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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구산선문 실상사 (2) - 실상사의 보물들

by 황교장 2007. 12. 21.

구산선문 실상사 (2)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 서당지장의 제자인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창건했다.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은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2대 수철화상과 3대 편운(片雲)대사가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조선 세조 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다.

 그러다가 숙종 때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두 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세 번째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상사 천왕문

 

 이 실상사에는 고종 19년(1882)에 있었던 슬픈 이야기가 있다.

실상사에는 옛날부터 누구에 의해 지어진 말인지는 모르지만 “승천년 속천년(僧千年 俗千年)” 즉 중의 터로 천년이 지나면 속인의 터로 천년이 바꾸어진다는 몹시 허무맹랑한 말이 전해와 떠돌고 있었다. 이런 허망한 내용을 믿고 실상사땅을 자기들 소유로 만들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골양반들이 있었다.

함양 사는 양재묵(楊載黙)과 산청 살던 민동혁(閔東赫)이란 사람이 있었다. 전설대로라면 승(僧) 천 년이 지났으니 속(俗) 천 년의 운세로 바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실상사를 불태우면 수백 두락의 전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심복인 노복(奴僕)을 시켜 절을 태우게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얼마 후에 노복이 자수를 했다. 이에 절에서는 두 사람을 운봉 형방청에 고소를 했다. 그러나 형방청은 이들이 준 뇌물로 인해 유야무야 넘어갔다. 따라서 절에서는 운봉 형방청의 상급기관인 전주 형방청에 고소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주 형방청에서는 도리어 산골 중들이 염불은 하지 않고 양반들을 모함하여 관가에 소송이나 한다고 하여 도리어 스님들을 잡아 가두게 된다.

 

 그럴 즈음에 경북 문경에 사는 정환중(鄭煥仲)이란 양반 한 사람이 서울로 올라가 나라에 상소하기를 “실상이 망하면 나라가 쇠하고 실상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는 호국사찰인데 양재묵과 민동혁이 실상사를 방화 멸망케 하고 그들의 소유로 만들려고 흉계를 꾸민 범인을 운봉 형방청에 고소를 하였으나 운봉영장은 뇌물에만 마음이 끌려 귀정(歸正)을 지어주지 않고 있으니 나라 망하기를 바라는 역적 놈들입니다. 실상사가 하루 빨리 복구되어 호국상축(護國上祝) 기원도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재(適材)는 못되오나 소인을 운봉영장으로 하명하여 주시면 곧 실상사를 복구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나라에서도 이를 그럴듯하게 여겨 그를 운봉영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정환중은 운봉영장으로 부임하자 곧 주민들을 동원하여 실상사 법당 재건에 열중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해보니 자금이 너무 많이 들어 일반 백성들의 힘 만으로는 도저히 완성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에다 보조금을 하사해 주기를 간청하게 되었다. 때맞춰 나라에서 보조금이 하사되었다. 그때가 고종 25년(1888년) 무렵인데 무거운 엽전으로 쓰던 화폐가 은전으로 바뀌어 간편한 화폐로 나왔다. 운봉영장 정환중은 간편한 은전을 보자 견물생심이라 그만 마음이 변하여 그 돈을 훔쳐 도망을 갔다. 따라서 실상사는 두 번이나 배신을 당한 것이다. 돈이 참 무엇인지 세상사의 길흉의 한 복판에 있는 것이 돈인 셈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에 지금의 보광전(寶光殿)을 지을 수 있었다.

보광전은 본래 넓은 금당터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단을 만들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었다. 화재가 나기 전 금당의 주춧돌 등이 아직도 남아 있어 절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추증된다.  

 보광전 안에는 현종 5년(1664)에 제작된 범종이 있다.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지도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일제 말기에는 실상사 주지스님이 일본경찰한테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상사에는 암자를 포함하여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이 있다.

국보 제10호인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을 필두로 보물은 다음과 같다.

 

1.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2.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3.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4. 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

5. 실상사삼층석탑 2기(보물 제37호)

6.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

7.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8. 실상사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9. 실상사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

10. 실상사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11. 실상사약수암목조탱화(보물 제421호)

 

 이 중 실상사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전주박물관에 있는 실상사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와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실상사약수암목조탱화(보물 제421호)이다.

 

실상사 동서쌍탑 

 

 실상사 입구인 천왕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동서 삼층석탑(보물 37호)이다. 상륜부가 화려하게 남아 있어 보는 순간 내 가슴을 떨리게 했다. 탑에 관한 지식이 없을 때에 본 실상사 탑과 10년이 지나 어느 정도 알고 난 후에 보는 탑의 느낌에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아는 것만큼 느낀다는 말이 실감이 난 것이다. 이 쌍탑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다.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탑이다. 특히 상륜부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실상사서삼층석탑

 

 쌍탑 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擦柱)를 중심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다.

 쌍탑은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복원할 때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실상사석등

 

 보광전 앞에는 거대한 석등이 있다. 우선 보기에는 세계 최대라고 알려진 화엄사 석등(높이 6,4m)보다도 더 크게 느껴진다. 화엄사석등은 각황전이라는 웅장한 건물 앞에 있어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고 이곳 실상사 석등은 자그마한 보광전 앞에 있어 더욱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옥개석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이는 고복형 즉 기둥이 둥근 장고 모양의 석등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한다.

 

장고 모양의 석등 기둥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는 것은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옥개석위의 상륜부에는 복발, 보개, 보주가 차례로 놓여있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석등의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는 실상사에만 있는 유일한 것이라 한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보림사석등(국보 제44호)과 담양의 개선사지석등(보물 제11호)의 장단점을 절충한 양식이라 한다.

 

 이젠 실상사 최고의 명물을 감상할 차례이다. 보광전 옆에 조금만 더 가면 약사전이 나온다. 현존하는 경내 건물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이 약사전 안에 모신 부처가 바로 실상사철조여래좌상(보물 41호)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철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 가운데 최초의 불상이다.

 나발(螺髮, 곱슬곱슬하여 소라 껍데기 모양으로 보이는 머리털)로 처리된 머리위에 큼직한 육계를 얹고 있으며, 근엄하면서도 박력 있는 얼굴, 당당한 가슴과 가는 허리 등은 신라중엽 불상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2,66m에 이르고 주조할 때 철이 무려 4천근이 들어간 거대한 불상이다.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인을 취한 두 손은 새로 찾아 내어 철제손 그대로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이 철불의 눈은 천왕봉을 보고 있다. 철불과 지리산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실상사에 철제여래좌상을 세웠다고 하는 호국 철불이다. 또한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영험한 불상으로도 알려졌다.

 

 그리고 이 철불은 일반인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불상이다. 불상의 손을 만지면 복을 얻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손을 만져서 불상의 손이 매끈매끈하여 빛이 난다.

이 불상은 약사여래불로 알려져 있다. 약사여래는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이다. 이는 굶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온갖 괴로움과고통 받는 이를 구제하여 심신의 안락을 얻게 해주는 부처이다.

 그러나 이 철불의 수인을 보면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인을 취한 아미타불이다. 일반적으로 약사여래불은 왼손에 약함을 든 수인을 갖춘 형태로 되어 있다.

 아미타불이 있는 곳은  오직 즐거움만 있다는  극락(極樂)이다.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극락은 고뇌하는 중생들의 영원한 피안이다. 그곳에는 빛이 있고, 생명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해탈이 있다. 아미타불은 무량한 빛 그 자체이며, 무량한 수명이다. 불교도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말한다.  그러나 죽어서 가는 곳이다. 반면에 약사여래불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을 들어주는 현실구복적인 부처다. 따라서 우리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좋다'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그래서 일반 민중들에게 아미타불보다 약사여래불이 인기가 더 많다.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하듯이 일단은 믿으라고 하지를 않는가. 사실은 아미타불이라도 약사여래불이라 믿고 복을 빌면 복도 주고 아픈 사람들에게는 병도 낮게 할 수도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마음이지 겉으로 들어나는 형식이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구산선문의 선종이 주장하는 "心卽佛(심즉불,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진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2

 

 May it be An evening star

Shines down Upon you

May it be When darkness falls

Your heart Will be true

You walk a lonely road

Oh how far you are from home

그대 앞길을 환히 밝히는

빛나는 저녁별이 되게 하소서

암흑이 드리워질때

그대 가슴에 진실이 녹아들게 하소서

외롭고도 외로운 길을 걸어서

그대 고향을 떠나 얼마나 먼길을 왔던가

Morrinie utulie(darkness has come)

Believe and you will find your way

Morrinie utulie(darkness has come)

A promise lives within you now

암흑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길을 얻을 것이오

암흑이 드리워져도

그 약속은 그대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리니

May it be The shadow's call

Will fly away

May it be You journey on

To light the day

When the night is overcome

You may rise To find the sun

어둠 속 망령들의 외침을

떨쳐버리게 하소서

낮같이 불밝히는 그런

여정이 되게 하소서

암흑이 압도할지라도

그대 태양을 찾아서

일어서게 하소서