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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구산선문 동리산 태안사 (1)

by 황교장 2007. 12. 10.

 

구산선문 동리산 태안사 (1)

 

  쌍계사 근처 별이 유난히도 밝고 맑은 마을의 민박집에서 어제의 피로를 말끔히 씻고 상큼한 마음으로 오늘의 답사여행을 나섰다. 이정표를 신라 말 구산선문 중 하나인 곡성의 태안사로 잡았다. 화계장터에서 우회전을 하면 다시 구례방향이다. 구례읍을 지나 섬진강 다리를 넘어 곡성방향으로 우회전을 하면 된다. 여기에서 압록까지 가는 길은 환상적인 풍광이다. 몇 년 전에 곡성 섬진강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화엄사 앞에서 숙박을 하고 곡성으로 가던 날 보았던 물안개가 오늘 아침에도 피어나고 있다.

경치에 취해 한 20여 분 달리다 보면 두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가 나온다. 이곳이 압록이다. 섬진강은 진안에서 발원하여 곡성을 돌아 내려오다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하여 구례와 하동을 거쳐 남해바다에 다다른다.

압록에서 보성강을 따라 10여 분 정도 가다보면 태안사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다리를 건너면 고요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들이 나온다. 아직도 개발의 흔적이 없는 땅이다. 내 어릴 적 농촌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어느덧 태안사 입구가 나온다. 태안사로 가는 길은 입구부터가 기분이 좋다. 지금은 다른 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포장길이기 때문이다. 아침햇살을 받은 늦가을의 단풍이 일품이라 이 길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차를 타고 먼지를 날리기에는 길이 너무 아름다워 걸어서 태안사까지 올라갔다.

 

태안사 가는길

 

꿈 속을 거니는 듯한 길이다. 어떤 시인은 이런 길을 데리고 살고 싶은 길이라 표현했지만 나는 동심으로 돌아가 갖고 놀고 싶은 길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길은 하루 종일 걸어도 피로하거나 지겨워지지 않는 길이다. 이름 모를 산새소리를 들으면서 가는데 나무를 쪼고 있는 딱따구리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딱따구리를 카메라에 담아볼 욕심으로 숲속으로 들어가자 발자국소리에 그만 날아가 버렸다.

아쉽고 미안한 느낌이다. 딱따구리의 아침식사를 방해했다는 생각에서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만공선사와 동자승과의 딱따구리 노래 이야기가 머리를 스친다. 구전되어오는 딱따구리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뒷동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 뚫는구나”


어린 동자승이 마을에 내려가 뜻도 모르면서 이 노래를 배워 왔다.

만공스님 앞에서 노래를 배워 왔다고 자랑을 하면서 부른다.

스님의 방 안에는 마침 대궐에서 심부름 차 들린 상궁나인들이 가득 있었다.

동자승의 노래를 듣고 난 상궁나인들은 배를 쥐고 까르르 웃느라고 난리가 났다.

만공스님 왈

" 참 좋은 노래로구나. 진리라는 것은 이미 뚫려 있는 것인데 우리 절의 멍텅구리들은 이미 뚫려있는 진리도 알지 못하는 구나”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의미 있는 이야기다.

이런저런 생각에 걷다보면 어느덧 태안사에 다다른다.

 

태안사는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에 의하면 경덕왕 원년(742) 2월에 이름 모를 스님 세 분이 개창하였다.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뒤 혜철선사가 당나라 서당지장에게 법을 전수받고 귀국하여 이곳에 동리산파를 이룬 것이 문성왕 9년(847)이다.

우리나라 자생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도 이곳 태안사에서 20세부터 23세까지 혜철에게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광자대사(864∼945년)가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때 가람의 규모는 건물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다고 한다. 한때는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절의 규모가 컸다고 한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왕지를 받들어 중건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1396-1486)이 머물렀다. 태안사는 효령대군의 원당사찰이기도 했다.

태안사는 한국전쟁 때 많은 건물이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능파각과 일주문 두 곳 을 제외하고는 그후에 복원된 것이다. 전란에서 살아 남은 건물은 능파각과 일주문 두 곳뿐이다.


태안사에는 보물 다섯 점이 있다.

1.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2. 대안사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3. 대안사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4.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5. 태안사동종(보물 제1349호)

초기에 보물로 지정된 것은 대안사로 표기했고 그 후에 보물로 지정된 것은 태안사로 고쳐 지정된 것이다.

 

 능파각


아름다운 길을 걷다보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태안사 능파각이다. 태안사 능파각은 계곡 양쪽의 암반을 기초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굵은 통나무를 걸쳐놓고 누각을 지은 것으로 다리와 누각을 겸한 모습이다. 누각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풍광과 누각에서 아래를 내려 보는 풍광 모두가 아름다운 절경이다.

능파각은 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태안사를 창건할 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에 광자대사가 고쳐지었다. 지금의 능파각은 조선 영조 43년(1767)에 복원된 것이다.

능파(凌波)란 가볍고 아름다운 미인의 걸음걸이를 나타내거나 물결 위를 건넘의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계곡의 물과 주변경관이 아름답기 때문에 능파라고 했다고 한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다리와 금강문과 누각을 겸한 것이다. 즉 일석삼조인 셈이다. 능파각을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버리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이다.

 

 태안사 옛길

 

 능파각을 지나면 호젓한 길이 나온다. 아직도 남아 있는 태안사의 옛길이다. 이 길을 걸어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생에 이 길을 걸어봤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된 느낌이다. 어느덧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태안사의 풍수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동리산은 봉두산(鳳頭山)이라고도 불린다. 절 이름도 대안사(大安寺)로 불리어 오다 태안사로 바뀌었다. 동리(棟裏)는 오동나무숲을 뜻한다.

봉두(鳳頭)는 봉황의 머리이다. 봉황은 오동나무숲이 아니면 앉지 않는다고 하는 전설의 새다.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우리나라 지명에 봉황새 봉(鳳)자가 들어있으면 풍수와 관련이 있다고 보면 된다. 이곳의 풍수가 바로 봉황이 날개를 안으로 접으면서 둥지로 막 들어오는 형국인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다. 따라서 태안사는 봉황의 둥지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비봉귀소형의 지세는 생동감과 힘은 있으나 안정감이 부족한 면이 있다. 비봉귀소형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인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과는 그 기운에 차이가 있다. 봉황포란형의 대표적인 명당은 영주부석사의 무량수전이 자리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봉황포란형은 편안하고 온화한 기운을 띠지만 기세가 약하고, 반면 태안사와 같은 비봉귀소형의 땅은 힘과 생동감이 넘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 넘치는 기세를 오동나무숲속으로 감싸 안으려는 의도에서 동리산(棟裏山)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동리산(棟裏山)은 봉황이 먹고 산다는 오동나무 열매가 열린 숲이 있는 산이란 뜻이다.

 

비봉귀소형의 조건에는 네 가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흐르는 물이 있어야 하고, 남쪽에는 연못이, 서쪽에는 큰길이, 북쪽에는 높은 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동쪽에 흐르는 물이 없으면 버드나무 아홉 그루를 심고, 남쪽에 연못이 없으면 오동나무 일곱 그루를 심어야 한다. 그런데 태안사의 입지는 남쪽에 있어야 할 연못이 없었다. 이를 비보하기 위해서 오동나무 일곱 그루 대신 직접 연못을 팠다.  태안사에 새로 만든 연못이 태안사의 지기를 모아주는 혈구(穴口)다. 혈구는 풍수에서 사람의 입에 해당되고, 입에 해당하는 지점에서는 물이 나와야 한다. 혈구는 물이 질퍽질퍽 고여 있는 지점이거나, 가장 확실한 경우는 샘물이 나오는 경우라고 조용헌 교수는 설명 하고 있다.

 

이처럼 땅 기운의 약점을 지명(地名)으로 비보(裨補)한 것이다. 절 이름인 태안(泰安, 大安 : 크게 편안함)의 뜻도 지세를 감안하여 봉황이 아주 편안하게 깃드는 절이라는 풍수적인 사고가 담겨 있다.

이렇게 부족한 점을 보충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풍수인 도선국사의 비보풍수다. 도선국사의 비보풍수는 우리나라 고유의 자생풍수라고 최창조 교수는 주장한다.


태안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다. 구산선문이란 신라 말 선종이 아홉 곳의 사찰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산선문은 다음과 같다.

1. 도의(道義)국사의 장흥 보림사 가지(迦智)산문

2. 홍척국사(洪陟國師)의 남원 실상사 실상(實相)산문

3. 범일(梵日)국사의 강릉 굴산사 사굴산문

4. 혜철(惠哲)국사의 곡성 태안사 동리(桐裏)산문

5. 무염(無染)국사의 보령 성주사 성주(聖住)산문

6. 도윤(道允)국사의 능주 쌍봉사 사자(獅子)산문

7. 도헌(道憲)국사의 문경 봉암사 희양(曦陽)산문

8. 현욱(玄昱)국사의 창원 봉림사 봉림(鳳林)산문

9. 이엄(利嚴)존자의 해주 수미산 광조사 수미(須彌)산문


 이 가운데 사굴산문, 성주산문, 봉림산문은 폐사되었고, 수미산문의 광조사는 북한의 해주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찾을 수 있는 곳은 5곳이다. 이 중에서도 문경의 봉암사는 일 년 중 석가탄신일 하루만 개방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곳이다. 지금 남아 있는 구산선문 중에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곳은 네 곳밖에 없다. 태안사가 바로 네 곳 중 하나인 귀중한 절이다.

 

 태안사 부도밭


 일주문 오른쪽에 아담한 부도밭이 있다.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의 부도인 광자대사탑과 탑비인 광자대사비를 비롯하여 몇 기의 부도가 있다.

태안사가 간직한 보물 다섯 점 중에서 이 부도밭에 보물 두 점이 있다.

대안사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과 대안사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다.

광자대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광자대사는 여선사의 뒤를 이은 동리산문의 제3대 조사로 동리산문을 크게 일으킨 선사이다.

법명은 윤다(允多)이고, 자는 법신(法信)이며, 광자(鑛慈)는 시호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8세에 집을 떠나 동리산에서 도선국사로부터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는 곧 마음에 있는 것이니, 스스로 깨우쳐 찰라에 깨달음을 얻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뒤 가야갑사(伽倻岬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 적인선사의 법제자인 여선사의 법을 이었다.

뛰어난 법력으로 선풍을 크게 떨치자 신라의 효공왕(재위 897-912)이 가르침을 줄 것을 청하고, 또한 고려의 왕건도 사신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신라의 국운이 이미 다했음을 본 광자대사는 왕건의 부름에 따른다.

왕건이 크게 기뻐하면서

“임금에게 있어 국가의 행복은 무엇이고 백성의 행복은 무엇인가?”를 묻자

“오늘의 물음을 언제나 잊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광자대사는 고려 혜종2년(945)에 82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이러한 광자대사의 사리를 보관해 놓은 곳이 바로 광자대사부도다.

광자대사부도를 살펴보자.

 

광자대사부도

 

부도의 형태는 2.8m 높이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부도이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 여러 층의 하대석이 어슷하게 놓여 있다. 기단부의 아래 기단에는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지고, 위 기단에는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였다.

탑신은 앞뒷면에는 자물쇠모양인 문비형, 그 좌우에 사천왕상, 나머지 남은 두면에는 가마를 조각했다. 이 가마는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옥개석은 목조건물의 양식을 그대로 새기고 기왓골이 잘 나타나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네모난 기와집 지붕),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 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 모양의 장식), 보개(寶蓋: 닷집모양의 부분),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차례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고, 부도의 구성과 기법이 정교하여 당시 부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광자대사부도비

 

옆에 있는 광자대사부도비(보물 제275호)는 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귀부는 잘린 것을 다시 붙여 놓았고, 비신도 깨진 것을 귀부 위에 올려 놓고 그 위에 이수를 올려 놓았다. 이수도 적인선사의 부도비 이수와 한때 바뀌었다고 한다. 이수에 돋음새김한 조각이 가릉빈가인지 봉황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날아오르려는 동작이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가릉빈가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처럼 새의 목이 떨어져 나가 가릉빈가인지 봉황새인지를 정확하게 구별을 할 수가 없다. 이수의 네 귀퉁이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신성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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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ning Has Broken

Morning has broken like the first morning

Blackbird has spoken like the first bird

Praise for the singing, praise for the morning

Praise for the springing fresh from the world

아침이 밝았어요, 처음 맞는 아침처럼

찌르레기가 노래를 했어요, 처음 노래하는 새처럼

노래에 대해 찬양해요, 아침에 대해 찬양해요

세상의 새로운 약동에 대해 찬양해요

Sweet the rain"s new fall, sunlit from heaven

Like the first dewfall on the first grass

Praise for the sweetness of the wet garden

Sprung in completeness where his feet pass

처음 내리는 비는 달콤해요, 하늘에서 햇살이 비추어요

새싹 위에 처음 맺는 이슬처럼

촉촉한 정원의 달콤함에 대해 찬양해요

그의 발길이 지나가는 곳 완전함에서 나왔죠

Mine is the sunlight, mine is the morning

Born of the one light Eden saw play

Praise with elation, praise every morning

God"s recreation of the new day

햇살은 나의 것, 아침은 나의 것

빛줄기 하나에서 태어나, 에덴은 노는 걸 보았어요

의기양양하게 찬양해요, 모든 아침을 찬양해요

새날에 대한 하나님의 놀이죠

Morning has broken like the first morning

Blackbird has spoken like the first bird

Praise for the singing, praise for the morning

Praise for the springing fresh from the world

아침이 밝았어요, 처음 맞는 아침처럼

찌르레기가 노래를 했어요, 처음 노래하는 새처럼

노래에 대해 찬양해요, 아침에 대해 찬양해요

세상의 새로운 약동에 대해 찬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