중국의 최고 차인 승설차(勝雪茶) 보다 낫다"고 하였고,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 오십 리에 뻗어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넓은 차밭은 없다" 라고 하였다.
또한 선사는 "신선 같은 풍모와 고결한 자태는 그 종자부터가 다르다"고 격찬했다.
그리고 다경에 이르기를 차나무는 바위틈에서 자란 것이 으뜸인데 화개동 차밭은 모두 골짜기와 바위틈이다’라는 구절도 있다.
다리를 건너 도심다원 이정표를 따라서 가는 길목의 풍광은 아름답고 운치가 있는 길이다. 이 도심다원에 수령 1천년이 넘는 야생 차나무가 있다. 지난해 야생차축제기간에 열린 경매에서 이 나무에서 채취된 찻잎 100g이 2천500만원에 판매됐다고 신문에서 보았다.
도심다원의 위치를 주차장 안내원에게 물었을 때 찻길이 열려 있는데 오르막이 심해서 사륜구동만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하기에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의 차밭까지 올라갔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차밭
가까스로 주차를 하고 천 년은 넘게 산 차나무를 찾아 보았으나 눈에 띄지를 않는다. 포기를 하고 다시 마을로 내려가는데 수녀님 몇 분과 마주쳤다. 수녀들에게 물어보니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도로 마을로 내려가서 물으니 시골할머니들의 답을 한결 같다.
“저리 가서 요리로 돌아서 조리로 가란다”
도무지 무슨 말인가를 알아듣지를 못해서 조금은 더 젊은 할머니에게 물었다. 역시 마찬가지다.
저리 요리 조리로 가란다.
결국 못 찾고 내려왔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이젠 여유를 가지고 차 한 잔을 하러 제법 우아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한복으로 곱게 단장하고 기품이 있는 찻집 여주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주인에게 한 수 배운 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지리산 일대에 차가 잘 자라는 이유는 기후조건과 토양이라고 한다. 연 평균 강수량이 1천700㎜로 이는 차의 성장에 가장 좋은 강수량이라고 한다. 또한 지리산에 접해 있어 산악기후의 특징인 일교차가 큰 것이 차 재배에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화개 십리 길의 야산은 유익한 세균이 잘 번식하는 해발 400-500m에 위치해 있고 약산성을 띠는 풍화토로서 이는 차의 발육에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화계차의 맛의 비결은 '덖음'에 있다고 한다.
덖음은 차를 건조하기 위해 찻잎을 솥에 넣고 볶아서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덖음 과정에서 차의 독성이 제거되고, 차의 맛과 향이 살아난다고 한다.
이는 기계로 채취해서 기계로 찌는 증제차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한다. 증제차는 푸른빛이 돌고 신선한 맛은 나지만 덖음차의 구수한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설명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배운 느낌이다. 지금 마시는 차가 바로 덖음차라면서 맛이 어떤지를 묻는다.
솔직하게 차맛도 모르는 촌사람이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래도 기본적인 품위를 지킨다고
“맛이 참 구수하고 좋습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구수한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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