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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국보 제10호 백장암삼층석탑

by 황교장 2007. 12. 16.

국보 제10호 백장암삼층석탑

 

동편제 발상지인 운봉 화수리를 나와 실상사로 가려면 인월을  지나 함양군 마천 방향으로 가야 된다.

실상사 본절을 가기 전에 실상사의 부속암자인 백장암을 들러야 한다.

백장암에는 안 보고 가면 서운할 국보 10호 백장암삼층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백장암 삼층석탑과 석등

 

실상사에 처음 갔을 때 안내판에는 국보가 1점, 보물이 몇 점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정작 실상사에는 눈을 닦고 보아도 어디에도 국보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스님이 지나가기에 국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니 실상사에서 인월 쪽으로 약 2km쯤 가면 오른편에 있는 백장암에 있다고 하셨다.

그때 백장암을 답사하고 난 후 여러 팀과 답사를 했다. 그러나 한 동안 올 기회가 없어 약 십년만에 다시 온 것 같다.

나는 백장암(百丈庵)이라는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백장(百丈)선사가 뇌리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백장선사는 불교에서 노동을 최초로 도입한 분이다.

스님도 신도들이 주는 시주만으로 먹고 살지 말고 직접 노동을 하면서 참선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절에 가보면 절 주위에 너무 지저분하게 그냥 놓아두고 있는 절이 많다.

이러한 절의 스님들을 보면 무위도식(無爲徒食) 그 자체로 보인다.

정말 게으른 스님들이다. 이렇게 게으른 스님들에게 약이 되는 분이 바로

백장선사이다.

백장선사는 도의선사와 실상사를 일으킨 홍척국사의 스승인 서당지장과 함께 마조 도일선사의 수제자이다.

백장암을 창건한 분은 실상사를 세운 홍척국사다. 따라서 백장암이란 암자의 이름은 홍척국사가 스승인 서당지장의 사형인 백장선사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백장선사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백장선사가 어느덧 팔십을 넘긴 백발노인이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밭일을 계속 하는 것이었다. 이에 제자들은 안타깝고도 부담스러워 여러 차례 밭일을 그만두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나 선사는 묵묵히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제자들은 의논 끝에 스승의 괭이를 숨겨 버렸다.

백장선사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괭이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를 못했다. 백장선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바로 단식에 돌입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제자들은 백장에게 물었다.

“스님 공양을 왜 안 드시는지요?”

백장이 꾸짖어 말하기를 “일을 하지 않았으니 먹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수 없이 제자들은 괭이를 돌려 주었다고 한다. 바로 이 내용이 유명한 “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는 먹지 않는다” 이다.

훌륭한 가르침이다.

 

 

백장암 삼층석탑이 있었던 곳

 

백장암을 올라가는 길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별로 없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그런데 석탑과 석등을 전에 있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

전에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 있어 운치가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큰 절집이 들어섰다. 새로이 탑 자리가 조성된 것이다. 탑 자리가 영 엉성하다. 백장암이 아니라 백장사로 고쳐야 할 것 같다.

너무 넓은 공간에 탑이 있어 주변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백장암의 전체 풍수를 면밀히 조망을 해 보니,

첫 느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백장암 건물과 삼층석탑과는 거의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였다.

탑 앞에 서서 전체 풍수를 보니 사신사가 제법 잘 어울리고 있다.

요즈음 새롭게 조성된 절을 보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데 백장암은 누군가가 탑터를 잡았는지는 몰라도 안목이 있는 분이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장암삼층석탑

 

백장암은 828년(흥덕왕 3) 홍척국사가 실상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다.

1468년(세조14) 실상사가 화재로 폐허가 된 이후부터 1679년(숙종5)까지는 백장암이 중심 사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백장암에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국보 제10호),

실상사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가 있다.

청동은입사 향로에는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선조 17년(158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예부터 부처님께 올리는 주된 공양물은 향과 꽃이었는데, 향은 몸의 냄새 뿐만 아니라 마음의 때인 번뇌와 망상까지도 소멸시켜 주기 때문에 향공양은 매우 중시되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향을 피우는데에는 도구가 필요하다. 향을 피우는 도구가 바로 향로이다.

청동은입사향로는 은실로 만든 가는 선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무늬도 화려하고 우아하다. 그러나 청동은입사향로는 현재 전주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여기서 볼 수 있는 문화재는 삼층석탑과 석등뿐이다.

먼저 백장암 삼층석탑부터 면밀히 살펴보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5m의 탑으로 국보 10호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의 색깔이다. 다른 화강암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약간 검은 색을 띠고 있다. 연곡사 동부도와 석질의 색깔이 많이 닮았다.

그러나 강도는 좀 더 무르게 보인다. 그리고 탑의 형태에서 뭔가 어색하다.

균형미가 없다. 조금 허전하다. 바로 정상적인 기단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주와 탱주도 없다.

일반적으로 탑은 층수가 올라갈수록 일정 비율로 높이와 너비가 줄어드는 데 반해 이 탑은 1층의 옥신만 조금 클 뿐 2, 3층의 옥신은 거의 비슷한 크기다. 1, 2, 3층 옥개석 또한 크기가 비슷하여 황금비율이라는 삼층석탑과는 거리가 멀다.

전형적인 이형석탑(異形石塔)이다.

이형(異形)이란 한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다를 이(異)자에 형태 형(形)자이다. 따라서 이형석탑은 형태가 다른 돌탑이다. 일반적인 탑과는 전혀 다른 탑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형석탑은 불국사다보탑(국보20호)과 화엄사사사자석탑(국보35호)이다. 그 외에도 분황사 모전석탑(국보30호), 정혜사지십삼층석탑(국보40호), 경천사지십층석탑(국보86호), 운주사 석탑 들 등이다.

백장암 삼층석탑이 뭔가 불균형을 이루는 이형석탑이면서도 당당히 국보 10호로 지정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석탑에 새겨진 조각 때문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화려한 조각장식이 빼어나다. 탑 전체가 조각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탑신(塔身)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1층옥신

 

1층 옥신(屋身)에는 보살상과 악귀를 밟고 있는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2층 옥신에는 비파 등 주악을 연주하는 주악천인상이, 3층 옥신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상륜부(相輪部)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삼층옥신과 옥개석 노반 복발 보개

 

그런데 2004년에 백장암삼층석탑 주변을 조사하면서 기단부로 추정되는 부재 6점이 발굴된 것을 원광대가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백장암 석탑은 어느 때 무너진 것을 기단부 없이 복원해서 현재까지 내려온 것”이 밝혀졌다.

그럼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상상해보자

당당한 기단부 위에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고 화려한 조각상을 새긴 매우 아름다운 이형석탑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석탑을 발굴단인 원광대학이 석탑 주변에서 팔부중상이 조각된 기단석 부재 6점을 발굴했는데도 발굴보고서엔 명기하고도 사실 관계를 거짓 공시하여 다른 부재와 함께 지금 대학이 보유하고 있다(불교신문 2052호. 2004.7.27.).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하루 빨리 기단부를 가져와서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백장암삼층석탑은 다른 석탑에 비해 특별한 점이 있다.

첫째,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을 새긴 것이다. 2층 옥신의 각 면에 2구씩 양각돼 있는데, 각각 공후, 생황, 비파, 장구, 배소, 나각, 젓대, 피리 등을 연주하고 있다. 이들은 위대하신 부처님께 음악공양을 올리고 있다. 이는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공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둘째, 팔부신중 조각이다.

보통 팔부신중은 서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에 표현된 것은 악귀를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이는 신라 후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목조건물 양식의 난간 무늬

 

셋째, 난간이다.

 탑의 기단과 2,3층 옥신 하단에는 목조건물의 난간을 조각한 것이다. 난간의 모습은 옆에 있는 석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탑의 난간의 모습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난간의 파편과 형태가 일치하여 이 탑의 난간이 통일신라시대 난간의 모습을 모각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상륜부

 

넷째, 상륜부이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보개, 수연이 완전한 찰주(擦柱)에 겹쳐 있다.

이는 거의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현존하는 탑 중에서 상륜부가 조성당시의 형태로 남아있는 탑은 몇 안 된다. 그 중 하나가 백장암삼층석탑이다.

여기서 상륜부에 대해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탑의 기본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기단부는 탑신을 올려놓는 부분을 말한다.

탑신부는 기단 위에 옥신과 옥개로 구성된 탑신을 말한다.

탑의 한 층은 옥신과 옥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옥신과 옥개가 3층으로 구성되면 삼층석탑이고 5층으로 구성되면 오층석탑이다.

상륜부는 탑신 위쪽에 조성된 것을 말한다.

상륜부에 조성되는 내용물은 아래로부터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의 순서로 찰주(擦柱)에 꿰어 올려져 있는 것이 기본 구조다.

탑의 명칭

 

아래에서 구체적인 용어를 정리해 보자.

노반(露盤) : 탑의 상륜부의 기초가 되는 방형의 부재를 말한다.

복발(覆鉢) : 노반 위에 있는 발우를 엎어 놓은 것 같은 형태의 것을 말한다.

앙화(仰花) : 탑의 복발위의 꽃잎을 위로 향하여 벌려 놓은 모양으로 된 부분을 말한다.

보륜(寶輪) : 상륜부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노반 위에 앙화와 보개와의 중간에 있는 아홉 개의 바퀴 모양의 테두리 장식이다.

보개(寶蓋) : 보륜과 수연 사이에 있는 닫집 모양의 부분이다. 이는 열반의 경지를 나타낸다.

수연(水煙) : 탑의 윤상에 붙어있는 불꽃 모양의 장식품을 말한다.

용차(龍車) : 용차는 임금이 타던 수레가 본래의 뜻이나 여기서는 상륜부의 마지막에 있는 보주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보주(寶珠) : 불교에서는 중생을 정신적인 번뇌와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덕과 신통력을 가진 상징체다. 이는 부처의 진리가 사방으로 고루 비치는 빛을 상징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형태는 원형보주(圓形寶珠)와 끝이 뾰족한 첨정보주(尖頂寶珠)로 나눌 수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은  보주, 용차, 앙화는 볼 수 없다. 처음 만들 때 부터 없게 만들어 졌는지, 아니면 그 동안 없어 졌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리고 보개 밑에 보륜이 있는데 여기서는 명확한 구별이 곤한하다. 보륜의 형태를 뛴 보개가 3개나 겹쳐져 있다. 이형 상륜부라고 명명하면 될 것 같다.  실상사동서삼층석탑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이처럼 탑의 상륜부는 복잡하다. 백장암삼층석탑은 천 년을 훨씬 뛰어 넘어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백장암이 있는 곳이 명당이라 전란을 피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석등

 

이젠 석탑 옆에 있는 석등을 살펴 보자.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부처님의 지혜의 불빛으로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힌다는 의미다.

석등의 기본형은 일반적으로 하대석, 중대석 또는 간주석, 상대석을

기대로 삼고, 그 위에 등불을 직접 넣는 화사석과 옥개석을 얹으며

정상부를 보주 등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은 높이 2,5m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위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옥개석은 간결하며 평평하고 얇은 낙수면을 갖추고 있다. 옥개석 상단에는 보주(寶珠)를 갖추고 있는데 보주는 단엽앙련으로 연봉형이다.

따라서 이 석등은 하대석(下臺石)과 간주석(竿柱石), 그리고 상대석(上臺石)과 화사석(火舍石), 옥개석(屋蓋石) 등을 잘 갖춘 석등이다.

특히 화사석 밑의 난간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위 난간대는 동자주(童子柱, 짧은기둥)에 의해 받쳐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청운교 등의 돌난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백장암 석등을 자세히 보면

연꽃잎이나 모서리 선이 명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화사석과 간주석의 면을 보면 마치 기계로 밀어 놓은 듯 아주 매끈하다.

그 시절에 무엇으로 가공했기에 단단한 화강암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만들었을까 하는 경이로움이 앞선다.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한 조상들을 갖고 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전자산업의 융성이 그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민족과 조상에 대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백장암을 떠나 본절인 실상사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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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 / Susan Jacks

Sometimes love would bloom in the springtime

Then my flowers in summer it will grow

Then fade away in the winter

When the cold wind begins to blow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 ♡ ♥ ♡ ♥ ♡ ♥ ♡ ♥

So hold my hand and tell me

You'll be mine through laughter and through tears

We'll let the whole world see our love will be

Evergreen through all the years

For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봄이 되면 때때로 사랑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내 사랑의 꽃도 활짝 피어납니다.
그리고는 겨울이 다가와 꽃은 시들어가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그 사랑이 푸르고 푸르러있다면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푸르른채로 남아있지요.
사랑이 푸르고 푸를 때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처럼...


그러니 나의  손을 잡고 말해줘요.
웃음과 눈물 속에서도  나의 사랑으로 남겠다고...
푸름을  간직한 우리사랑
모든 세상이  볼 수있게 말 이예요.
하지만 사랑이 언제나 푸르고 푸르러 있기에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푸른  채 남아있겠죠.
사랑이 푸르고 푸를 때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